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은
1965년 광주 임동 60번지에서 태어났다. 서림 초등학교를 다녔다. 아버님은 초등학교 6학년 올라갈 무렵 병환으로
타계하셨고, 어머님이 남은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김준은 진흥중학교와 대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 전남대
농생대를 들어갔다. 1988년엔 전대 농생대 학생회 회장을 맡았다. 서독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누나가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김준은
1990년 미국에 오게 됐다. 구술자:
이제 학교에 들어가니까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을 알아가잖아요.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자가 학살자라면,
그러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감옥이고 전선이다.” 그런 시가 있잖아요.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자가 학살자라면, 가슴이
뛰잖아요. 그 당시는 4.19가 되면 4.19 집회를 하고 데모하고, 5·18이 되면 5·18 집회하고 일주일 내내 데모를 하죠,
그 당시엔 전경들이 망월동을 막았어요 .산을 몇 개 넘고 비오면 비 맞고 그리고 망월동 가서 참배하고 그랬거든요. 면접자: 미국에 도착했던 날짜는 기억하시나요? 구술자: 90년 3월 달이요. 3월 24일입니다. 그때는 누님이 토렌스(Torrance)에 계셨어요. 매형 되는 분이 건설업자였죠, 저도 여기에 합류를 해서 오자마자 매형의 건축 일을 도와드리고 이민 생활을 했죠. 제일
불편한 점은 말이 안 통하잖아요. 그리고 여기 미국은 차가 있어야 돼요. 차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시간은 흘러가고
4월도 지나고 5월이 다가오니까, 마음이 이상해지죠. 5월 하면 뭔가 가슴이 뛰고. 이렇게 두근거리고. 내가 뭐하나, 내가 뭔가
해야 하는데....초창기에 많이 힘들었죠. 육체적으로 힘든 것 보다 국내에서처럼 활동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많이 힘들었었죠. 우연히 신문에서 5·18 행사를 한다는 광고를 봤어요. 누님한테 부탁해서 LA로 태워달라고 했죠. 그때 처음으로 90년 5·18을 여기서 맞이했죠. 내가
전남대학교에서 활동할 당시 선배가 그런 얘기를 했었요, “미국에 가면 존경할만한 운동가가 계시는데 윤한봉 선생님이시다, 전남대
농대 선배 중에 그런 분이 계신다”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미국에 이민온 후 그분에 대해서 알아봤어요. 그분을 소개하는
????길????지가 있었어요. 민족학교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미국 가면 여기를 찾아가봐야겠다 생각을 했었지요. 그날은
그냥 5·18 행사만 하고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시간이 지나니까 운전면허증이 나오고, 중고차지만 제가 운전할 수 있는 차도 하나
생기고 그래서 아마 7월경이 됐을 거예요, 제가 차를 직접 몰고 찾아왔죠. 민족학교를 찾아갔지요. 거기에서 제 소개를 하고 제게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그분들도 저를 반겨주셨어요. 이후 방문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윤한봉 선생님도 뵙게
되었어요. 그 당시 재미 한청련이 2년에 한 번씩 대회를 해요. 전국에 있는 조직들이 모여서 큰 행사를 해요. 그때 제 기억으로는
뉴욕에서 행사를 했었는데 저한테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해요. 90년도에.
