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천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임용천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4일 ○ 구술장소 : 미국 뉴욕 민권센터 사무실 임용천은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모님들은 전부 북에서 넘어오셨다. 가회동의 제동국민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에 경복국민학교에 다녔다. 아버님은 민중서관에서 일했다. 경성 중학교를 다녔고, 동성고등학교를 다녔다. 78년도에 군에 입대를 하였고, 7사단 8연대에서 근무를 했어요. 철책에서 근무를 했다 . 면담자 : 선생님 84년에 이민 형식을 빌러서 왔다고 했는데 미국 가야겠다고 생각하신 게 오래전부터였나요, 구술자 : 우리
누나가 우리 어머니를 먼저 신청을 해서 어머니가 미국에 입국을 갔고, 그 다음에 어머니가 절 초청해서 간 게 2년 정도 걸렸을
거예요. 그래서 84년쯤 제가 미국으로 갈 수 있었죠. 저는 처음에 와 누나랑 같이 살았어요. 누나가 미국분이랑 결혼해서
살았어요. 저는 그 집에서 같이 살게 됐죠. 누나가 ‘따른 거 하지 말고 공부를 해라.’고 했어요. 누나말 잘 들어야 되니까 대학을 좀 열심히 다녔고 오랜만에 대학을 일이년 다녔죠. 면담자 : 처음 들어오신 곳이 어디신가요. 구술자 : 여기, 필라델피아이죠. 대학이 컬리지인데 덜라웨어 커뮤니티 컬리지(Delaware Community College)요. 영어도 좀 배워야 되고 그러니까. 거기서 쉬운 과목을 찾아서 다녔어요. 학교에 갔더니 학교에 5, 6명 정도 한인들이 있었어요. 걔네들 만나니까 좀 반갑더라고 일단은 말도 통하고. 그래가지고 걔네들이랑 학교에서 만나서 이야기하고 주말에 만나면 걔네들이랑 어울리고 그랬죠. 면담자 : 필라델피아에서 선생님께서 한청련 활동을 하신 게 몇 년 부터인가요? 구술자 : 84년 12월 달에 한청련이 필라델피아에 결성돼었어요. 그때 제가 거기 참석했어요. 장광선 형님을 만나게 됐어요. 장광선 형님은 참 존경스러운 분이었어요. 장광선 형님 동생이 그 학교엘 같이 다녔어요. 자기 형을 만나봐라, 그렇게 이야기를 해서. 만나봤는데 광선 형님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더라고. 이 사회의 부조리한 거나 뭐, 북에 대해서도 좀 얘기 하고. 어떤 분이 LA에서 오시는데 한번 만나보라고 해서 만난 분이 윤한봉 형님이었어요. 초창기에 윤한봉 형님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장풍을 날릴 때였죠. 눈이 초롱초롱, 말이 카랑카랑 하셨어요. 면담자 : 그때 만나신 게 언제인지 기억하시나요? 구술자 : 제가
6월 달에 왔는데 10월 달에 그 분들 만나게 됐어요. 한청련을 결성하는 날 나보고 오라고 그랬어요. 그날 한청련을 결성할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내가 그날 딱 받은 느낌은, 내가 이 그룹에 들어와야지 내가 더 많은 걸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면담자 : 윤한봉 선생님이 필라델피아에 오셨을 때 만나셨는데, 선생님께서 주로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요? 구술자 : 그러니까 근현대사를
쭉 이야기하면서 어...내가 배운 역사가 잘못됐고 이 사회구조가 잘못됐다는 것이었어요. 한봉이 형님은 5·18이야기도
