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 강완모 선생님 면담자 : 안재성 구술자 : 강완모 2016년 2월 8~10일, 프린스턴 강완모 자택에서 구술자 : 내가 옛날에 한청련 연합회장을 정민씨하고 나오고 번갈아가면서 회장과 부회장을 교대로 맡아 왔어요. 우리 한청련의 문화가 투표 문화가 아니었죠. 정민 씨가 나보다 한 살 많아요. 55년생이죠. 합수형 수행해서 같이 들어가는데. 한청련 연합 회장이나 부회장 때문에 한국 입국 금지자 명단으로 올라가 있는 거야, 김포공항으로 입국하는데 합수형이 어떻게 될까봐 제정신들이 아니었지. 귀빈실(VIP룸)에서 간단하게 기자회견을 하고, 당시 국회의원 정상용씨 나오고. 버스 타고 광주 내려가는데 뉴스에서 우리가 나오는 거야. 윤경자 누나 집에 들어가 10년 만에 침대에서 자는 거지...나는 그전 합수가 미국생활하면서 침대를 피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우리 회원들이 다들 단칸방에 살았기 때문에 그냥 바닥에서 자는 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책(<운동화와 똥가방>)을 보니까 이분이 그렇게 자기관리를 했던 거야. 면담자 : 김진숙 목사님도 집에 침대 있는데 왜 바닥에서 자냐고 물었대요. 구술자 : 시애틀 말이죠? 우린 그런 거 몰랐지. 거실에 바닥 깔아주라고 해서 바닥에서 주무셨어요. 김희택 선생 머하고 계셔요? 지금 정치운동은 안하는 거죠? 하긴 나이가 있으니까. 문국주 형은 카톨릭 쪽에서 뭐하나요? 면담자 : 어떻게 잘 알아요? 구술자 : 합수형이 여기 계실 때 믿을만한 루트로 한국의 자료를 받고 연락을 했는데, 카톨릭 정의구현 사재단과 자주 연락했어요. 그때 국주 형이 그 역할을 많이 했어요. 합수 형은 정보수집, 팩트 정리 이걸 무진장 열심히 했어요. 이걸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은 운동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거야. 국주 형이 그 역할을 많이 했어요. 한국에 있는 정보들을 국주형이... 백기완 선생 통일 마당집 짓느라고 한돌 쌓기 운동 하실 때, 우리가 다했어요. 백기완 선생 스타일이 있잖아. 대통령 선거에 나온 다음 해 88년도에 미국에 오셨어요. 합수형은 유교적인 스타일로 어르신에 대한 인사 예절이 똑 바랐어요. 이 양반이 김대중씨 어쩌고, 저쩌고 비판하면서도 만나면 넙죽 절을 해요. 백기완 선생이 공항에서 대기하는 데 합수형이 그 앞에서 넙죽 절을 하는 거요. 나도 호지민 평전을 읽어봤어요. 미국대학교수가 쓴 게 있는데. 호지민이라는 사람 보니까 베트남 민족이 정말 위대한 민족이더군요. 합수형은 어떻게 보면 호지민 스타일이에요.. 호지민도 해외운동을 많이 했거든요. 어쨌든, 백기완 선생 한 돌 쌓기 운동에서 그 당시 꽤 큰돈이었는데. 우리가 모금했어요. 그 돈으로 백기완 선생이 집을 사셨어요. 백기완 선생 그 끼가 있잖아. 어쨌든 한봉이형은 백기완 선생을 끔찍이 생각을 했어. 면담자 : 좀 더 디테일하게 정리를 해주세요. 돈을 얼마를 보냈고. 구술자 : 그렇지. <운동화와 똥가방>에 많이 나와 있는데, LA에서 휴지를 줍고 빈 깡통 모으고. 이런 이야기는 L.A.의 민족학교가 많이 알고 있고, 뉴욕에서는 강병호씨라고 재정부장 하던 분이 많이 알죠. 겨울엔 크리스마스 트리를 맨하탄에서 많이 팔아요. 강병호씨가 그걸 가져와서 그 추운 겨울날 맨하탄에 잘사는 동네 앞에서 트리를 팔아 2만 불 모았어요. 말이 그렇지.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밤에 24시간 동안 꽁꽁 추운데서 여자들은 따뜻한 물 가져다주고. 강병호씨가 그런 역할을 했고. 초창기 진짜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시작하는 것은 홍기완 선배가 많이 알죠. 기완이형도 똑같은 이야기. 그러고 보면 합수형이 기억력이 또 좋아. 