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규 선생님 구술 녹취록 □ 개요 ○ 구술자 : 임경규(한청련 활동) ○ 면담자 : 황광우, 신소하, 이영선 / 정리 : 임명규 ○ 구술일시 : 2016년 1월 10일 ○ 구술장소 : 대전광역시 중리 면담자: 윤한봉 선생을 언제 어떻게 만나셨나요? 구술자: 1990년 2월 처음으로 LA 민족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친구 소개로 역사학습이 있다는 걸 알고 갔죠. 2월이라 추웠고. 친구와 들어갔는데, 쭈그리고 담배를 물고 있는 분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어요. 제 나이는 25살로, 대학은 2번 중퇴했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어요. 007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전형적인 1.5세였죠. 서로 인사 나누고 역사학습을 시작했는데, 갑오전쟁을 공부하는데 그 아저씨가 주변을 돌다가 갑자기 말씀을 하시는데, 갑오농민전쟁을 마치 어제 일처럼 흥분하시면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 시대의 민중이 느꼈던 것을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해주셨어요. 역사학습이가 끝나고 모여 앉아 그분은 줄담배를 피시고 다들 형님 형님하는데 그. 말씀에 매력에 빠져서 듣고만 있었어요. 그때 미국에서 10년 살면서 우리말 실력이 부족했고 그런데도 그분 말씀은 이해가 되었고 그 열정이 느껴지니까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머가 있었어요. 그 분 말씀이 길어요. 근데 지루하지 않아요. 내용을 다 이해는 못하지만 먼가가 있다. 매력이 있다. 생동감이 넘치는 언어로, 육두문자 섞어가면서. 그 우울한 시절을 살면서 생기를 느낀 거에요. 그리고 공동체 분위기도 좋았고. 면담자: 첫 모임 때 같이 공부한 사람은 몇명이나? 구술자: 약간 어둡고 싸구려 탁자와 쇠로 만든 의자에 둘러앉은 사람은 한 40대 후반 여성하고 아저씨 한분 그리고 저를 포함해서 10명 있었고 학습을 지도한 사람은 2분 정도. 면담자: 교재는 따로 있었나요? 구술자: 복사해서 나눠준 자료를 가지고. 저에게는 자료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암호문이거든요. 잘 모르지만, 우리 역사, 우리 문화 우리 겨레.. ‘우리’라는 말이 굉장히 좋았고 모여서 우리 근대사를 되돌아보면서 오늘날 우리 민족을 이야기한다는 그 자체가 좋았어요. 학습할 때는 돌아가면서 발제하고 발표하고. 끝나고 나서 가장 좋았던 게 둘러앉아서 가난한 살림이라서 뭐가 없었다. 맥주를 먹으면서. 합수형님은 술을 안 드시니까 다리 꼬고 담배피면서 그 분 말씀이 가장 재밌었죠. 면담자: 뒷풀이가 교양 필수이고 학습은 전공 선택이죠. 구술자: 맞아요 하여튼 뭐. 속된 말로 배꼽을 뺐다고 할까요? 사람에 대한 풍자가 느껴지면서. 무엇을 볼 때 굉장히 정확하게 보고, 복잡한 문제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말하는 능력. 역사문제 사회문제든 정세를 정확하게 보는 통찰력 이런 게 느껴졌어요. 내용도 모르고 언어도 잘 모르지만 들을수록 좋았죠.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니까 말할수록 생기를 느끼니까 우리 것 우리문화 이게 참 위대하구나. 몰랐지만 하나하나 이해가 되니까. 머리위에서 스위치가 탁탁 켜지는 느낌이었어요. 내 정체되고 우울했던 마음이 가벼워지고 우리 것, 역사 문화, 우리 정서 그 자긍심이 생기니까 살아가는 게 재미있어 졌어요. 