하였지요. 필라에서 한청련이 조직되기 전에 뉴욕 한청련과 뉴잉글랜드 한청련이 있었거든요. 뉴잉글랜드 한청련까지 해가지고 40명
정도가 다 모여가지고 2박 3일 같이 모여서 학습도 하고 노래도 부고 여러 가지 했어요. 당시 한청련들의 구성원들은 국내에서
운동하던 유학파와 현지에서 자생적으로 한국 문제를 고민하던 모임, 이렇게 두 부류가 있었어요. 필라델피아 한청련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 주 만나서 학습을 했어요. 정말 꾸준한 학습을 했죠. 그런데 필라델피아는 동포 사회가 적고. 동포 활동이 다른 지역보다 떨어졌지요. 하지만 우수한 인재는 많았어요. 홍정화라든지 정윤희라든지 전부 필라 출신이거든요. 면담자 : 창립은 언제 했나요? 구술자 : 2월 달에 했을 거예요 면담자 : 창립을 할 때 타 지역 한청련에서도 같이 모였나요? 구술자 : 뉴욕에는 한 두 명 왔어요. 그때 30명, 40명 만났을 거요. 그 날이 1984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만났을 거예요. 그래서 2박 3일인가.... 경재형님 하고 광선이 형님, 동생이 세분 있었어요. 장경단, 장맹단, 장광민. 시카고에서 만났던 그 장광민. 면담자 : 주로 어떤 활동을 중심으로 했나요? 구술자
: 그 당시에 다른 지역에 비해서 숫자라든지 활동에 있어서 미약했어요. 우리는 솔직히 몇 년 동안 역사 학습, 철학 학습을
하면서 지냈어요. 범서 형님이 자기 가게 2층을 빌려줘서 썼고 나중에는 광선이 형님이 자기 사는 집을 저희에게 내주셔가지구 썼고
그러다가 나중에 우리가 필라델피아 동포 사회에다가 마당집을 구했죠. 우리끼리 만나서 학습을 하고 국내에서 어떤 분이 오시면 행사 열고 그런 거 외에는 특별히 할 게 없어요. 활동을 싶은 사람은 떠났어요. 큰 지역으로 떠나는 거죠. 정화는 필라에서 한청련 회원이 됐는데 워낙 능력이 있으니까 바로 워싱턴 DC로 갔죠. 승진이 같은 뉴욕에 가서 활동을 하게 됐고. 광민이도 시카고에 갔고. 그래서 마당집을 했다가, 활동을 정리하게 된 거죠. 면담자 : 초창기에 주로 어떤 활동을 하였나요? 구술자 : 그때 뭐 여러 가지 기금 활동을 우리가 했었죠, 그 당시에는 국내의 옥중에 있는 사람들한테 돈도 보내고 무슨 통일 자금도 걷어서 보내고, 뭐 북한에 쌀 보내기 같은 것도 우리가 하고. 국내에서 활동가들이 오시면 뭐 황석영씨나 그 당시에 임진택씨, 고은씨. 백기완 선생님이 오시면 동포 상대로 우리가 강연장 같은 걸 만들었지요. 면담자 : 알겠습니다. 그러면 쫌 활동 중심으로 다시 쫌 여쭤보겠는데요. 해년마다 5·18과 관련해서 필라델피아 안에서 활동하셨던 내용들이 좀 있으신가요? 구술자 : 예. 우리는 5·18 기념식이 우리 필라 한청련 같은 경우는 굉장히 큰 행사 중에 하나였어요. 항상 비디오를 틀어서... 면담자 : 그 비디오는... 구술자 : 그 당시 우리가 튼 비디오는 캐나다 맥길(McGill University) 대학에서 나온 비디오를 주로 틀었어요. 5·18 행사에 와서 그 비디오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면담자 : 몇 분 정도 참석을 하셨나요, 구술자 : 그렇게 많이 오지는 않았어요. 3, 40명 오셨나. 근데 황석영 선생님이 오셨을 때는 100여명 왔나? 면담자 : 그런 행사를 주최하는데 있어서 동포사회에 대한 반응은 어땤ㅅ어요? 구술자 : 우리나라 사람은 무슨 그런 활동만 하면 다 빨갱이 취급했죠. 빨갱이 타령은 뭐 그 당시에는 더 심했죠. 쟤네들 사무실에 가면 김일성 사진 있다는 둥 하여간에 별, 별별 이야기를 많이 했죠. 