그때 비행기 값만 내면 먹고 자는 비용은 필요 없었어요. 큰 돈 안 들이고. 며칠 같이 활동하는 것 볼 수 있어서, 너무너무
좋았어요. 몇 백 명이 모이는 자리였어요. 그렇게 큰 규모의 조직이 있구나. 전국 각지에서 모이는 한청련의 조직력을 보고 참
기뻤었어요. 이후 재미 한청련 과 관련을 맺고 재미 한청련 나성 회원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죠. 면접자: 주 활동내용이 어떤 거였나요? 구술자:
저는 문화 활동을 하고 싶다고 그랬어요. 뭐 여러 가지 분야들이 있잖아요, 교육도 있고, 조직도 있고, 학술 모임도 있고 봉사
모임도 있고 독서 모임도 있고 그러지만 저는 문화 쪽에서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 당시 재미 한청련에 문화분과
준비위원회가 있었어요. 거기에서 활동을 하였고, 92년 말에 문화패 한누리를 만들었어요. 그 전에 뉴욕에는 뉴욕 문화패 비나리라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LA 조직에도 문화패가 생긴 거죠. 안치환씨를 초대했죠. 안치환씨가 93년 1월에 왔어요. 문유성씨와
부인되시는 김희숙씨도 그때 잠깐 같이 활동을 했구요. 그리고 여기 윤희주씨(김준의 부인)도 잠깐 같이 활동을 했죠. 면접자: 한청련이 이 지역운동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나요? 구술자:
네. 그러니까 한청련의 주요 활동을 다룬 강령이 있지요. 강령은 우리 조국과 연대하는 거. 조국에 힘이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중시했어요. 다음에 크게는 세 가지죠. 하나는 동포사회의 권익을 대변하는 활동이구요. 다fms 하나는 제3세계, 타민족과의 연대
활동이죠. 그리고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도움을 드리는 거죠. 한청련도 그렇게 활동 했고 문화패 한누리도 그렇게 활동했어요.
영사관 앞에서 시위할 필요가 있을 때, ‘양심수를 석방하라’든가,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든가, ‘5·18 진상을 규명하라’든가
이런 사안들이 나왔을 때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했죠. 또 제3세계 운동권과 연대할 때가 있죠. 이라크 전쟁이 났을 때 전쟁반대
시위를 하고 또 피코 노동자가 이곳의 본사 앞에서 시위하면 같이 가서 시위를 하고 도와드렸죠. 무슨 문제가 생겨서 미국에 오면
저희가 통역이라든가 차량을 도와주었죠. 시위할 때 음향장치가 필요하면 저희가 참여하여 합주하고 그랬죠. 면접자: 당시 활동에 대해서 동포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구술자:
한마디로 민족학교는 빨갱이였죠. “민족학교 앞에는 김일성 사진이 있고 인공기가 붙여져 있다.”고 소문이 돌았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한청련 활동하는 사람들도 친북, 용공 세력이라고 말했어요. 민족학교가 동포 사회의 권익을 위해서 많이
활동을 하고 있지만 지금도 민족 학교다 그러면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많이 세월이 흘렀어도... 근데 그
당시에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제가
93년도부턴가 지신밟기를 했어요. 한국에서 지신밟기를 경험했기 때문에 여기 와서 우리 문화를 보급하는 차원에서 했는데,
쫓겨났어요. 미신 굿 한다고요. 지금은 그러신 분들은 거의 없어졌어요. 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그런 시각들이 동포 사회에
존재하고 있었죠. 면접자: 전쟁 반대, 핵 반대 활동을 해오셨는데 기억이 남는 부분이 있나요? 구술자:
89년도에 국제평화대행진이라고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가잖아요, 임수경씨도 그때 합류를 했어요. 2년에 한 번씩 국제평화대행진을
하겠다고 선언했지요. 91년도에 다시 추진했는데 국제평화대행진이 열리지 못했어요. “그래도 우리 조국의 분단 상황, 그리고
민주화의 상황을 전 세계의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알리자”고 해서. 해외 문화선전대를 만들어 활동을 해요. 한 팀은 호주 쪽으로
가고, 한 팀은 유럽 쪽으로 가고. 그게 91년도죠. 91년도 9월 달엔가 거기 제가 합류를 합니다. 7월 달에 뉴욕에 모였죠.