이 분 만나서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구나하는 대안이 보인 겨죠. 면담자: 역사수업은 몇 개월 했나요? 구술자: 조국의 근대사였던가? 15회 하고 끝났어요. 중간에 활동이 있었죠. 그 공간이 민족학교이고, 비영리사회단체였잖아요. 동포의 권익보호를 위한 사회단체였죠. 그 안에 한청련이란 사무실이 있었구요. 거기가면 학습도 하고 윤 선배님이 강조하신 실천할 기회가 많았어요. 민족학교에서 하는 활동 한청련에서 하는 활동. 그 활동을 하면서 동포사회에 알 수 없던 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산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분들, 조국의 통일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분들, 다른 외국인하고 공유하면서 우리 문제를 알리고 그 사람들의 문제도 배우면서 한 형제로서 서로 힘을 주고 받지요. 면담자: LA에서 몇 년간 있었나요? 구술자: 전 74년 LA로 이민 갔구요, 82년에는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갔구요. 89년도에 엘에이로 돌아왔고 90년 초반에 민족학교에서 윤 선배님 뵙고 몇 달 후에 한청련 가입했습니다. 93년 3월 결혼하고 4월에 와이프가 워싱턴에서 일했기 때문에 워싱턴으로 갔고 그 다음에 미국 MIT 팔로우 쉽이 있어서 거기로 갔고요. 면담자: 90년에서 92년.. 그때 회원들은 40~50명 되었나요? 구술자: 그때 엘에이에 한청련 회원이 30명 정도 될 거고. 한겨레 회원이 또 있는데.. 모르겠구요. 주변에 후원자라 해가지고 민족학교 중심으로 후원자들이 많았었죠. 면담자: 이길주 그 분 기억나세요? 구술자: 대단히 중요한 분이세요. 지금 연세가 칠순이신데 윤 선배보다 몇 년 위시죠. 초기부터 민족학교를 꾸준히 후원하셨어요. 형님이 늘 강조하신게 뭐냐면, 돈 많은 사람은 돈을 많이 낼 수 있다. 그것도 감사하지만 이길주 누님은 꾸준히 매년 매월 꾸준히 후원하셨다. 참 대단한 분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그래서 이길수 선생님 후원자이시면서 미교협이라고 미주한인봉사단체 협의회의 이사장으로 계셨어요. 음으로 양으로 초기부터 직접참여하시고 굳은 일을 많이 하셨죠. 면담자: 노래를 잘하셨다고? 구술자: 전공이 성악이십니다. 미인이십니다. 그 분은 민족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 독특한 분으로 보였거든요. 다 가난한 사람들이잖아요. 근데 그분은 완전히 영부인이셨어요. 아주 말씀도 고상하시고 성악을 하셨고. 그렇죠. 오셔서 약간 좀 불편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도 오시고 또 오시고 늘 관심을 가지시고. 저 같은 까마득한 후배는 이분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었는데, 아마 합수형님 활동하는데 도움을 많이 주신 것 같습니다. 면담자: 이길주 여사님은 남편이 돈을 벌고? 구술자: 이길주 선생 남편이 치과의사셨어요. 면담자: 홍기완 선생이 많이 지원하셨죠? 구술자: 저는 기완이 형님하고 활동하진 않았구요. 나중에 인사하고 친해진 건데. 제가 듣기로는 민족학교 세울 무렵 그리고 세우고 나서. 아무런 기반이 없었는데 합수형님 보디가드면서 후원자 역할을 직접 맡으셨고. 여러 역할을 동시에 맡으셨어요. 원래 목수, 건축 일을 하셨기 때문에 민족학교 수리부터.. 없는 살림살이에 돈 버셔서.. 생활이 어려울 때 많이 메워주셨다고 알고 있어요. 그 분 아니셨다면 민족학교가 빨리 문을 닫았을 거에요. 