면담자 : 그런 활동들 때문에 당시 군사 독재 시절에 반국가단체로 인제 낙인이 찍히기도 하지 않습니까? 구술자 : 그렇죠, 면담자 : 필라델피아 한청련이 다른 뭐 LA나 뉴욕에 비해서 늦게 결성이 좀 된 편인가요? 구술자 : LA가 일 년 먼저 결성됐 뉴욕이 육 개월인가 먼저, 83년도에 생겼고. 그 다음에 시카고가 생겼었고 그 다음에 뉴잉글랜드라고, 뉴잉글랜드는 동포사회가 없는데 유학생 그룹들이 많았어요. 현지에 있는 학습모임이랑 연결되서 뉴 잉글랜드가 네 번째로 생겼을 거야. 필라델피아가 다섯 번째. 그리고 시애틀 생겼고 그 다음에 달라스, 덴버, 그 중간에 워싱턴 DC 해서 열갠가 아홉 개 지역에 생겼죠, 면담자 : 일 년에 한 번씩 뭐 정기 모임 같은 게 있었나요? 구술자 : 그때는
육 개월에 한 번씩 대표자 회의가 열렸어요. 각 지역에 두 명의 대표자들끼리 만나서, 2박 3일 동안 회의를 하고.. 우리가
8월 달에 대회를 했거든요, 그래서 8월 대회라고 했는데, 8월에 봅시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전화로 하면서 ‘8월에
봅시다,’ 이렇게 인사를 했어요. 새로운 젊은 사람들이 만나서 8월에 끝나면 한두 쌍씩 생기고, 면담자 : 그렇게 몇 분 정도가 모였나요? 구술자 : 다 모이면 한 백 명 정도? 한청련 말고 한겨레분들이랑 다 같이 만나서 했으니까. 면담자 : 한겨레 말씀을 해주셨는데 한청련의 가입 기준이 있었죠? 나이 제한이 어떻게 되어 있었나요? 구술자 : 그 당시 한청련은 17세 이상부터 마흔 살까지. 그 다음에 한겨레는 나이 제한이 없었어요. 한청련 활동이 부담되는 사람들은 직접 한겨레로 활동을 하고. 광선이 형님 동생 광민이가 그때 열일곱 살이라.. 면담자 :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몇 살 때 들어가신 건가요? 구술자 : 27살 때 들어간 것 같애요. 면담자 :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했는데 어느 순간에 없어졌다고 얘기를 해야되나요? 구술자 : 우리가 자체적으로 한청련을 해산했죠. 면담자 : 그 과정에 대해서 좀 말씀을 해주실 수 있나요? 구술자 : 달라스나 덴버 같은 경우는 동포사회가 적을 뿐더러 좀 떨어져 있어요. 뉴욕, 필라, 워싱턴 DC, 동부 지역은 운전해서 다 갈 수 있는 데에요. 여기는 정말 외롭지가 않아. 서로 교제하고. 달라스는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덴버도 5명이 넘으면 회원 조직을 할 수 있었거든요. 다섯명, 여섯명이 단체를 만들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거 빼고는.... 없으니까. 필라의 경우만 그런 것도 아니구 타 지역도 재생산이 안 되기 시작했어요. 조직이 계속 유지되려면 재생산이 되어 움직여야 되는데... 그 당시 구호가 ‘한 손엔 조국의 민주화, 한손엔 동포 사회’였는데. 동포 사회의 일은 많으나 조국의 민주화는 점차 줄어들었지요. 마당집 활동은 늘어났으나, 한청련 활동 자체가 적어지기 시작을 했어요. 한청련이 각 지역 마당집의 지도부로 활동을 하고 있지만, 한청련 활동이 팍 줄어들면서 이 조직을 계속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 고민을 하였고, 해체하는 게 좋다. 그냥 유명무실하게 있는 거는 좋지 않다, 그래서 같이 만나서 해체를 다짐을 했죠. 면담자 : 그때가 언제였나요? 2000년대 초반? 구술자 : 그 정도가 된 것 같애요. 면담자 : 그럼 한겨레 동포연합은 어떻게 된건가요? 구술자 : 한겨레는 초창기부터 후원자 조직이었기 때문에 조직의 규율이 낮았어요. 면담자 : 필라델피아에서 매년 5월이 되면 5월 진상규명 운동을 하셨다지요? 구술자
