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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7-국제평화대행진2019-01-0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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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국제평화대행진


한청련은 다른 나라 조직들에 비하면 숫자도 많지 않고, 가난한 민간단체였지만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활동으로 공신력을 얻었다. 지적수준이 높은 도시인 진보적인 버클리시를 상대로 외교를 벌여 1986년 5월에 ‘광주민중의 날’을 선포하게 만들었다. 가장 극적인 연대활동은 1989년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이었다. 통일운동과 평화운동과 국제 연대 운동을 하나의 단일 운동으로 결합시킨, 한국의 진보운동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1989년 7월, 평양에서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다. 세계청년학생축전은 전 세계의 사회주의 청년들이 모여 치르는 축제인데, 올림픽처럼 장소를 옮겨가며 치르는 대회이다. 1988년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듯이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그런데 평양 축전엔 평소와 달리 특별한 사람들이 참가하게 된다. 남한의 전대협에서 대표로 보낸 임수경이 참가했고, 미국의 한청련이 주도한 국제연대 소속의 멤버 200여 명이 참가했다. 두 조직은 사전 상의 없이 각각 사람을 보내게 된다. 남한 언론의 초점이 임수경의 방북에 맞춰지는 바람에 한청련이 주도한 국제연대의 참가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참가자의 규모와 의미에 있어서 국제연대의 참가야말로 큰 의의를 갖고 있었다.


반전반핵운동을 통해 국제적 연대망을 갖춘 한청련은 이 대회를 맞아 한반도의 문제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로 삼기로 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남한에 4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더욱, 남한에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윤한봉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세계의 이목을 끌기 위한 방법으로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국제적인 행진을 계획했다.
한청련과 국제연대는 먼저 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고 축전이 끝나면 국제평화대행진이란 제목으로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행진을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미국에서는 뉴욕에서 워싱턴DC까지 미주평화행진을 한다는 것이다. 이 무렵 한반도의 미군 핵무기 철거를 요청하는 10만 명 서명운동이 마무리되는 중이었다. 미주 행진단은 서명용지를 짊어지고 가서 워싱턴의 미국 의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북에서의 행진은 미국과 북한의 두 정부를 상대로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았다. 한청련은 북한 단체방문에 대해 미국 재무부에 정식으로 서면질의서를 보내는 한편, 법적 규제를 피할 수 있도록 영국에 본부를 세웠다. 영국에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 준비위원회’ 약칭 ‘국제준비위’라는 이름의 위원회를 만든 다음 이를 통해 방문객을 모으는 형식을 취했다.
국제준비위는 영국인 휴스테픈스를 의장으로 추대하고 본부 사무실을 런던에 두었다. 아시아지역 사무국은 필리핀의 마닐라시티에 두었고, 태평양지역 사무국은 호주의 멜버른에 두었으며, 북미주지역 사무국은 워싱턴DC에 두었다. 물론 실질적인 모든 일은 미국의 한청련에서 진행했고 윤한봉이 총괄했다. 비용은 참가자 본인이 내는 걸 원칙으로 하되 가난한 제3세계 참석자의 여비는 국제준비위원회가 일부 부담키로 했다. 합수 형님은 북한에 대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종북이 아니야. 제가 알고 있기로는 북한의 깃발을 들어 달라 이런 요청이 많이 있었던 걸로 알아요. 합수 형님은 죽어도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거든요. 어느 한 정권이나 한 이념 쪽에 치우쳐서 하면 운동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끝난다고 보았어요.


본격적인 행진 준비가 시작되었다.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치우지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북한 정부가 주도하는 세계청년학생축전과는 엄격히 구별하기로 했다. 북한 측으로부터 물품을 지원받는 일은 절대 사양했다. 북한 측과의 공동개최에 대해 윤한봉은 완강히 거부했다. 몇 달간의 준비 끝에 출발 준비가 완료되자 윤한봉은 중요한 원칙들을 재점검했다. 우선 행진 주최는 한청련이 아닌 국제준비위로 한다는 것, 한국인만의 행사가 되지 않고 국제연대임을 보여줄 것, 전대협 대표 임수경 씨가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하는 문제는 본인의 의사에 맡길 것, 국제평화대행진은 북한을 위한 행진이 아니고 한반도 전체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행진인 만큼 회원들은 정치적 긴장을 유지하고 언동에 주의할 것을 확인했다.

 
국제평화대행진은 쟁쟁한 후원단체들의 명단도 확보했다. 독일의 녹색당을 비롯한 세계의 70개 진보정당과 평화, 여성단체들이 후원자로 참가했다. 한청련은 마침내 1989년 7월 초 선발대 8명을 평양으로 보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기밀유지를 풀어 런던, 워싱턴DC, 마닐라시티, 멜버른, 평양 등에서 잇달아 국제평화대행진을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막상 평양에 도착한 국제준비위 선발대는 북한 관리들과 심한 갈등을 빚었다. 국제준비위는 북이든 남이든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되며 민간단체인 국제준비위의 독자 주최로 해야 한다고 맞섰으나 관료체제의 경직성은 요지부동이었다. 자신들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는 만나주지도 않고 연락할 길도 없었다.
윤한봉도 강경했다. 계속해서 국제전화로 보고를 받으면서 행진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북한 당국을 주최로 넣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지시했다. 북쪽 관리들의 완강한 태도에 맞서 한청련은 협상하러 간 대표들이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하자 그들을 기다리며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시위와 농성까지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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