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언행록

 
 
 
제목21-시애틀에서 온 편지2019-01-0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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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시애틀에서 온 편지


그 무렵 한청련은 미주 전역에 걸쳐 조직을 결성하고 있었다. 매년 한차례 지역 대표자 회의를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었다. 회의는 대강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참석자 모두 바짝 긴장하고 있어서 회의 분위기는 때로는 진지함을 넘어 살벌하기까지 할 때도 있었다. 우선 각 지역이 돌아가면서 지역조직의 현황을 보고하고, 지역조직의 사업계획을 보고한다. 이후 사전에 지명을 받은 한 회원으로부터 국제정세와 국내정세에 관해 보고를 듣고, 질의와 토론에 들어간다. 여기까지는 여타 다른 조직과 별 다를 바 없다. 백미는 이어지는 윤한봉 지도위원의 평가 시간이다.


그는 메모를 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각 지역보고에 대해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지적하고 평가한다.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호된 질책을 가하기도 한다. 윤한봉은 화를 내지 않는다. 화를 낼 때 그의 얼굴은 그냥 진지할 뿐이다. 토론할 때 윤한봉은 현학적 문자나 미사여구를 쓰지 않는다. 그저 일상적인 언어로 쉽게 이야기한다. 때로는 조금은 상스러운 비유로 정곡을 찔러 얘기한다. 야단맞으면서도 킥킥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아무리 복잡하게 얽힌 국제관계의 실타래도 윤한봉의 손에 들어가면 간단히 풀렸다. 윤한봉은 말한다. ‘국제관계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문제이다. 이해관계의 끈을 따라가다보면 쉽게 보인다.’ 대부분의 정치평론가들이 쓴 글을 보면, 사전지식이 없인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윤한봉의 평론은 이해하기가 아주 쉬웠다. 그의 언어는 쉽고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가 유식한 문자를 몰라서가 아니다. 그는 책상물림들의 현학적 어휘를 체질적으로 싫어했다.

 

1985년경 시애틀에서도 몇몇 젊은이들이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이종록 역시 적당히 자존심만 센 속물이었다.

처음 윤한봉을 직접 봤을 때 이종록은 몹시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윤한봉의 모습을 접한 순간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에게서 카리스마나 권위 같은 것은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시커멓고 꾀죄죄한데다 목소리도 심한 탁음이고 옷차림새 또한 후줄근해서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지도자상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영락없는 촌놈이었다. 그런데 그 못생긴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순진하고 친근한 얼굴이 또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잠깐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그에게 포위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확실히 ‘합수’였다. 윤한봉은 이종록에게 네 살 아래였지만, 이종록에게 윤한봉은 ‘합수 형’이었고, 존경하는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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