저만해도 기억하기 편한 것만 좋아하지 왠만한 건 다 잊어버려요. 근데 합수형은 기억을 잘하더라고. 머리가 좋은 분 같아. 머리가 되게 좋아. 92년도에 우리가 세상이 바꼈으니까 각자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 들어가서 이제 삶과 운동이 통일되는 삶을 살자,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운동의 생활화! 그러다보면 우리의 초심과 우리 하려는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꾸준한 학습이 필요하다. 꾸준한 학습! 합수형이 한청련의 회원들의 새로운 길을 열어줬어요. 그래서 학업을 중단했던 사람은 학교로, 건강을 해쳤던 사람은 건강을 돌보고, 부모형제와 관계가 소원해졌던 사람은 다시 부모형제와 따뜻한 관계를 회복하고...이런 것들을 열어줬어요. 면담자 : 처음에 윤한봉형을 어떻게 만났어요? 구술자 : 한봉이형이 81년 여름에 미국 시애틀에 도착했단 말이에요. 이름도 바꾸고 가명으로 생활을 하다가 83년 1월에 민족학교를 만들었단 말이에요. LA에서. 그래서 84년 1월에 한청련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정식으로 창립했는데. 그니까 필라에서 합수형을 초청해서 광주항쟁 5월 행사의 강사로 왔어요. 동부에 처음 왔어요. 당시 광선 형이 연사로 초청을 했어. 필라델피아에 초청연사로 오셨다가 뉴욕에서 만난 거죠. 합수형이 항상 그랬거든 “한사람만 알면 자기는 조직하는데 자신이 있다.”고 했어요. 실제로 그렇게 했어요. 어느 지역이든 그런 식으로 했어요. 벤쿠버, 텍사스, 어느 지역이든 한사람만 아는 사람만 연결시켜주면 자신 있다고 해서 그 한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 주위에 있는 사람 모아서 저거하고. 필라에 왔다가 뉴욕에 와서 우리를 만났어요. 그 당시 우리는 유학생이었거든. 저는 콜롬비아대학에 있었고 한호석은 유니온 신학교에 있었고 민족음악 하던 사람 이희용씨가 있었구요. 그리고 우리 와이프, 그리고 효신이가 있었는데...그때 당시 유학생들이 독서모임 비슷한 것을 했었던 것 같아. 어떻게 이야기 듣고 합수형과 연결이 됐어요. 합수형 만나서 우린 제정신을 못차리고(웃음) 있었는데, 그러는 거요. 합수형이 광주항쟁 나고 나중에 광주현장으로 들어가야 되겠다고 해서 논길을 따라가면서 송곳을 가지고 다녔데요. 한 놈 만나면 내가 저거한다고 하고. 윤정모씨 집에 가서 숨고 샤워를 하는데 칼을 하나 입에 물고했데... 그 이야기를 듣고 교회 다니던 사람들이 ‘살아있는 예수’래. 그렇게 해서 뉴욕에서 한청련이 만들어지고. 마당집을 만들었죠. 한청련은 정치청년운동단체였고 마당집은 대중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뿌리를 내리는 커뮤니티 센터고. 그렇게 이중구조를 가졌던 거에요. 정치조직과 대중조직.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봉사도 하고 우리말 모르는 사람. 영어 모르는 사람 대신에 시민권도 신청해주고 복지 어플리케이션도 해주고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한 교육도 하고 끊임없이 대중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친구가 된 것 이죠. 대중활동을 하다가 정치지도력이 없으면 방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위에 있는 YKU라는 정치조직이 끊임없이 견제를 하는 거요. 또 운동 하다 보면 대가리만 커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대중조직에서 땅에 뿌리를 내리고 호흡을 같이하는 거죠. 이렇게 마당집을 통해서 또 견제하는 거야, 양쪽이. YKU와 마당집이 그렇게 된 것이죠. 