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

 
 
 

 

 

고향 친구 조광흠은 회고한다. “한마디로 똑똑한 친구였어. 국민학교 1학년에서 6학년까지 교육감상, 도지사 상을 독차지했으니까. 키는 제일 작았는데도 아주 똘똘했지. 민첩하고 동작도 빨라서 축구를 하면 제일 작은 윤한봉이 제일 등치도 크고 힘이 센 애들하고 편을 갈랐어. 어릴 때부터 대화를 해서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 아주 뛰어난 친구였지. 말을 참 잘했어.”

 

  • 1947.12.22. 전남 강진 출생
  • 1954.3.3. 강진 칠량초등학교 입학
  • 1960.3.4. 조선대학교부속중학교 입학

 

야무지고 영특한 아이, 말 잘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는 윤한봉은 여기에 한 가지 특징을 더 가지고 있었다. 유달리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었다. 고향 후배가 광주에서 자취하며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집이 가난해 쌀 사먹기도 힘들어 했다. 윤한봉은 시골에서 쌀이 올 때마다 자기 가방과 동생 윤영배의 가방에 쌀을 가득 채워서 후배가 사는 동명교회 사택까지 그 먼 길을 갖다 주었다.

 

  • 1963.3.5. 광주제일고등학교 입학
  • 1966.1.21. 광주제일고등학교 11회 졸업
  • 1968. 보병 12사단 52연대 지원 입대

 

이제 난 대표적인 모범생이 됐지 이제. 고등학교 때, 공부안하고 맨 땡땡이나 치고, 그런 거 반성도 많이 했고. 인생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을 했고. 지난날 그렇게 부실하게 살았던 것부터 반성하고 알차게 정말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그래가지고 고무신 끌고 다니고, 그냥 예를 들면 전대 뒤에서 하숙할 때 한 달에 시내 한번이나 나올까 정도로. 나오지도 않고. 공부 열심히 했지. 그러니까 인자 농대에서 축산과에서 아예 교수들이 나에 대한 기대가 커 가지고 유학 갔다 와서 강단에 다시 서라고 교수되라고.

 

  • 1971.3.4. 전남대 농과대학 축산학과 입학(23세)
  • 1971.12.30. 교련반대시위참여 무기정학

 

“한봉 형, 좀 나와 보시요. 큰일이 터졌소.” 나가보니 라디오에서 충격적인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유신헌법이 선포되었다는 것이었다. 윤한봉의 인생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기 방에 돌아와 공부하느라 펼쳐 놓았던 책과 영어사전을 볼펜, 연필로 마구 찍어대고 황소처럼 벽을 머리로 들이받으며 고함을 질렀다.

 

“방에 들어와 가지고 보던 책에 볼펜으로 찍어불고 사전 찍어불고 벽에다 박치기하고. 어떻게 화가 나는지, 뭐야 나는 너무 무시당한거지. 국민들 알기를 이 새끼들이 벌레로 알고 있구나. 어린애 취급하고, 바보취급하고. 아 내가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나는 공부는 끝이다. 나는 앞으로 저놈들하고 싸워야겠다. 다른 놈들같이 시시하게 안한다. 나는 목숨 걸고 싸운다!”

 

  • 1972.10.17. 유신헌법발포 반독재투쟁 결의
  • 1973. 전남대 민족사연구회 가입 활동
  • 1974.4. 민청학련 사건 피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5년 선고.
  • 1975.2.16. 대전교도소에서 출소. 석방 일주일 전 부친 별세

 

아버지의 죽음에 이어 그를 분노에 빠뜨린 것은 ‘인혁당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이었다. 석방되고 채 두 달이 안 된 1975년 4월 9일의 일이었다. 그날도 도서관 앞에서 후배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소식을 들은 그는 벌떡 일어나 소리쳐 맹세했다. “내 한 몸 다 바쳐 이놈의 독재정권, 학살정권과 맞서 싸우겠다!”

 

  • 1975.4.9. 인혁당 관련 인사 사형집행. 독재타도 결의
  • 1975.4. 재야운동과 연대하여 청년운동의 기초를 다짐.

 

76년 1월 1일 두암동에 윤강옥이라는 회원이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두암동에서 송년회를 하고 새벽에 걸어서 무등산을 갔어요. 입석대까지 올라가가지고. 해맞이 하고 악을 쓰는 거지, 이제. 새해 첫날 새벽에 악을 악을 썼어요. 그렇게라도 울분을 토하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그랬었는데 이 76년 새해 첫 아침에 무등산에 올라간 것이 그 뒤로 계속 된 거예요.