활동가들이 뉴욕에서 세 명인가, 그리고 엘에이에서 한명, 북가주에서 한명, 이렇게 해서 다섯 명이 팀을 이루었죠. 제 팀은, 유럽
팀이었는데, 유럽에서 세분이 더 합류하고. 한 달 정도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조국의 문제, 민주화 문제, 이런 다양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홍보하고 제3세계 사람들하고 연대하는 활동을 했어요. 최용탁씨가 정리한 글이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저는
아직 정리를 못했어요. 그리고 94년도에는 극단 토박이가 ????모란꽃????을 가지고 와요. 극단 토박이가 미주 순회공연을 와서 여기서
공연을 하지요. 저는 오랜만에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해정씨, 현정씨, 수근씨 그때 참 가슴이 복받치더라구요. 또 그
후에도 ????금이의 오월????로 또 왔어요. 토박이가. 근데 ????금이의 오월???? 때는 여기의 문화 활동가가 배우로 합류해요. 제가
배우로 합류를 했는데 단역이죠, 같이 미국 7개 지역을 다니고 캐나다까지 가서 공연도 하고. 아마 ????금이의 오월????은
브로드웨이(Broadway)? 미국 극장가 무대에서 많은 각광을 받았던 그런 기억이 나네요. 면접자: 선생님께서는 90년도부터 미국에 들어오셔서 오월운동과 관련한 문화 활동을 해오셨는데 이제는 2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때의 역할과 지금의 선생님의 역할은 이제 다를 것 같습니다. 구술자:
이곳 민족학교가 30년째 되고 있는데 민족학교를 정리하는 기록이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 다음에 오월 관련 행사를
정리하는 기록을 남기고 싶어요. 5·18 행사를 하면 대부분 저 또래 사람들이 모이지 20대 30대가 안 모이죠. 기념 재단이
함께 고민을 해봤으면 하는데. 저희들이 자녀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중 고등학생들이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해봤었어요.
역사탐방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여름방학 때 한국에 나가서 우리 한국의 현대사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합수형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5·18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라고. 그런 말씀을 재단을 설립하시면서 피력하셨는데 나는 분명히 나는 그런 입장에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5·18은 명예가 아니라 멍에죠. 어차피
이 민족학교를 세우신 한 분이, 윤한봉 선생님이시니까. 민족 학교와 윤한봉 선생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차피
민족학교는 5·18 정신을 안고가야 합니다. 그래서 민족학교 공간 속에 항상 5·18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그런 얘기도 했었어요. 민족학교를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잖아요. 민족학교 그 건물 외벽에 5·18 조형물을 만들자,
합수형님을 기억할 수 있는 거, 5·18 정신을 보여주는 조형물을 세워놓자, 이런 의견들이 나왔었어요. 면접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님께서 이곳에 오셔서 운동을 진행해 오신 게 25년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진행을 하시고자 합니까? 구술자:
바램이죠, 사람 일은 몰라요. 전 장담은 못하고요, 제가 미국생활을 살아가면서 참 힘들었을 때 많이 힘이 됐던 거는
5·18이거든요. 대학교 생활할 때, 맨날 최루탄 가스 맞아가면서 도망 다니고 이랬는데. 여기서 그런 어려움이 닥치면 떠올려서
힘을 내기도 해요. 자꾸 윤한봉 선생님 이야기가 많이 나오긴 하는데 저는 미국에 와가지고 윤한봉 선생님을 만난 게 행운이라고
생각을 해요. 현대사 속에서 그런 분하고 잠깐이나마 같이 활동을 했잖아요.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합수형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을 해요. 제가 반성되는 게 올해 저희가 34주년 기념행사를 했는데, 기록들을 보니까 2008년부터 쭉 기록이 되어있네요,
2013년까지. 그 이전 2006년부터 기록들이 빠져 있어요. 2006년에는 토박이도 왔었고 걷기 대회도 하고 그랬는데. 이게
한줄 두 줄로 행사들이 적어져 있는데 이런 것들을 좀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만,
5·18과 관련된 LA 지역 기록의 대부분은 민족학교에서 대부분 가지고 있다라고 하셨는데 그런 기록들이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정리하는 바람이 있구요. 면접자: 향후 오월 운동은, 특히 이쪽 지역 사회, LA 지역 사회에서 향후 오월운동은 좀 어떤 방향으로 좀 갔으면 하는 생각이 있으신가요? 구술자:
5·18의 정신을 정리해서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 그런 활동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들이 들어요.
그래서 2세 3세들로 넘어갔을 때 오월 정신이는 그대로 흘러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거든요. 미국에서 3세가 됐든 4세가 됐든
5세가 됐든, 백년후가 되었든 간에 아, 5·18하면 이것이었지, 아, 우리 엄마 아빠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지, 아,
민족학교가 그랬었지 하는 그런 것들이 연결될 수 있는 그런 행사나 사업들이 쫌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면접자: 지금까지 했던 것 중 보완해서 말씀해주실 부분들이 있거나 하면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하시고 인터뷰를 마치는 걸로 하겠습니다. 구술자: 제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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