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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8-백두에서2019-01-0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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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마침내 7월 21일, 백두산 정상에서 출발한 국제평화대행진단 수십 명은 한청련의 사물패를 앞세우고 판문점을 향해 7일간의 행진을 시작했다. 이때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행진에 참여한 시애틀의 이종록은 그날의 감격을 이렇게 회고한다. 


1989년 7월 1일 부터 7월 8일 까지 평양에서는 제 13차 세계 청년 학생 축전이 열렸습니다. 북한에서는 이 대회의 성공을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면서, 세계 각국의 청년 학생들을 대거 초청했습니다. 북한의 축전 계획을 들은 윤한봉은 실로 기상천외한 구상을 하게 됩니다. 전대협 대표를 앞장세워 세계 여러 나라의 청년 대표와 함께 백두산에서 부터 판문점까지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세계 만방에 외치는 평화 대행진을 구상한 겁니다.


이 무모하고 어처구니없는 구상이 현실로 이루어지기까지 윤한봉은 그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그 혼자서 비밀리에 실행했다. 행진단장 정민, 부단장 정기열도 나중에 임무를 받고 나서야 비로서 알았다.

윤한봉은 전체 대외적인 행진단장에 정기열, 부단장에 정민, 그러나 행진을 주도하는 핵심인 한청년 행진단장에는 정민, 부단장에는 정기열을 지명하고 그 자신이 마치 현장에 있는 듯, 혀를 내두를 만큼 세세한 지침을 주었다. 그는 백두산에서부터 판문점에 이르는 전체 노정에 대해 구체적 지침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한청련 회원들에게는 아주 엄격한 행동지침을 지시했다. 정민 단장을 통해 내린 그의 지침은 비록 문서화 된 건 아니지만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행진의 주체는 한청년이다. 주인의식을 잊지 말도록,

- 이번 대행진은 조국통일을 위해 노둣돌 놓는 자세로 임해야 함.

- 이북 인민들 앞에서 자본주의 냄새를 풍겨서는 안 됨.

- 이북 인민들 앞에서 존경하는 마음과 겸허함을 잃지 말 것.

- 행진 대열에서이탈하여 어떠한 개인행동도 해서는 안 됨.

- 행진 도중 행사 기록을 위해 지명된 비디오 촬영사 외의 개인 촬영은 금함.

- 한청련은 행진단 맨 뒤에 위치해야 하며, 선두에 나가서는 안 됨.

- 언론매체와의 공식적인 접촉은 단장을 통해야 함.

- 임수경과의 불필요한 접근은 금함.


청년학생축전이 끝나고 정기열은 부지런히 외국인 형제들의 숙소를 찾아다니며 행진단 참가자를 모집했는데, 7월 20일 발대식에는 30여 개국에서 약 400명이 참가했다. 

행진에는 30개국의 외국인 85명이 참석했다. 해외동포는 113명, 북한 동포는 70명, 그리고 임수경과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방북한 문규현 신부까지 총 270여 명이었다.

삼지연에서 군중대회를 가진 행진단은 사리원, 신천, 개성을 거쳐 7월 27일 판문점에 도착했는데 이북 주민들의 환영은 상상 이상이었다. 한청련의 사물패를 앞세운 행진단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수많은 주민들이 늘어서서 손을 흔들며 조국통일을 울부짖었다. 말 그대로 눈물의 바다였다.

북쪽 주민들의 순수한 염원은 행진단원들을 감격에 빠뜨렸다. 장마철이라 빗줄기가 오락가락 하는 습한 무더위 속에서도 한청련 회원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함께 눈물 흘리고 함께 민족통일을 외쳤다. 너무 울어서 나중에는 눈물샘이 말라버릴 지경이었다. 행진단의 일원이던 뉴욕 한청련 회원 김갑송의 회고다.


이건 한국전쟁 이후에 최대의 사변이다. 또 다른 사변이 일어났다. 거기도 인제 그 남한의 땡전 뉴스처럼 뉴스 시간이 ‘땡’ 하면 김일성 주석께서 어쩌고 이렇게 항상 그러는데 그걸 싹 지워버리고 ‘땡’ 하는 순간 오늘 행진은 어쩌고 이런 거지요. 거기에 주민들의 생활을 얼마나 숨기려고 하는데 행진대열이 지나가게 되니 이게 얼마나 이 행진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한국전쟁 이후의 최대사변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나중에는 눈물이 말라가지고, 눈물샘이 말라가지고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요. 하여간에 모두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눈물바다를 이뤘는데 눈물샘이 말라가지고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요 끝날 때쯤은.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의 평화대행진은 당사자들뿐 아니라 북한 주민들에게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남한의 뉴스가 매일 전두환의 동정으로 시작되듯이 북한 뉴스도 매일 김일성 주석이란 말로 시작되는데 행진기간 동안은 김일성 소식이 뒤로 밀렸을 정도였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 임수경이등장하는 것이 큰 화제가 되었다. 북한 관리들이 전쟁 이후의 최대사변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7월 20일부터 28일까지 한청련의 주도로 이뤄진 ‘국제평화대행진’은 가히 윤한봉의 재미 활동의 최고 절정이라 할 수 있었다. 분단 45년 만에, 북쪽 정부나 남쪽 정부 어느 쪽의 지시나 지원도 받지 않고 순수한 민간 차원에서 자비로 통일행사를 치룬, 사실상 최초이자 마지막 행사였다.

 

한편 윤한봉은 자신의 ‘평화촌 구상’을 평양에 전했으나 안타깝게도 반응이 없었다. 윤한봉은 군사긴장이 높은 조국에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평화와 군축이 이루어지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평화 운동가들과 의식 있는 해외동포 청년들이 뜻을 모아 비무장지대에 평화촌을 건설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평화운동을 평화공존의 새로운 문명체계를 인류에게 제시해 줄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평화운동가들 중심의 ‘연구촌’ ‘평화운동가들의 성지’,

모든 인종, 민족, 종교, 문화, 언어, 사상, 철학이 한 곳에 모여 연구하고 생활하는 ‘소지구촌’을 만들어가자는 구상을 전했다. 윤한봉의 국제평화촌 건설 구상에 대해 평양은 안타깝게도 무반응이었다.


그렇다. 국제평화촌은 윤한봉 특유의 낭만적 구상이라 하자. 하지만 국제평화촌과 함께 평양에 제시한 합동위령제는 남과 북의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천에 옮겨야 하는 제안이었다. 윤한봉은 정민 단장에게 지시했다. “6‧25 때 돌아가신 남북 동포들과 미국, 영국, 중국 등의 군인들의 합동위령제를 지낼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남측 대표 한 분과 북측 대표 한 분, 그리고 참전한 16개국의 대표 16명 도합 18명의 대표들이 함께 분향, 재배, 묵념을 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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