제가 듣기로는 그 시절 합수형님이 LA에 오셔가지고 반갑게 맞이한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하고 심지어 시기질투한 사람도 많았는데 그 상황에서 기완이 형님이 천군만마 같은 역할을 하셨죠. 버럭 화를 내면 옆에서 또 같이 터뜨려주었으니까. 이 두 사람을 감당할 수 있는 원로가 별로 없었죠. 기완이 형님이 장단을 잘 맡아주셨죠. 그니까 덜 외로우셨죠. 면담자: 윤대중은 요? 구술자: 윤대중은 제 동서입니다. 부인들끼리 언니 동생이라구요. 제 처가 위고요. 윤대중씨는 저보다 5살 아래 70년생 개띠죠 면담자: 윤대중씨는 언제 결합했나요? 구술자: 윤대중은 동생과 다름없지만 나한테는 존경의 대상입니다. 윤대중의 활동이 저보다 굉장히 많고요. 어려운 시절에 중책을 맡아서 한청련 있을 때까지 열심히 했고, 어려운 민족학교 사업을 꾸준히 이끌어왔어요. 미교협이라면 미주한인봉사단체협의회일거에요. 엘에이에 민족학교가 있고 시카고, 뉴욕. 소위 마당집들의 협의체라고 볼 수 있죠. 그니까 대중사업을 하는 전국단체이죠. 이영선: 그 본부가 워싱턴에 있었어요? 구술자: 첨에는 뉴욕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지금은 엘에이고요. 워싱턴에 사무실을 하나 열었죠. 미교협 본부는 LA에 있구요. 워싱턴은 사무실을 하나 운영하고 있는 거죠. 윤대중은 지금 엘에이 사무국장입니다. 미국의 중책이죠 면담자: 그럼 먼저 가입한 거에요? 구술자: 대중이는 회원으로 가입한 것은 92년? 시카고에서 가입했어요. 처제하고 만나서 시카고에서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된 거죠. 면담자: 족내혼이네요. 조직을 배가하려면 밖에서 데리고 와야지. 워싱턴 디시에서 국제평화대행진을 했다는데.. 구술자: 준말로 IC라고 하는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연대위원회(IC)” 제 기억에 지역마다 뉴욕 디시, LA에 타민족 활동가를 모아서 코리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연대단체를 만들었어요. 그 IC가 앞장서서 국제평화대행진을 성사시켰죠. 그걸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집행하신 분은 윤선배님이시죠. 본인이 가실 수가 없었고. 법적으로 갈 수 있었더라도 안 가셨을거에요. 면담자: 한봉형은 갈 수 없는 게 광주 때문에 갈 수 없었어요. 구술자: 김준은 제 친구이고 동갑이에요. 호적에는 66년. 근데 65년 뱀띠로 알고 있어요. 면담자: 김준씨도 같은 때 학습했나요? 구술자: 학습할 때는 다른 사람이랑 했었고. 김준은 1년 뒤에 이민 와서. 다른 팀이랑 학습하고 활동은 같이 했죠. 한때 우리 마당집 뒤에 있는 공간에서 같이 살기도 했어요. 면담자: 뒤에 있는 공간이라니? 신소하; 마당집이 단독주택이었는데, 앞에 건물이 있고 뒤에 조그만 집이 하나 더 있었어요. 우리가 양쪽을 다 빌렸는데 작은 집은 세 들어 살았고 청년들이. 한 4명이 같이 살았고. 그때 저희도 월세를 내면서 후원자 역할을 한 거죠. 월세 내면서 공간을 유지하게 해주는. 무료로 자원봉사로 상근하고. 회원은 다 각자 벌어서 냈죠. 합수형님은 용납안하셨죠. 철저히 봉사해야 하고 돈 계산은 철저하고 비비는 것은 절대 싫어하셨죠. 면담자: 85, 86년도에 수난자돕기로 모금했던데. 90년대에도 모금을 한 적이 있었어요? 구술자: 모금은 많이 했죠. 그때만 해도 원폭피해자를 위한 모금도 했고.. 많이 못했지만. 하지만 국내활동가 옥바라지는 계속 했었고요. 면담자: 한청련에서 한국에 있는 빵잡이들까지 도왔다구요? 구술자: 그렇죠. 민가협에 꾸준한 후원을 보냈어요. 하여튼 국내에 여러 사건이 있을 때 모금을 했죠. 누가 구속되면 석방운동을 했죠. 면담자: 어떻게요? 