 

  • 1976.1.1. 신년 맞이 무등산 등반대회
  • 1976.9.17. 부활절 예배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교도소 복역
  • 1977.12.9. 대구교도소 만기 출소

 

그래 단식농성이 딱 들어가 버리니까 농민들이 또 일하니까 밥은 이만큼씩많이 먹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제 예비단식 과정도 없이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하니까, 침구도 없지. 세면도구도 없지. 소금도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 다음에 이제 거기에다 누웠다 해서 일이 해결되는 거 아니거든? 이제 증폭을 시켜야 하는데 단식효과를 정치적으로 높이려면. 그러면 밖에서의 흔히 말하는 재야나 청년 학생들 쪽에서 호응을 해줘야 하는데 인제 그 일을 갑자기 내가 맡게 된 거에요.

 

  • 1978.4. 함평 고구마사건 단식투쟁 지원
  • 1978.7. 들불야학 설립 후원
  • 1978.11. 전국 농민 쌀생산자 대회. 800명 농민 숙식 지원.

 

“경자야, 쌀생산자 대회에서 활약한 여성들을 조직해 양심수들의 옥바라지를 하는 단체를 하나 만들면 어떻겠냐? 지금 광주교도소에 서울대생 김병곤 등 수십 명의 양심수들이 수감되어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있잖냐. 우리가 가끔 책이며 돈을 모아서 영치해주고 있지만 한계가 있응께, 여성들과 같이 해보면 어떨까? 이 거 아주 중요한 일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는데 아무도 돌봐주지 않으면 앞으로 누가 운동을 열심히 하겠어?”

 

  • 1978.12. 송백회 결성
  • 1979.6.4. 현대문화연구소 설립 초대 소장 취임
  • 1979.9. 송백회 기금 마련을 위한 미술전시회 YWCA에서 개최

 

그러면서 부산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이야기도 듣고 그리고 부산에 좀 알고 있던 친구들 이야기도 좀 듣고. 그래서 거기서 확연히 깨달은 게, 내가 그 동안에 민중이 어떻게 뭐가 어떻고 떠들었는데 나는 완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민중에 빠져 있었다. 역사 속에 항쟁의 주역이었던 농민들. 이를테면 이제 갑오농민운동이라든지 의병항쟁이라든지 이런 차원에서만 이해했지 구체적인 우리 생활 주변에 하루하루를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시는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가 민중이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다.

 

  • 1979.10.15~23. 광주 서부경찰서 불법 연행 숙직실에서 물고문
  • 1979.12.9. 긴급조치 9호 해제 후 석방

 

서부경찰서로 연행된 윤한봉은 수사과나 정보과가 아닌 유치장 옆의 숙직실로 끌려갔다. 이미 물고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높고 튼튼한 의자 두 개를 사람 키 정도로 떨어뜨려 세워놓고 팔목 굵기의 튼튼한 몽둥이를 걸쳐 놓았는데 지저분하게 젖은 수건이 널어져 있었다. 몽둥이질과 욕설이 시작되었다. 비썩 말라 뼈와 가죽밖에 없는 몸에 무참히 몽둥이찜질을 한 그들은 강제로 그의 옷을 벗기고 두 다리를 뻗고 앉게 했다.

 

  • 1980.1. 극단 ‘광대’의 문화운동 창립 지원.
  • 1980.3. 극단 ‘광대’에서 돼지풀이 마당극 기획
  • 1980.5.27. 5.18민중항쟁 관련 핵심 주동 인물, 내란음모죄로 현상 수배
  • 1980.6. 전국 지명수배. 81년 4월까지 도피 생활

 

망명생활이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모르지만 그 세월을 하루같이 광주의 원혼들을 생각하면서 전라도 촌놈 ‘합수’로 변함없이 살아가자고 다짐했다.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자, 절대로 그분들을 배신하지 말자, 몸은 비록 이역만리에 있지만 마음만은 항시 그들 곁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자고 결심했다. 절대로 그들의 원망과 지탄받을 생활은 하지 말자고, 절대로 편안한 생활을 하지 말자고, 조국에 돌아갈 때는 떳떳하게 갈 수 있도록, 살아남은 죄와 도망친 죄를 깨끗이 씻고 갈 수 있도록 성실하고 철저하게 운동을 하자고 결심했다. ‘항시 조국운동, 광주운동의 존엄을 지키자. 절대로 훼손하거나 더럽히지 말자.’

 

  • 1981~1993(미국 망명 생활)
  • 1981.4.29. 밀항선 표범호 승선(4.29-6.3일까지 35일)
  • 1981.6.3. 미국 시애틀도착 시애틀 동양식품점에서 가명 김일민으로 일함.
  • 1981.6.12 미국정치망명 신청 미행정부에 의해 망명이 계속 보류됨.
  • 1981.10.10 노동허가서 취득 후 김상돈 선생 자택에서 거주
  • 1982.6 “광주수난자돕기회”결성 (88년 6월까지 총 3만 불 송금)

 

한참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다니던 1982년 10월,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후배 박관현이 감방에서 군부독재에 항의하는 단식 중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들불야학 강학의 한 명이던 박관현은 윤한봉의 권유로 1980년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던 아끼던 후배였다. 항쟁이 시작되기 사흘 전의 비상모임에서 다가올 군부의 대대적인 탄압에 맞서 각오를 단단히 하자고 격려해 보낸 게 마지막 만남이었는데 죽음의 소식이 미국까지 전해온 것이다. 울분과 자책감을 견디지 못한 윤한봉은 박관현의 죽음에 항의하는 단식농성을 하기로 했다. 절친해진 홍기완이 동조해주었다.

