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언행록

 
 
 
제목4-동지애2019-01-0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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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지애

어머님의 호곡에 실려 들었던 형의 이름, 내가 형의 얼굴을 처음 보았던 것은 1975년 6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때 광주일고 학생 시위에 연루되어 광주교도소에서 잠깐의 징역을 살고 나온 직후였다. 윤한봉 선배는 YWCA 맞은 편 골목의 어느 한식집으로 우리 일행을 불렀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은 없다. 한 끼 맛있는 점심 식사를 대접받았다는 기억만 또렷이 있다. 형님은 ‘아이스케키’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우리들에게 밥을 사준 것이다. 모두가 우리들의 행동을 무모한 짓이라 혀를 차던 외로운 시절, 형은 그렇게 후배들을 다독여주었다. 옥바라지해야 하고 돈이 필요하니까, 서울에서 오랜 친구가 왔는데 국밥이라도 하나 사 먹이고 싶은데 돈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용봉축제 때 가서 아이스케끼 장사를 하자. 그래가지고 얼음 매고 악을 쓰고 다닌 거예요. 

 

윤한봉의 동지애는 각별하다. 그는 동료 김정길이 심한 고문을 당해 몸을 움직이지 못하자 동료의 치유를 위해 발 벗고 나선다. 흑염소 한 마리를 구할 자금이 없어 월부 책장사에 나서는 모습은 눈물겹다.


김정길이가 몸이 아주 안 좋아진 거예요. 김정길이가 전기고문을 받아분 거요. 날이 으스스하거나 비가 오고 그라믄 몸을 추스르지도 못할 정도로 지팽이를 짚을 정도였어요. 어떤 사람들이 흑염소를 고아 먹이면 좋다고 해요. 그래갖고 내가 월부책장사를 나섰어. 제일 먼저 서부경찰서 정보과정을 찾아갔지. 그 사람이 우리들을 두들겨팬 사람이여. 총장한테 갔어. 사주쇼 그랬더니 이건 판공비가 아니라 내 개인 공금에서 나간 돈이라고 하면서 사주더만. 한번은 너무 안 사주니까 얼마나 화가 나는지 문리대 옆에서 악을 썼어. 이런 개0끼들이 없다고, 상놈의 새끼들이 형도 확정되기 전에 제자들 모가지 잘라놓고, 개0끼들이 책 한권 안 사준다고. 제자들 죽이고 잘 먹고 잘산다고. 악을 막 쓰고 그랬더니 인자 소문이 났어.

 본인이 어렵게 자란 것도 아니었다. 아버님이 시골의 부자였으니, 윤한봉은 넉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운 것 없이 자라면 궂은일은 못하는 법이다. 윤한봉도 자기 일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책장사였다. 동료의 몸을 치유하기 위해 윤한봉은 평생 하지 않은 책장사에 나선다.


 윤한봉은 이때 완도의 여러 섬들을 다니면서 아는 초등학교 동창생들의 도움을 받아 책을 팔고 다녔다. 후배 박형선은 함께 책을 팔러 다닌 옛이야기 한 소절을 들려준다. 한봉은 체질상으로 소주 한 잔도 마시지 못했던 것과 달리 형선은 애주가였다.

형선: 형, 우리 막걸리 한 잔만 마십시다.
한봉: 무슨 소리야? 우리가 뭣 때문에 책을 팔러 다니는데.
형선: 형, 목이 마릉께 딱 한 잔만 마십시다.
한봉: 이 돈은 우리 개인 돈이 아니야.

선배의 원칙주의에 열불이 난 형선은 수영복도 없이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어가 열을 식혔다고 한다. 그 시절 혹독한 궁핍을 이겨내기 위해 그들은 포장마차를 끌어야 했고, 전남대 잔디밭에서 잔디 깎는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상용으로부터 꼬마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때 꼬마시장을 열었어요. 구멍가게인데, 주로 농산품, 해산품을 중심으로 하는 가게를 운영해보자. 여러 명이 직거래를 해서 중간 마진을 없애자. 더 좋은 조건으로 구매하고 제공하는 협동조합적 발상을 했지요. 처음에는 나와 이강 선배가 했죠. 차도 없으니까 자전거로 싣고. 그런데, 강이 형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노동을 해본 사람이 아니에요. 자전거에 싣고 넘어지기도 하고 그랬는데 결국 1년 정도 하다가 망했지요. 1970년대 1,000만 원이면 큰돈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몫으로 남겨준 땅을 팔아 윤한봉은 자금을 만든다. 후배 동료들과 함께 꼬마시장을 벌이는데 얼마 안 가 원금까지 다 말아먹는다. 정상용은 도청을 지키던 마지막 날, 귀청이 찢어질 듯 요란한 총알소리 속에서 맨 먼저 떠오른 얼굴은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라 윤한봉이었다고 고백했다. 새벽 3시에 작전을 시작해서 제압하는데 1시간이 안 걸렸죠. 외곽은 이미 상황이 끝나버렸고. 나는 도청 기획관리실에 들어가 있었는데, 입구 쪽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잠깐의 상황이었어요. 그 잠깐의 순간에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어요. 눈물도 안 나고 담담했어요. ‘아 이렇게 죽네.’하면서 파노라마처럼 아는 얼굴들이 스쳐지나가요. 제일 먼저 합수가 떠올랐어요. 나에게는 합수가 동지면서 선배면서, 정신적 지주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던 갓 같아요.


