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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8-실사구시2019-01-0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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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념이냐 현실이냐?


1977년 겨울부터 1978년 봄에 김남주님을 강사로 하는 파리코뮌 강독팀이 2~3개 정도 생긴다. 여기서 노준현, 정용화, 박몽구, 박석삼 등과 함께 학습하게 된다. 파리코뮌 강독은 1978년 5월 말에 들통이 나게 되고 김남주님은 도피하게 되면서 우리 모두는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에 끌려가 2~3일 곤욕을 치르고 나오게 된다.

 

김남주는 그의 시 어디에선가 나이 마흔이 넘도록 거처할 사상의 집 한 채 만들지 못한 자신의 삶에 대해 자탄했다. 김남주는 탁월한 어학실력에 힘입어 많은 영문 서적들을 읽었고, 상대적으로 뛰어난 진보적인 사유의 경지에 일찍 도달했다. 김남주의 머릿속엔 세계사를 뒤흔든 혁명가들의 외침이 어른거렸고, 그들의 언어를 흉내 내길 좋아했다. 함성지 유인물을 찍기 위한 자금을 구하러 만난 여대생에게 “나는 독재의 무덤을 파러 갑니다”라고 말했다지 않는가? 시인 김남주는 광주 운동권에서 보기 힘든 이념형 투사였다. 잠시 안길정의 회고를 듣자.


녹두서점은 채 서너 평이 안 되는 작은 매장이었다. 한쪽에 예닐곱 명이 들어앉으면 꽉 차는 작은 골방이 있었다. 이 골방에 들어서려면 누구나 문지방위쪽에 걸린 녹두장군에게 반드시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 고개를 뻣뻣이 들고 들어갔다가는 나지막한 문지방이 이마빡을 후려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부 남주 형은 방 아랫목에서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군용 잠바를 입은 검은 안경테의 시인은 뒹굴뒹굴하면서 일어나지도 않고 우리에게 물었다.


“야, 늬들 책은 다 준비했냐?”

일어 공부는 아마 두 달 정도 이어진 것 같다. 강습이 시작되기 전 제자들을 기다릴 때 사부는 일어판 《크로포트킨》을 읽었다. 사부의 책 자루엔 무정부주의자 바쿠닌과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있었다.

이념이란 좋은 것이다. 삶이 일상의 그물에 갇혀 있을 때, 이 그물을 찢어버릴 힘이 이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념은 존재하는 현실과 다른 또 다른 세계, 대안의 세계를 추구하도록 해주는 원동력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념이 있기에 우리는 이상을 꿈꾸며, 이상이 있기에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치고 간다.

그런데 이념이 지나치면 사고를 친다. 이념의 과잉은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실천이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면서 해방 전후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자신이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에 몸담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이 착각에서 벗어나기까지 역사는 많은 희생을 요구했다. 어떤 이념을 추종하는가는 각자의 자유이지만, 그 이념 때문에 목전의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할 경우, 우리는 이념의 과잉으로 인한 무거운 벌을 받는다.


김남주 선배도 휴가 때마다 영어로 된 책들을 읽었던 거에요. 그래서 혁명가적인 의식을 가진 거야. 그래서 반제 반봉건 민족 해방 투쟁 같은 걸 이미 알았어.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하는데, 난 몰랐지. 그때 박석률 선배가 꼬시는 게 이 양반이 지하투쟁만이 박정희를 이길 수 있다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죽을라고 환장했는 갑다고 속으로 그랬지. 난 계속 공장에 다녔는데 계속 부추기는 거야. 너가 진짜 세상을 바꿀려면 이 길을 놔두고 어떻게 바꿀래. 그래서 내가 넘어갔지. 김남주를 비롯해 광주 출신의 투사들이 대거 남민전에 가입한다. 이념도 중요하고 조직도 중요하지만, 대중의 삶을 떠난 운동은 끈 떨어진 연鳶이다. 연은, 잡아당기고 풀어주는 지상의 힘과 씽씽 부는 바람과의 긴장 관계 속에 있을 때, 창공을 난다. 남민전 전사들이 품은 뜻은 숭고했으나, 조직원들은 대중의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었다. 남민전의 주요 조직 대상은 윤한봉이었다. 이강의 회고를 들어보자.


1978년 가을 나는 박석률의 지도와 소개로 이재문 선생을 만나 남민전에 가입했다. 그런데 조직 과제의 하나로서 윤한봉을 주요 가입 대상자로 선정해 나에게 가입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여러 선을 통해 윤한봉의 영입 작업이 시도되었을 것이다. 만일 윤한봉이 남민전의 강령과 규약에 동의하는 선서를 했더라면, 그 후과는 끔찍할 정도였다. 1979년 9월 그때 이미 광주 운동권은 초토화되었을 것이다.

윤한봉은 이념으로 운동권에 뛰어든 사람 즉 이념형 운동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본 대로 느낀 대로 움직이는 실사구시형 운동가였다. 그가 보기엔 남민전과 같은 전국 차원의 지하조직은 필요하지 않았다. 지하조직은 몸만 무겁게 한다. 오히려 활동력만 떨어지게 한다. 지하조직은 운동가들을 조기 두루미 엮듯 엮어 독재자에게 제물로 바치는 무모를 저지른다. 윤한봉은 남민전의 무모를 날카롭게 감지했다. 그리고 남민전의 접근으로부터 광주 운동권을 지켰다. 김희택의 회고는 윤한봉의 실사구시를 잘 보여준다.


그는 단호했다. ‘우리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 단위의 민주 역량을 구축해야 한다.’ 그의 주장이 일리 있는 견해라고 평가했지만 처음엔 동조하지 않았다. 하루는 단둘이 만난 자리에서 강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현대문화연구소를 시작했으니 이곳을 터전 삼아 함께 청년운동을 해보자는 것이다. 종교인, 문인, 교육자 등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역량을 잘 모아내서 학생운동과 결합하면 큰 힘을 만들 수 있다며 집요하게 나를 설득했다. 나는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합수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나는 현대문화연구소의 2대 소장이 되었다. 그때 합수 형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구로동 혹은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감옥 문을 나섰던 나는 그를 만나서 청년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고 뒤이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3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를 만난 것은 나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건이었다. 


윤한봉이 보기에 필요한 운동은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청년운동이었다. 모두들 노동운동을 교과서의 정답처럼 말하던 그 시절에 지역의 청년운동을 주장한 것은 특이한 견해였다. 서울에서 김근태 씨가 민주청년연합을 결성해 청년운동을 이끈 시점이 1983년 가을이었다. 윤한봉은 그보다 몇 년 전부터 광주의 청년운동을 이끌었다. 이념을 쫒지 않고, 현실의 요구에 충실한 실사구시형 운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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