 

  • 1982.10 박관현열사 목사, 10일간 단식농성진행 -LA
  • 1982.12 해외운동 10년 계획수립
  • 1983.2.5 로스엔젤레스에 ‘민족학교 설립.

 

“세상 돌아가는 데 맞춰 살려고 남의 눈치나 보고 운동을 통해 어떻게 자기를 내세워 볼까 하는 뺀들바우는 필요 없어요. 우리에게는 곰바우, 돌쇠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어떤 역경도 묵묵히 이겨내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진솔하고 우직한 사람이 필요해요.”

 

1984.1.1 재미한청련 결성-미주 최초의 청년운동체 LA, 샌프란시스코(산호세), 시애틀 시카고, 덴버, 달라스 뉴잉글랜드,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DC등 10개 지역에서 ‘한청련 지부를 결성. 각 지역 마당집 설립 LA의 ‘민족학교, 산호세의 민족교육봉사원 뉴욕의 ‘청년학교, 필라델피아의 청년마당집 시카고의 한인교육문화마당집 토론토의 교육문화원 워싱턴 DC의 ‘코리아 홍보교육원.

 

  • 1986.5. 광주민중의 날 선포 버클리시의 시장이 지정하여 선포함
  • 1986. 한겨레 미주홍보원 결성

 

하룻밤 만에 사람을 뒤바꿔 놓는다고 해서 회원들 사이에 ‘장풍을 쐬다’라고 말해지던 윤한봉의 설득력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결성 2년 반이 지난 1986년 8월까지 시애틀, 시카고,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디씨 등에 한청련 지부와 마당집을 만들 수 있었다. 회원의 기준이 엄격해 정회원과 예비회원으로 구별했는데 합치면 3백 명에 이르렀다. 다만 뉴잉글랜드, 달라스, 덴버는 지부를 만들었다가 조직 관리가 어려워 해체 시켰다.

 

  • 1987.4.17. 정치망명허가 한국인 최초로 미국정부로부터 정치망명허가 받음
  • 1987.8. 한겨레운동재미동포연합 결성
  • 1988.5. 망명자 여행증명서 취득

 

풍물패를 앞세운 한청련의 시위 문화도 압도적이었다. 한청련 회원들이 흰 고무신과 흰 농민복에 흰 머리띠를 두르고 북과 꽹가리를 치며 달려 나가면 연합시위에 참가한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무렇게나 입고 피켓과 플래카드만 들고 걷던 이들은 자연히 풍물패에게 길을 내주었고, 요란한 풍물소리는 주변의 잡소리를 압도해 버렸다. 나중에는 모든 시위 때마다 한청련 풍물패가 맨 앞에 서게 되었고, 여러 민족의 독자적인 집회에 초청까지 받았다.

 

  • 1988.5. 한청년 ‘한겨레 핵무기 철거요청 10만명 서명운동
  • 1988.8. ‘8월 대회 도중에 유엔 앞 함마슐트 광장에서 시위

 

홍보원에서는 코리아 리포트라는 간행물을 만들었어요. 그 당시에는 인터넷 전이니까 한반도에 대한 뉴스가 없었거든요. 우리도 우리 소리를 내겠다. 우리의 민주화 투쟁, 통일운동, 노동운동 여러 가지 운동을 알려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기관지가 필요하다 그래가지고 영문 잡지를 만든 거예요. 꾸준히 7년 동안 만들었어요. 만들고 홍보하고 배부하고. 의회나 연구소 뭐 학교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있는 여러 분들한테 보내고.

 

  • 1988. Korea Report 영문 기관지 발행보급
  • 1988. 조국의 민주화투쟁에 대한 지원과 연대
  • 1989.7.27. Korea의 미국핵무기 철거요청 서명용지 11만매 미 하원 전달

 

다음 날인 21일 백두산 정상을 출발한 행진에는 외국인 85명과 해외동포 113명, 이북 동포 70여 명이 참가했다. 삼지연에서 군중대회를 가진 행진단은 사리원, 신천, 개성을 거쳐 7월 27일 판문점에 도착했는데 이북 주민들의 환영은 상상 이상이었다. 한청련 사물패를 앞세운 행진단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수많은 주민들이 늘어서서 손을 흔들며 조국통일을 울부짖었다. 말 그대로 눈물의 바다였다.