구술자: 권영길 선생이 구속된 경우 한청련이 가동되어서 제 처가 많이 도왔죠... 한겨레미주홍보의 역할이 컸죠. 제 처가 많이 도왔는데요. 한겨레미주홍보원의 장점인데. 가진 것 없고 인력이나 재력이 부족했죠. 어마어마한 세계문제를 가지고 청년들이 뭔가를 해보겠다하는데, 어려운 싸움이잖아요? 그 당시 한겨레미주홍보를 통해서 미국 연방 하원 상원의원을 상대로 알려서 면담자: 몇 년도인지 기억나세요? 구술자: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근데 뭐냐면. 당시 홍정화 등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미국의 유명한 연방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을 통해서 사무실 그 보좌관들을 알고 다른 상하원 보좌관들 알아서 그 분들을 통해서 권영길씨 석방을 요구했어요. 이건 비인도적인 일이고 인권을 어기는 일이다. 그래서 석방을 촉구하는 편지를 썼어요. 그 대상은 청와대였던 것 같구요. 케네디를 비롯해서 상원, 하원의원의 사인 받아서 한국에 보내니까 권영길 위원장이 얼마 후에 석방되었어요. 면담자: 그 편지는 있을까요? 학교에 있을까? 구술자: 가지고 있을 법도 해요.. 면담자: 어디다 보냈다구요? 법무부? 청와대? 구술자: 법무부인지 청와대인지.. 청와대만 보는 게 아니라 카피해서 여기저기 동시에 다 보냈죠. 면담자: 그 편지를 어떻게 입수할까? 구술자: 그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게 윤선배님의 생각으로 해외청년들이 국제외교활동을 하는 구체적인 사례가 되구요. 한겨레 미주홍보원의 구체적인 성과로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저도 그 편지를 검토하긴 했어요. 보내기는 영문 오리지날로 보냈죠. 이건 오피셜 레터라. 최종본은 한청련 또는 한겨레 미주홍보원에 있을 겁니다. 구술자: 그 편지가 90년도쯤이니까. 관련자가 에드워드 케네디. 서혁교. 이진숙. 엘에이에서 봤기 때문에 엘에이 한청련에 아마 있을 것 같은데. 또는 재미한청련연합 공문에는 있을 거라고 봅니다. 면담자: 미리 찾아보자고 전해보죠. 권영길 석방운동은 미국에서 했고 제 처가 그 활동에 직접 참여했죠 면담자: 엘에이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심인보인가요? 구술자: 그렇죠. 심인보 빠지면 안되죠. 저보다 한 살 위구요. 그리고 조직의 대선배죠. 80년대 초기부터 잘나가는 대학을 포기하고 연합회장도 하고 미교협이니 민족학교니 일을 골고루 다 했었어요. 국제연대에 대해서는 그분이 다 알죠. 전 뒤늦게 알아가지고. 그분이 또 국제평화행진에 대해서는 다 알죠. 심인보에 대해서는 싫든 좋든 무시할 사람은 없어요. 면담자: 합수형이 호주와 캐나다, 유럽을 연결하는 부분을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더라구요. 한국 사람이 미국 전역 도시에 조직을 만든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지만, 민족적 관심에만 제한된 게 아니라. 필리핀 니카라과 등 국제연대를 한 부분은 우리가 크게 평가해야할 부분이어요. 그 부분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요. 좀 아세요? 구술자: 저는 워낙 새내기라서 귀동냥 수준이죠. 제 부인은 홍보관에서 실무를 많이 맡았어요. 캐나다와 호주, 독일에 한청련이 만들어지는 건데.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를 것 같아요. 돌이켜보니까 가난한 청년을 모아서 가난한 조직을 형성하셨어요. 국제적으로 엮으셨는데 구체적인 실천을 찾아서 일을 하는데 저는 나이가 들어서 돌이켜보니까 합수형님이 대동 세계, 양심 있는 해외청년들의 공동체를 만든 것 같아요. 