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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6-폭설; 크리스마스 트리를 팔다2019-01-0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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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폭설 속의 크리스마스트리

 

국제연대로 대표되는 한청련의 활동은 결코 편안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여느 단체에 비해 활동량이 많은 데다 사무실은 드넓은 미국 땅에 대여섯 군데나 되니 관리비만 해도 막대했다. 해마다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 집회에 참가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지역에 따라, 시기와 조건에 따라 갖가지 재정사업이 이뤄졌다.

크리스마스트리 판매도 그중 하나였다. 미국 북동부 해안지대의 겨울은 종잡을 수 없는 한파와 폭설의 연속이었다. 겨울이 오면 수십 명의 한청련 회원들이 뉴욕으로 모여들었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나무를 전시하고 배달하고, 24시간 돌아가며 지켜야하기 때문이었다.


회원들은 11월 말부터 한 달간, 혹독한 추위 속에서 제자리 뛰기로 시린 발을 풀어가며, 대소변도 제대로 못 보면서 나무를 팔았다. 뉴욕에 거주하는 회원들은 주로 식사를 맡았다. 꽁꽁 언 회원들에게 차가운 빵과 음료수를 줄 수는 없었다. 매 끼니마다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을 만들어 판매 장소마다 돌아다니며 배급했다.

트리용 전나무는 맨하탄 중심가의 야채가게 ‘델리’ 앞 등 몇 곳에서 팔았는데 나무는 뉴욕 한청련 재정부장이자 ‘델리’의 주인인 강병호가 도매상에 가서 싣고 왔다. 전나무가 팔리면 회원들이 배달까지 해주었는데 파는 것도 문제지만 지키는 것도 문제였다. 밤이 되면 빌딩 사이로 몰아쳐오는 영하의 칼바람이 코와 귀, 손가락을 잘라가버릴 듯 매서웠지만 회원들은 교대로 보초를 섰다. 그래도 훔쳐 달아나는 사람이 있으면 소리치며 쫓아가 빼앗아왔다.

 

고생의 성과는 있었다. 트리용 나무장사는 2년간 2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렸다. 각 마당집들의 월세며 전화세, 복사비 등 운영비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다. 일부는 한국의 민주화운동 지원금으로도 썼다.

하지만 언제나 자금은 부족했다. 각 지역의 한청련 회원들은 온갖 희한한 일들을 해냈다. 한인들의 축제나 행사장에서는 김치, 불고기 같은 고유음식을 만들어 팔았다. 옷에 단춧구멍 뚫기, 전자부품 조립하기, 인쇄물 분류해주기 같은 가내수공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 회원들은 단체로 할리우드에 진출해 영화촬영장의 엑스트라로 나가기까지 했다.

한청련 회원 중에는 의사나 자영업자처럼 수입이 좋은 이도 있지만 소수였다. 대다수는 저임금과 단순노동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학을 다니다가 때려치운 경우는 더 힘들었다. 이런 처지임에도 어떻게든 매달 회비를 냈을 뿐 아니라 한 달에 두 끼니를 굶고, 그 두 끼니 식대를 기금으로 냈다.


이렇게 기금을 계속 내니 회원들은 점점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좋은 자동차를 몰고 나타나던 회원의 차는 어느새 싸구려 중고로 바뀌었다. 질 좋은 가구나 전자제품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사는 이가 많았다. 철 따라 새 옷을 사 입던 시절은 잊어야 했다. 모든 회원들이 윤한봉처럼 되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살다보니 거지니 넝마주의라고 놀림 받기도 하고, 신흥종교 교단 같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반전평화 집회들과 내부 교육과 행사로 남들의 평가 따위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가장 극적인 연대활동은 1989년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이었다. 외국인들이 더 많이 참가한 이 행진은 남북의 통일운동을 넘어, 한청련과 한겨레가 이뤄온 국제연대운동의 정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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