일반 사람들이 한청련(YKU-YOUNG KOREAN UNITED)은 빨갱이 어쩌고 해도 마당집을 통해서 청년들을 만나잖아요. “저 사람들이 와서 김치도 담궈 주고 돈도 구해다 주던데.” 이러는거요. 이념으로만 활동하면 흔들리지만 커뮤니케이터에 뿌리를 내리면 흔들리지 않는 거야. 우리는 항상 그 이중 구조를 항상 갖고 일했어요. 여기에서 유학생의 비중이 큰 것은 아니었어요. 여기 한청련 초기 멤버 중 유학생들이 대여섯명 있었어요. 하지만 운동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어요. 심성이 중요했죠. 바탕이 깨끗하고 맑은 사람일수록, 합수형 말처럼 낙서가 안 되어있는 사람일수록 한청련에 들어와서 잘 적응이 됐지. 이런 사람들이 다수 기층을 이루었고. 합수가 영어를 하나도 안했잖아요. 한국말은 모르고 영어만 할 줄 아는 얘들이 감동을 받고 합수형 주위에 모이는 거야. 말 그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거였어요. 합수형이. 면담자 : 94년도에 조직이 깨질 때 구술자 : 아, 합수형님이 가신 다음에? 면담자 : 합수형께 쩔쩔매던 사람들이 제일 많이 나갔지요. 오히려 합수형한테 되게 편하게 했던 사람들이 많이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구술자 : 우리 한청련도 강철대오의 특출한 조직체는 아니었어요. 똑같은 사람이었고 똑같은 조직이었죠. 사람들은 다 안에 권력 지향적인 거,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어요. 그게 다 사람이에요. 합수라는 강력한 지도자의 절대적인 권위가 한국으로 간 다음 이 커다란 진공상태에서 쌓였던 불만이 터져 나오는 과정이었죠. 크게 봐서는 자연스런 현상이었어요. 면담자 : 합수형이 정민씨를 만나서 내가 관여를 하지 않을 테니까 계속 활동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던데요. 구술자 : 나는 못 들었어요. 만날 기회가 없었을 텐데. 누가 그런 이야기를. 그 사정은 심인보가 제일 잘 알 거요. 인보가 괜찮은 얘에요. 나보다 일찍 민족학교니 미주협, 나카섹 이런 데에서 일을 했어요. 인보가 아픈 상처가 있어요. 면담자 : 조직 갈등 이야기는 제가 쓸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구술자 : 그러니까. 합수정신은 무엇이냐 이거에 초점을 맞춰 주세요. 말도 안 통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로 모을 수 있었냐. 어떻게 설득했기에 가능한 것이냐. 이걸 탐색해주구요. 똥가방엔 항상 몇 월 몇 일자 신문이 있었어요. 돌아다니면서 신문스크랩하고 갖고 다닌 거야. 부지런하게 철저하게 팩트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다는 거야. 면담자 : 윤한봉 선생을 신비화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부담이 있었어요. 구술자 : 저는 고려대학교 1학년 시절 이념서클에 들어갔거든요. 한국에서 4년을 그렇게 보내고, 미국에 큰형이 있는데... 나를 데려오려고 해서 여기 왔어요. 학생운동 그만 두게 하려고 미국에 데려다 놨는데, 조금 있다가 한봉이형을 만난 거요. 돌아다니다 보니까 와이프까지 만나게 되었구요. 그러다가 내가 93년도에 내가 로스쿨 가겠다고 형한테 그러니까. 우리 큰형이 못 믿는 거야. 면담자 : 글은 쓰지 않았고, 실용적인 분 같으시고. 구술자 : 글은 쓰지 않았어요. 합수형이 귀국하실 때, 가장 환영해서 나왔던 사람들이 진정추에요. 당시 합수형이 “진보정치 이분들을 필요하고 도와줘야 한다”고 했어요. 노회찬씨도 진정추였죠. 귀국하기 전 제일 먼저 환영 준비 위원회 누가 했어요. 진정추가 했거든. 합수 형 입장에서는 후배들이 이렇게 하고 그러는데 합수 형이 마음이 약한 사람이거든. 귀국 하자마자 그 분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형님을 그렇게 한 거거든. 