해외에 살면서 양심 있게 살자. 바르게 살자. 우리뿐 아니라 타민족하고도 한 형제가 되어서 살자. 매일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도 닦는 말씀 아니고. 무슨 말인지 했는데. 이 양반이 숫자는 적고 힘은 약하지만 참된 모습을 사는 건 멀까. 우리의 공동체 대동 세계를 만들고, 타민족과 한 형제가 되자. 그렇게 활동하신 것 같아요. 면담자: 그분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죠. 한국에 민족주의자가 많은데 민족을 넘어선 사람이 없어요. 민족을 추구하면서도 넘어선 국제연대를. 구술자: 저로서는 합수형님이 하신 실천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주셨어요. 술어 하나하나를. 타민족 형제라고 하잖아요. 술어를 바꿔주신 거죠. 사고의 변화라고 보는데, 의식화를 시키신 거죠. 정확하게 뜻을 전달하려면 정확하게 언어를 해야 한다. 타민족하고 같은 문제를 두고 함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형제로 봐야 한다. 대단한 정명사상이죠. 합수형님의 성과는 물질로 이야기하기는 어려워요. 근데 그런 생각이 내 몸에 깊숙이 박혔구나. 북부조국, 남부조국, 타민족 형제, 어떤 일이 있을 때, 정명을 하는 것이죠. 면담자: 합수형의 거처는 일관되게 LA였나요? 신소하: 집은 LA 마당집이었어요. 민족학교가 흑인동네에 있었는데, 한 달에 한번 씩 헌옷판매를 했었어요. 가난한 멕시코 흑인들이 와서 옷을 사서 자기 본국 사람에게 보내요. 면담자: 부인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세요. 구술자: 66년생, 우리 바깥양반이에요(웃음). 7, 8살에 캐나다로 이민 갔다가 대학졸업하고 한청련을 알게 되었어요. 한청련을 알게 된 후 바로 89년에 한겨레미주홍보원에 상근하게 되었어요. 지금 워싱턴 디시에 있죠. 신소하: 워싱턴의 마당집이 홍보원이고. 구술자: 그 사무실에서 살면서 상근을 했죠. 악착같이 했죠. 애들 영어 가르치면서. 건강이 무너지고 그랬는데 한청련 내에서는 그런 별난 사람이 많이 있었어요. 형님이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구요. 우리는 언어도 모르고 서툰 사람으로서 그분의 똑바르면서 정확하면서 진실된 말씀을 들을 때 감동을 받았거든요. 통찰력뿐 아니라 진실됨을 바로 느꼈거든요.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서 젊음을 태워야 한다 했지만, 그 이면에는 똑바른 인간이 되어야 한다,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서 타민족 우리민족 다 같이 잘 살아가자, 그런 걸 의식화시켰어요. 면담자: 도시가 10개가 넘는데 한봉이 형 혼자 해야할 거 아닙니까? 구술자: 희생이 컸죠. 건강이 안좋고.. 제가 형님 병수발을 돕기도 했는데 국내에서 오신 분들 말씀 들으니까 “여기오니까 사람들이 순수하다 욕심도 없고 순수한 청년들이다” 그런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보고 형님 그늘아래 그렇게 되버린 것 같아요. “날 좀 보소 하지마라. 묵묵하게 살아라.” 그게 자주 하신 말씀이셨거든요. 면담자: LA에 있는 사람은 형 말을 자주 들었으나 뉴욕에 있는 사람들은 듣기 어려웠겠어요.. 구술자: 아.. 순회를 많이 하셨어요. 면담자: 1년에 몇 번? 신소하: 집에 있는 경우가 없었어요. 엘에이를 조직했어. 이제 뉴욕을 어떻게 결성하냐. 신문을 보면서 뉴욕에서 활동했던 단체의 사람을 만나요. 임창영박사죠. 또, 필라의 장광선씨를 만났어요. 장광선씨 집을 마당집으로 했거든요. 