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상원의원은 윤한봉이 도착하고 얼마 후 보좌관인 칼리 키를 직접 광주로 보내 강신석 목사와 조아라 장로, 조비오 신부 등을 만나도록 했다. 윤한봉의 신원을 확인해 공식적으로 정치망명 절차를 밟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긴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윤한봉의 망명은 결코 개인적인 도피가 아니었다. 수백 명 젊은이를 학살하고 수천 명을 고문하여 권력을 찬탈한 군사파시즘 치하에서 벌어진 저항의 한 형태로, 많은 사람들의 지원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진 또 하나의 민주화투쟁이었다. 세계의 양심세력에게 광주의 참상을 알릴 임무를 부여받은 그의 어깨는 무거웠다. 그러나 그는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감옥행을 무릅쓰고 유독 윤한봉의 망명을 추진했던 이유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