내 것 네 것 없이 가진 것 다 내놓고 필요한 대로 쓰는 동지애. 이 동지애의 모범이 윤한봉이었다. 그것을 동지애라고 해야 할 지 우애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지애가 무엇인지 몰라 윤한봉은 칠량 마을 어른에게 묻는다. 그분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도 윤한봉에 대한 애정이 깊은 분이었던 것 같다.


“어르신, 동지애가 뭡니까?”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게 동지애여”
“무슨 말씀입니까?”
“젊어선 의기투합해 내 것 네 것 없이 나누며 살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 모두 다 자기의 앞가림하느라 바쁘지. 그러다보면 누구는 출세해 부자가 되고, 누구는 이름 없이 빈한한 삶을 살아. 그래갖고는 동지라고 할 수 없어.”


이후 윤한봉은 결의한다. “내게 꼭 필요한 것만을 챙기고, 필요하지 않는 것들은 다 동료들에게 나누어주
자.” 이후 윤한봉은 죽는 그날까지 무소유의 삶을 산다. 이 점이 남다르다. 젊은 날 운동을 위해 투신한 많은 운동가들이 나이가 들어 현실에 타협하면서 예전에 없던 사욕을 부리게 되고, 운동의 대의보다 사익을 챙기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다. 윤한봉에겐 사심이 없다. 윤한봉과 함께 청춘을 보낸 정상용의 인물평이 자못 흥미롭다. 


운동권에선 세 사람을 탁월한 지도자로 봐요. 한 사람은 김근태 선배. 그 다음에 장기표 선배. 그 다음에 윤한봉 선배. 많은 운동권 지도자가 있지만, 이 세분이 가장 탁월한 지도자라고 봐요. 근태 형은 굉장히 논리정연하구요. 말은 어눌하지만 진국이죠. 심지가 곧아요. 그 점에서는 누구도 따라가지 못해요. 장기표 선배는 굉장히 대중적이에요. 말을 잘하고 호소력이 있어요. 그래서 모든 현장에 장기표가 떴다 그러면 사람들을 압도해. 그렇게 기표 형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장기가 있어요.
그런데 한봉 형은 생활로서, 모범이죠. 아무도 따라오지 못해. 그래서 그 점에 있어서는 한국 운동권 중에서 최고입니다. 감히 그 앞에서 무소유니 뭐니 할 사람이 없죠. 생활로 모범을 보인 사람이 한봉 형입니다. 그 장점을 따라올 사람이 없어요. 생각이 다른 사람이라도 조금만 같이 생활해보면 반해요. 정말 반해요. 그것은 진정성 때문이지요. 그게 가장 큰 힘이에요.

 

이후 나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훌륭한 선배들을 많이 만났다. 민청학련 사건 때 판사가 사형을 선고하자, “영광입니다”라고 말한 멋진 사나이 김병곤 선배도 만나보았고, 치안본부의 전기 고문을 이겨낸 김근태 선배도 만나보았다. 윤한봉은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순수하게 시작했다가 자칫 잘못하면 자기도 모르게 명예를 추구하게 되고 권력을 쫓게 되는 거죠. 그걸 아주 처음부터 경계하셨던 분이에요. 합수 형님께서 즐겨 쓰시던 단어 중 하나가 ‘날 좀 보소’라는 게 있어요. ‘날 좀 보소’가 되면 안 된다. 그리고 ‘뺀들바우가 되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말만 하시는 게 아니라 본인이 그걸 행하거든요. 그게 놀랍죠. 한번은 변기가 막히는데 아무리 해도 안 뚫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이 딱 손 걷어붙이고 손 집어넣어 파내는 거요.

윤한봉의 무소유는 법정의 무소유와 차원이 다르다. 윤한봉의 무소유는 소크라테스의 무소유와도 차원이 다르다. 법정이나 소크라테스의 무소유는 본질적으로 ‘제 영혼의 평안’을 위한 무소유였다. 윤한봉의 무소유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여정에서 동지와 목숨을 함께 하기 위한 무소유였다. 김남주 시인이 그린 전사의 전형은 윤한봉이었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 엄수가 규율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 분 일 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 몸같이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은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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