마찬가지로 덴버. 뉴잉글랜드, 시카고. 시애틀.. 다 그런 식이었요. 면담자: 조직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학습도 형이 했다는 거 아니에요? 구술자: 모일 때마다 하셨구요. 공식적으로는 간부회의에서, 대회에서. 10월대회가 있었죠. 다 모여서 집중학습을 하는 거요. 신소하: 재미한청련 연합에서 예비회원을 위한 학습표가 있었어. 역사학습 조직학습 이렇게 되거든요. 그럼 전국에서 그 학습표에 따라 교재를 가지고 같은 학습을 해. 그럼 마지막에 한일빨치산운동은 꼭 본인이 직접 하셨어. LA에 가면 다른 지역 소식을이야기하고 달라스도 그렇고. 이런 식으로 하니까 몸은 시애틀에 있어도 회원들 소식을 다 아는 거야. 그리고 중앙위원회, 회의, 간부수련회 회의 학습하고 정세분석하면 다 지역에 가서 소식을 나누고 지역소식 중앙소식들 다 이야기 소식을 나누고 10개의 지역이 하나로 움직였지. 면담자: 미국에서 혼자 다 맡아서 했다는 건가? 몸이 가능한가? 구술자: 하신 것 중에 핵심적인 것은 정세분석이었어요. 가는 곳 마다 정세분석을 하셨어요. 변화하는 상황에서 왜 그렇고 세상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런 상황에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 조직의 방향. 수련회 열매는 정세분석이거든요. 그게 끝나면 회원들이 다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이 속에서 한청련은 어디로 가야하고 무엇을 해야 한다. 신소하: 중간에 조직부장도 있었고. 연합회장도 있었고. 면담자: 미국 그 광대한 땅에서 신소하: 연합 간부들이 있었지. 대부분의 연합 간부들이 회의를 하면 연합 간부를 관리하는 사람이 형님이잖아요. 필라델피아 한청련 학습부장이 있고 조직부장이 있고. 각 지역마다 부장이 있죠. 나 같은 사람의 경우에 학습에 참석을 했어.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이 학습부장이고 회장이고 조직부장도 있었어요. 필라델피아 자체 내에서 학습도 하고 활동을 하고 해요. 그러다 마지막에 윤한봉씨가 오고 회원이 되면 연합 간부들 만나고. 구술자: 한청련이 독특한 조직이었을 거라고 보는데요, 연합회장-부회장-조직부장이 순회한 건 사실이고 그 사람들도 조직능력, 학습능력이 있었고요. 각 지역에서 가입하면 지역적으로 학습도 하는데. 마지막에 수련회에서 윤한봉형님이 정세분석으로 싹 정리를 해주시는 거죠. 형님의 비중은 절대적이었거든요. 신소하: 그니까 나 있을 때는 <한국근현대사>,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 <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 <철학에세이> 그걸 한 단락씩 공부해서 발표를 해. 그럼 옆에서 질문하고 토론을 해. 학습 담당하는 사람이 와서 짚어주는 거에요. 다 시각이 같아지는 거지. 면담자: 한청련 내부에서 귀국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신소하: 필라델피아 장광선씨가 반대했죠. 동부 쪽 몇 명하고. 장문의 반대편지를 보냈어요. 근데 한봉선생이 가기로 결정했죠. 면담자: 그 편지 없을까요? 신소하: 장광선씨한테 물어봐야지. 구술자: 저는 그때 MIT에서 펠로우십을 할 때라서 잘 모르지만 그때 들은 이야기로는 회원들이 많이 걱정했었어요. 귀국할 때요. 정세변화가 대단하고 한청련이 어디로 가야할지 위기인데.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라는 말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면담자: 활동무대를 광주로 옮기는 것이 생산적인 결정이냐. 