 

  • 1989.7.20.~27. 국제평화대행진
  • 1989~1996. 국내 해외연대 5.18행사

 

1993년 5월 19일 아침이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윤한봉은 애써 눈물을 감추며 공항으로 출발했다. 치과의사 최진환 박사와 한청련 부회장 강완모가 광주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공항까지 나온 배웅 나온 회원들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윤한봉도 눈물이 솟구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만 12년 세월이었다. 34살의 젊은이로 왔다가 46살 중년이 되어 돌아가는 길이었다. 미국에 두고 가는 한청련과 한겨레 회원들에 대한 그리움이 벌써부터 가슴에 구멍을 뚫었다. 좌석에 앉은 윤한봉은 비행기가 이륙하고도 두 시간이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마음을 그는 이렇게 글로 남긴다. “추억 속에 명멸하는 수많은 얼굴들이 비행기가 이룩한 후 두 시간 동안이나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 1993.5.19 일시귀국
  • 1993.8, 18 영구귀국(46세) 수배해제
  • 1993.8.18~2007.6.27 (46~58세) 5.18기념재단’과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하였고, 김남주 기념사업 ‘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국민연대’를 추진하였으며 (사)들불열사기념사업회 설립을 주도하면서 광주 오월정신을 실천하였다.

 

‘귀국 후 나는 변화된 조국 사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엄청나게 돈이 많은 사회, 그러나 정신도 혼도 원칙도 질서도 없고 꿈과 감동도 없는 사회, 악독하고 살벌한 사회, 허세와 과시와 쾌락이 넘치는 사회… 사람의 생명은 별것이 아닌 사회가 되어 버렸다.’

 

  • 1994. 8. 5.18 기념재단 창립주도
  • 1995.3. 민족미래연구소 설립
  • 1995.4.23 신경희님과 결혼
  • 1995 5.18. 5.18특별법제정과 학살자처벌 서명운동 전개
  • 1996.5. 시인 김남주기념사업준비
  • 1996.10 정치망명기 <운동화와 똥가방> 출간

 

석방된 김남주는 오랫동안 옥바라지를 해온 박광숙과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결혼식 전날 윤경자의 집에 찾아왔을 때도 얼마나 초라한지 목욕부터 시키고 속옷을 내주어야 했을 정도로 자기 일에는 신경을 안 쓰고 사는, 윤한봉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친구였음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누구보다 존중했다. 1993년 일시 귀국한 윤한봉이 자기 집에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내 박광숙이 물었다.
“윤한봉이란 분이 어떤 분이지요?”
김남주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순결한 사람이야. 자기 자신에 아주 철저한 사람이고.”

 

  • 2000.5.20. 시인 김남주 시비건립
  • 2000.7. 「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
  • 2001.6.28. 들불열사기념사업회결성

 

“특히 시민사회 운동 쪽에서 대동정신을 등한시해요. 삶의 문제, 빈곤의 문제, 실업자 문제, 비정규직 문제, 차상위층이라든지 하는 문제들을 등한시해요. 정치계, 언론계, 사회계 이런 부분에 주로 초점을 맞춘 시민사회단체가 많아요. 대동정신 부분은 진보정당의 몫으로 그리고 민노총이라든가 전노협으로 명확하게 갈라져 있었는데 … 우리가 지구상에서 아무리 경기가 어렵다 해도 세계 15위 안에 듭니다. 엄청난 부자입니다. 그런데 이 안에서 엄청나게 갈라지기 시작하는 거죠. 비정규직 비율이 호주하고 스페인하고 우리나라 세 나라 중에서 우리나라가 제일 높습니다. 이 황당한 상황에서 시민 사회 단체들이 앞으로 대동정신을 많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 2004.5. 제1기 5.18 이카데미 518광주민중항쟁의 정신 특강
  • 2004.6.29. 5.18기념재단 주최, 518아카데미’교장 취임
    (사)들불멸사기념사업회 창립, 초대 이사장 역임

 

삶은 신산했는데 죽음의 순간은 가벼워 보이는 사람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김남주가, 박효선과 김영철이 그랬다. 그리고 윤한봉이 그랬다. 모포 밖으로 삐죽이 나온 윤한봉의 손은 근육도 없이 오직 뼈만 남아있었다. 홍희담은 그 모습에서 군살이 다 빠지고 갈비뼈가 앙상히 드러난 체게바라의 마지막 사진을 떠올린다. 그녀는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걸은 적이 있었기에 이 행성은 아름답다.”

 

  • 2005.12. 민족미래연구소 문을 닫음. 이후 무안과 목포의 자택에서 요양
  • 2007.6.27. 폐기종 투병중 폐 이식 수술 후 영면
  • 2007.6.30. 국립5.18 제6 묘역안장 (묘지번호 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