: 기념식 할 때는 식전에 비디오 상영하고, 사진 같은 것도 걸어두기도 하고 강연자들을 초청해서 강연도 하고. 강연하고 가시기
섭섭한 사람들은 강연하시는 분이랑 남아서 서로 간에 좀 대화하고. 이왕 오신 김에 필라델피아 시내 한번 구경시키면 그날 저녁에
우리 또 회원끼리 따로 모여서 한국 소식 듣고. 면담자 : 필라델피아에서 한청련 활동을 하시다가 뉴욕으로 오신 건가요? 구술자 : 2000년 때 왔어요. 면담자 : 선생님께서 한청련 활동 이외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구술자 : 목수. 건축 일을 하고 있어요. 면담자 : 여행은 그럼 언제부터 하실 건가요? 구술자 : 여행을, 한번을 못 했죠, 면담자 : 그 꿈을 완전히 버리신 건 아니시죠? 구술자
: 아 버린 건 아닌데 기회 되면 하겠는데 나이도 들구 그래가지고. 어떻게 할지 몰라. 필라델피아에서 저를 대표위원으로
뽑아가지고 대표위원 회의를 하면서 회의를 하러 다니면서 각 지역을 많이 가봤죠. 덴버 같은 경우도 가보고 뭐. LA도 가보고. 각
지역의 마당집에서 책꽂이가 필요한다든지 그러면 내가 가서 만들어주고. LA에 기완이 형님이계신데 그분도 건축일 하시는 분인데 같이 가서 책꽂이만 만들어 놓고 제가 많이 담당해서 활동하는 것 중에 하나였죠. 면담자 : 한청련 해체...어떻게 좀 바라봤습니까? 구술자 : 정말 안타까웠죠. 토론과정에 저도 참석했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한청련이 절대적인 거였기 때문에 이거를 해체한다는 자체 말이 나왔을 때 굉장히 안타까워했었죠.
...6개월 안에 회원이 되기가 쉽지가 않았어요. 우리가 최소한 우리가 역사 학습이랑 철학 학습은 다 거치고, 우리나라의
역사관이 바로 되고. 예비학습 하고, 그 다음에 예비회원이라는 제도가 또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정말 같이 활동을 할 수
있나, 이렇게 같이 활동을 해보고 나서 우리가 회원을 만들었는데. ....정말 이제. 그러면서 재생산이 안 돼. 면담자 : 결혼은 언제 하신 겁니까? 구술자 : 작년에 했어요. 저 결혼 안하고 쭉 살았어요. 면담자 : 그때 처음 활동을 같이 하셨던 분들이 가장 기억이 많이 남는다라고 하셨는데 특별히 선생님께 어떤 영향을 준 회원이 있었나요? 구술자 : 어, 그렇죠. 권민지라는 친구가 조직부장을 했었거든요. 지금은 한국에 있지요. 그리고 장광선 형님. 그리고 동생 광민이... 장광민이는 저보다 열 살이 어리지만 정말로 열심히 활동 했죠. 면담자 : ‘아 이것은 내가 정말 잘 한 것 같애’ 혹은 ‘아 이것은 아쉽다.’라고 느끼는 부분을 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구술자 : 나는 필라에서 15년을 우리 누나랑 같이 살았는데, 아쉬운
점은 없는 데 초창기에 한청련 활동을 할 때는 그때 만난 사람들이 내가 죽을 때까지 보고 오랫동안 지내면서 살 거라는 생각을
했었요. 치열했죠, 다양한 이유로 지금 같이 있지 못하는 것이 나는 가장 아쉬워요. 솔직히 말해서 제 나이 또래가 다 나가고
없어져버렸으니까 좀 외로워요. 면담자 : 지금 연락이 안 되시나요? 구술자 : 한국으로 간 사람들이 꽤 되고. 이런 저런 거로 나간 사람들이 좀 있고. 홍정아랄지 정성호 형님 같은 경우는 능력이 개발돼서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정말로 열심히 하고 있고. 지금 뉴욕에 한 열 명 정도 한청련에 했던 식구들이 있거든요.