누군가 이의제기가 있어야지. 국제연대에 비중을 두고 예컨대 1년에 두 달 다녀와라. 이런식으로. 구술자: 우리 광선이형 같은 대선배 같은 분들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지만. 우리 후배들은 감히 말을 못 꺼냈구요. 많은 대화가 있었을 거라고. 예민한 문제라. 일반회원으로는 감히 논할 수 없었을 것이구요. 아마 제 추측으로는 정민 연합회장 중심으로 연합에서는 상당한 고심이 있었고 문제제기도 있었을 거라고.. 면담자: 귀국이 건강문제하고 연결되어 있나요? 신소하: 귀국할 때는 건강문제가 심각하지 않았어요. 단지 허리가 좋지 않않았어요. 94년인가 김남주 장례식 때 산에 가는데 너무 힘들어하니까..우리가 병원에 가보자고해서 조남중 병원에 가니까 그때 폐기종이라는 것을 알아냈어요. 그때만 해도 그 병이 무서운지 몰랐어. 폐기종으로 몸이 힘들다고 알게 된 게.. 면담자: 몸에 이상이 상당히 많다고 안게 언제요? 신소하: 90년대 후반이었죠. 무안 간 것이 2004년이구요. 육교를 못 건너다니셨고.. 면담자: 폐기종 나으려고 중국을 다닌 것이 2001년. 그때 미국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신소하: 미국에 있었다면 한국에서만큼 스트레스는 많이 받지 않았겠죠. 머냐면 한봉형이 와서 보니까 다 맛이 간 거야. 장례식 때마다 하는 일이 싸우는 거야. 타락하지 않은 사람이 박효선, 황광우. 전부다 타락한 거야. 사람이 딴 사람 되어 있는 거야. 후배들이 지역의 원로급이 되어 있는데 옛날처럼 하지 않고 싸우는 거야. 후배들을 털어버리고 자기 일만 하면 되는데. 장례식 가면 다 만나잖아. 상대방이 옛날처럼 듣겠어? 같이 싸우는 거지. 한봉형 건강이 그래서... 면담자: 형수님 볼 때 귀국해서 활동할 때까지 한 활동이 10개가 있다면 어느 게 가장 중심에 있는 활동인 것 같습니까? 신소하: 현재로 볼 때는 5.18 재단설립이 가장 큰 것이죠. 본인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개련(정치개혁연대)이었는데 역량이 부족해서 못했지요. 해맞이 그런 걸 하고 싶어 했어요. 면담자: 그건 내가 잘 아는데, 한봉이형 욕심이었어요. 000을 비롯한 그 사람들 내가 80년대 같이 일을 했는데요.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들이었어요. 회의장에서 말은 잘해요. 돌아서면 잊어버려요. 건망증이 심한 사람들하고 함께 세상을 바꿔보겠다는데.. 신소하: 발판이 없잖아? 기반이 없잖아? 어찌되었던 서울 왔다갔다 하면서 하려 했는데.. 면담자: 그건 형의 한계가 아니라 안 되게 되어있던 거에요. 한청련 및 해외의 국제연대를 내실화해서 한국에 영향을 미치는 게 더 효과적이었죠. 서울의 그 능구렁이들하고 무슨 일을 해요? 내가 이건 해맞이가 아니라 달맞이다고 했어요. 구술자: 윤선배님은 저의 스승이구요. 그리고 저의 의식세계를 열어주신 은인이구요. <운동화와 똥가방> 무슨 활동을 하든, 조직지침서라고 보거든요. 속으로 나를 위해서 써주셨구나. 저는 이거 한권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면담자: 어느 분이 한봉이 형보고 부활한 해월 최시영이라고 그랬지요. 신소하: 뉴욕 김수곤 선생님이죠. 면담자: 그게 탁견이야. 첫째 얼굴이 비슷하고 둘째 최해월 선생이 전무후무한 도발이야. 도망하면서 모든 조직을 해. 부엌에서 똑똑하면 며느리도 여자인데 같이 밥을 먹어야 합니다. 남녀평등을 이야기하고.. 그렇게 도망하면서 동학을 만들어내고.. 아주 탁견이었죠. 담에 스위스에 가면 연락 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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