귀국하기 전 내가 합수형한테 감사패를 주려고 했어요. 나는 서프라이즈로 감사패를 주려고 한 거였지. 내가 감사패를 드리려고 하니까 합수 형이 노발대발 한 거야. 나는 단상에서 무색해지고 어쩔 줄 몰랐어요. 얼마나 무안하던지. 면답자; 합수형님이 공부할 때요. 한국의 사회 구조에 대해 얘기한 거 있어요? 강 : 어떻게든 군사정권 민주화시키고 그 다음에 한반도 핵무기를 없애고, 그 다음 남과 북이 평화와 통일로 가고. 이런 일에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던 상황이었어요. 우리는 군사독재의 민주화에 전력투구하는 거였어요. 제가 생각하는 합수 형은 제도권을 떠나서 생각하셨을 분은 아니에요. 제가 생각하기에 건강하게 지금까지 살아계셨으면 아마도 제도권 정치 속으로 들어가서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해요. 왜냐면 그분은 현실적인 분이에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도권 정치를 뛰어넘어 하는 것은 꿈을 꾸는 거예요. 물론 재야운동, 시민운동을 할 수 있겠지만 제도권 정치를 포기할 분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국회의원 300명 중에 한 사람의 국회의원이라도 올바른 생각을 하면은 정치가 바꿔질 수 있다.” 그런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우리가 92년도 문민정부가 되고나서 광야에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삶과 운동이 분리된 시기가 10년 세월이었거든요. 그러다가 문민정부 들어선 다음 지금부터는 각자의 삶을 영위하면서 그 속에서 삶과 운동을 일치시키면서 살아야 한다고 보았거든. 이럴 때일수록 꾸준한 학습이 필요하다. 꾸준한 학습, 운동의 생활화. 그러면서 학업을 계속 할 수 있는 사람은 학교로 돌아가고, 건강을 돌보고 뭣도 하고. 그게 92, 93년 그 때 나온 거예요. 그러고선 저도 다시 10년 떨어졌던 학교를 다시 들어가고. 92년도에 LA 흑인 폭동이 일어나면서 이민자들을 희생양으로 하는 미국에서 소수민족의 권익운동, 이민자의 권익운동, 코리안어메리칸 커뮤니티 운동이 중요하다고 본 거요. 시간이 없어서 못한 동포사회 운동으로 넘어간 가죠. 각종 마당집, 미교협 이게 자연스럽게 넘어갔어요. 물론 “동포사회 중심 운동하는 것은 한청년 정신이 변질된 거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안; (들리지 않음) 강 : 우리 별로 많이 느끼진 못했어요. 근데 그걸 합수형의 ????운동화 똥가방????이란 책, ????망명???? 책을 보고 알게 되고 그랬지 합수 형이 쉽게 광주얘기를 안했어요. 이 양반이 혼자 속으로 속다짐을 많이 하면서 사셨죠. 근데 우리는 그걸. 필라델피아에 전 한청년 회원이 있어요.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윤한봉 씨가 광주항쟁 당시에 2000명 이상이 죽었다 했는데 필라델피아에 계신 한 분이 합수 형님의 숫자가 너무 과장된 것 아니냐는 이의를 제기했나봐요. 그런데 나중에 합수 형님이 한국에서 오셔서 불러다 놓고 그 얘기를 하더래요. “그건 내가 사과한다. 광주에 가서 확인해 보니 나의 숫자가 과장된 것이었다.”하더래요. 이 양반이 그걸 듣고선 이 사람이 참 제대로 된 사람이다. 정말 제대로 운동하는 사람이다.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그 얘기를 하더라고. 합수 형님이 그런 식으로 정정하는 걸 나는 그런 자리에 없었으니까. 내가 아까 얘기한대로 합수 정신이 뭐냐. 과학적인 분석을 강조했어요. 과학적 분석을 하려면 신문 읽고 스크랩하고. 이 양반은 끝없이 공부를 하고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