한청련에 있던 한 친구가 페이스북 만들어가지고 우리 한번 모이자 그래가지고 모인 적이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저는 참석을 못했는데. 몇 사람만 모여서. 뭐, 옛날에 좋은 일, 안 좋은 일, 뭐 다 지났지만 또 한번 관계를 또 해서 한번
보자 그런 모임도 또 한두 개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면담자 : 현재 선생님께서는 이곳 민권 센터의 이사를 맡고 계신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근데 이사 분들은 그 민권 센터의 이사분들이 주로 하시는 일이라는 게 어떤 사업에 대한 결정권, 예산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계신 건가요? 구술자 : 이게
비영리단체거든요, 사무총장, 이그제큐티스 디렉터(Executive Director) 위주로 움직여요, 사무총장이 파워가 세요.
왜냐면 그 사람이 직접 일을 하기 때문에. 이사들은 다 나름 개인적인 자기의 생활을 하고 있고 우리가 일 년에 이사회를 네 번
하는데, 3개월 정도의 일을 우리가 보고받고. 우리가 낼 수 있는 아이디어라든지, 아니면 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라든지, 사업
활동에 참석한다든지 그 정도 선에서 움직이는 거지. 지금 직접적으로 같이 하는 것은 쉽지는 않죠, 다들. 면담자 : 현재 민권센터에서 가장 크게 활동하고 있는 가장 중심적인 활동 내용은 뭐가 있을까요? 구술자 : 이민자들의 권익이 제일 크죠. 면담자 : 그게 꼭 한인 뿐만은 아닌 거죠, 전체... 구술자 : 그렇죠, 그렇죠, 한인 뿐은 아니죠. 한인만 하는 게 아니고 전체적으로... 그러고 이런 단체들이 굉장히 많아요. 중국계, 일본계, 콜럼비아 남미계. 단체에서 연락을 해가지고 우리가 정책상으로 이민자들을 위한 법들이 올바르게 만들 수 있도록 하죠. 저와 같은 경우는 총 이민자 연맹 사무총장을 십년 가까이 했으니까. 그런 이민자 활동을 할 수 있는 역량을 배출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 이민자 연맹 사무총장을 그 동안은 백인이 했어요, 미국 사람이. 그러니까 이민자 연맹 사무총장을 이민자가 한 거는 저가 처음이거든요. 그것도 여기에선 권력이에요. 면담자 : 어제 잠깐 뉴스를 보면서 쫌 봤는데, 오바마가 이민법? 그것을 단독으로라도 처리를 하겠다. 이야기를 했는데 구술자
: 지금 의회가 상하원을 다 뺏겨버렸고. 그 와중에 오바마가 시작한 의료 개혁이랑 이민법을 임기 안에 처리하려고 했는데. 미국은
이 의회정치가 쉽지가 않아,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한국도 정치권에 들어가는 것처럼 여기도 정치권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그래서 시의원에도 출마해요. 면담자 : 알겠습니다. 오랜 시간 선생님, 이야기를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마지막으로 미비하게 얘기했다면.... 말씀을 해주시고 끝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구술자 : 글쎄,
필라에서는 광선이 형 만나가지고... 광선이 형님을 만난 걸 나는 행운이라고 생각을 해요. 왜냐면 형님을 만나고 내가 세상을
알은 기분이었으니까, 정말로. 몰랐었으면 너무 억울했었을 거요. 내가 모르고 한평생 여행만 하고 그냥 유유자적하게 살았으면 전혀
몰랐었을 거요. 내가 이 사회 살면서, 변혁적인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살게 된 것, 잘 살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면담자 : 예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선생님 말씀 이렇게 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밤 늦은 시간에 일정을 이렇게 마치시고 일 끝내고 오셔가지고 지금까지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