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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7-옥바라지 그리고 송백회2019-01-0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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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옥중의 죄수들을 돕는 여성들, 송백회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있기까지 윤한봉이 행한 실천 중에서 빛나는 실천은 송백회의 결성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남성 운동가들 역시 봉건적 가부장제의 악습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였다. 여성의 힘을 조직할 것을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윤한봉이 옥중의 동료들을 돕는 옥바라지를 하면서 송백회가 결성되기 시작했다는 점도 매우 특이하다.

옥중 생활을 하면 사람의 손길이 아쉽다. 먼저 출소하는 사람에게 밖의 친척에게 편지를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누구나 전달해주겠노라 다짐한다. 교도소의 문을 나서면 마음이 달라진다. 귀찮다. 없던 약속이 된다. 이게 출소자의 심리이다.

윤한봉은 달랐다. 겨울의 추위를 견디게 해 줄 털양말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윤한봉은 출소하자마자 동생 윤경자에게 털양말을 짜달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죄수들에게 털양말을 영치한다. 또 윤한봉은 출소하자마자 책 넣기 옥바라지에 나선다. ‘족보와 일기장만 두고 갖고 있는 책을 다 내놔라’ 악랄한 주문이었다. 한 두 사람이 아닌, 호남 일대의 교도소 수감자 모두에게 털양말과 책을 영치하려면, 혼자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여동생을 위시해서 사모님들과 형수님들과 제수씨들과 후배의 애인들을 조직한다. 그것이 송백회 결성의 시초였다.

운동에 뛰어든 이래, 윤한봉은 가방 하나 메고 이 집 저 집 떠돌며 살았다. 단골집 중 하나는 동생 윤경자의 신혼방이었다. 어느 날 동생에게 제안했다. 쌀 생산자 대회에서 활약한 여성들을 조직하자. 양심수들의 옥바라지를 하는 단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만도 수십 명의 양심수들이 수감되어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윤경자는 말한다.


오빠는 특별한 거처가 없었어요. 가방 하나 들고 이집 저집 다니면서 잤는데 우리가 광주로 오니까 아무래도 우리 집에 와서 많이 잤지. 그러면서 오빠는 혼자서 옥바라지를 하고 있었어요. ‘옥바라지할 수 있는 여자들의 모임을 만들자. 아주 중요한 거다.’ 오빠가 말했어요. 그렇게 해가지고 시작된 게 송백회야.


송백회의 좌장으로는 소설가 홍희담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홍희담은 황석영의 부인이었다. 부부가 전라도 해남에 내려온 것은 1977년 가을이었다. 황석영의 장편소설 《장길산》이 널리 대중적으로 알려지던 때였다. 이듬해 초봄, 홍희담은 남편을 찾아온 윤한봉을 처음 만난다. 홍희담의 회고다.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어느 날, 남편이 한 사나이를 데리고 왔어요. 방금 출소했다는데 첫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풍모였지요. 깡마른 체격에 비스듬히 휜 어깨는 언제라도 상대방을 받아칠 기세였어요. 의외로 손가락은 가늘고 섬세했지요. 손은 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드러내요. 그의 입은 직설적 언어로 상대방을 제압하기에 충분했어요. 하지만 그의 손은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슬픔이 많은 내밀함을 나타내고 있었어요.


홍희담은 문병란 시인의 부인, 강신석 목사의 부인 등 여성계의 원로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윤경자는 이소라, 박경희 등 쌀 생산자대회에 밥 당번을 했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조직했다. 윤한봉은 YWCA의 안희옥 총장, 이애신 총무, 김경천 간사, 기독병원에서 일하는 안성례, 여성노동운동가 정향자 등을 조직했다. 목포의 한산촌이라는 결핵요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던 여의사 여성숙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송백회는 윤한봉의 제안대로 1978년 12월에 결성되었다. 송백회는 여성운동의 새로운 모범이었다. 그 무렵 여성 운동가들은 대부분 종교계에 속해 있었다. 송백회는 어떤 단체에 의존하지 않았다. 회원들이 낸 회비로 운영했다. 공부하는 소모임도 가졌다. 회원은 꾸준히 늘었다.


윤한봉의 설득력은 남자나 여자나 다르지 않았다. 진솔하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송백회의 첫 사업인 털양말 짜기도 그랬다. 그는 마음씨 고운 여성들에게 수감자들에게 왜 털양말이 필요한가를 실감나게 설득했다. 자기가 두 번 감옥살이를 할 때 얼마나 발이 시렸는지, 동생 윤경자가 털양말을 짜서 영치해 준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 말했다. 그러면서 윤경자가 감옥에 넣어주었던 털양말을 꺼내 보여주었다. 털양말은 만들어 파는 회사도 없으니 직접 짜야 한다고 호소했다. 다들 넘어갔다. 송백회 회원들이 짠 털양말은 147켤레나 되었다. 광주구치소에 수감된 정치범이 40명이니 한 사람 당 세 켤레씩 넣어줄 수 있는 양이었다. 윤한봉이 사적 이익이나 정치적 욕심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을 그들은 잘 알았다. 80년 5월 도청의 투사들에게 주먹밥을 날라준 여성들이 송백회 회원들이었다. 윤경자의 증언이다.


희담 언니가 나에게 이야기를 했어. ‘경자야, 느그 집에서 김밥 좀 싸라.’ 우리는 남동 전대병원 앞이라 도청하고도 가깝고 그래서 계속 김밥을 쌌어요. 도청 앞까지 김밤을 이고 가 거기다 내려주고 다시 집으로 와서 또 싸고. 시골에서 온 쌀이 많았는데, 식구들끼리 먹어야 할 쌀을 내가 거의 다 없앴어요. 김밥을 해 나르느라고. 

나는 오랫동안 윤한봉의 무소유와 헌신, 동지애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주목했다. 가계를 뒤져 보니 윤한봉의 할머니가 나왔다.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 도와주는 것을 재미로 사신 분이었다. 어느 집 부인이 출산을 하면 몰래 미역을 보내주었고, 굶는 이웃이 있으면 쌀을 퍼다주었다. 그 심부름을 어린 윤한봉이 한 것이다.


한봉이 형 친구 중에 권영한 씨라고 있었는데 그분집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우리가 시골에 가서 쌀을 가방에 한 말씩 담아 가지고 올라오면, 계림동 경양방죽에서 동명교회 사택까지 걸어서 식량을 비워주고 와야 맘이 편한 사람이었어요.

 

전라도의 바닷가 사람들에겐 아주 끈끈한 정이 있다. 이웃의 불우를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맹자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 했고, 이 마음이 인(仁)의 단서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했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전라도 촌놈들은 ‘오매, 짠한그’하는 소리가 입에서 튀어 나온다. 지난 100년 역사에서 왜 호남이 항일투쟁의 주역을 담당했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또 주역을 맡게 된 이유를 나는 바로 이 마음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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