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언행록

 
 
 
제목36-기념재단2019-01-0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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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5·18 기념재단


1994년 영구 귀국한 윤한봉이 맨 먼저 추진한 일은 ‘5·18기념재단’의 설립이었다. 그해 8월에 창립하고 11월에 재단 설립인가증을 받았다. 참으로 짧은 기간이었다. 기간만 보면 일이 수월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윤한봉의 생애 전체를 걸쳐 가장 복잡하고 가장 힘든 일이었다. 알지만 공개할 수 없는 사실을 발언할 때, ‘오프 더 레코드’로 녹취하자고 한다. 경계와 의심, 비방과 음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인격 모독까지 견뎌야했다.

 나는 재단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선 5월과 관련되지 않는 사람들을 집어넣어야 한다고 보았어. 5월 관련자들만 모아놓으면 자기들만의 잔치를 벌리게 되지. 배가 산으로 올라가고. 한국이 이렇게 변했구나. 그런 것을 준비해 가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꼈어.

윤한봉은 기념재단을 만들기 위해 날마다 바쁘게 움직였다. 협박전화가 걸려 오기도 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온갖 협박과 음해를 뚫고 8월 30일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설립인가를 받은 5‧18기념 재단의 사무실 현판식을 앞두고 5월 영령들께 보고를 드리기 위해 설립 추진위원들과 함께 망월동에 찾아갔다가 재단 설립 과정에 불만을 가진 일부 관련자들로부터 횡포를 당했다. “〇〇〇 팔아서 돈과 명예를 챙기는 놈들”이라는 욕설을 듣고 모두들 분향도 묵념도 못하고 쫓기듯 돌아왔다.

"나는 80년 이후 오늘까지 5월 영령들을 가슴에 고이 모시고 살아왔는데, 5월 정신을 가슴에 안고 해외에서나마 내 나름대로 열심히 실천해 왔는데, 보상금도 받지 않았고, 5월에 관련된 어떠한 명예도 챙긴 적이 없는데 이렇게 영령들께 참배도 못하고…’

그해 12월에 설립허가증이 나왔다. '그 어떤 고난이 닥쳐도 굳게 딛고 일어서리라. 내 기어이 살아 돌아가 5월 영령들에 대한 죄값을 갚으리라.' 망명 생활 12년 동안 가슴에 깊게 묻어온 다짐이 마침내 그 약속을 지킨 날이었다.‘가신 임들이 환하고 웃고 계십니다.’ 윤한봉도 이날만은 천진난만하면서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함께 5ㆍ18 기념재단의 창립 선언문을 읽자.

 

광주가 다시 섰습니다. 5월이 다시 섰습니다. 위대한 항쟁정신과 숭고한 대동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조국과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한 「5·18기념재단」이 창립되었습니다. 어려운 준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창립되었습니다.
5월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이며, 채권이 아니고 채무입니다. 5월은 광주의 것도 아니고,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의 것도 아닙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80년 5월의 정신과 자세로 되돌아 갈 것을 다짐하며 가신 임들 앞에 옷깃을 여미고 섰습니다. 「5·18기념재단」이 창립되었습니다. 가신 임들이 환하고 웃고 계십니다. (원문을 윤문한 글임)

 ‘5월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라는 구절 속에 윤한봉의 아픈 진실이 묻어 있다. 윤한봉에게 5월은 무덤까지 지고가야 하는 저주스런 멍에였다. 그 오월은 광주의 것도 아니요,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의 것도 아니다. 제발 오월을 사유하지 말자. 선언문은 이것을 호소하고 있다.

재단을 설립하고 바로 뛰어든 일이 극단 토박이를 돕는 일이었다. 극단 토박이를 이끈 박효선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린 시민궐기대회를 이끈 투사요, 항쟁지도부의 홍보부장이었다. 박효선은 《금희의 오월》, 《모란꽃》, 《청실홍실》 등 20여 편의 희곡을 집필한 위대한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다. 


윤한봉은 5월 광주를 세계화하기 위해 극단 토박이 단원들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1994년 오수성 교수의 도움을 받아 탄생한 5월 심리극 《모란꽃》을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 상연했다. 다시 1996년엔 광주민중항쟁의 서사시 《금희의 오월》을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 상연했다. 토박이 단원들에겐 지옥 훈련보다 더 혹독한 과정이었다. 물론 가는 곳마다 교민들과 타민족형제들의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다. 한청련 회원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었다. 잠시 박효선의 미국방문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윤한봉 형의 주선으로 토박이는 팔자에도 없던 미국 공연을 가게 됐다. 합수란 말은 전라도 말로 똥통이란 뜻이다. 합수 형과 나와의 인연은 참 기구한 관계다. 70년대 말에 만난 우리는 처음엔 다른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문화운동의 기능에 대해 억수로 다퉜고 문화운동이 얼마나 한심한 방식인가를 귀에 닳도록 얻어들어야 했다. 그러던 중 당시 사회문제가 됐던 고구마보상투쟁과 돼지파동을 극화한 ‘함평고구마(78년)’, ‘돼지풀이 마당굿(80년 초)’를 보고서야 문화운동의 효능을 이해하게 되었다. 합수 형은 일단 불이 붙으면 발바닥에 연기가 나도록 뛰는 진짜 운동가이다. 그 두 작품을 공연할 때 온몸으로 문화운동의 기반 마련을 위해 뛰어다녔다.
기막힌 사연은 5‧18 직후부터 비롯된다. 나는 항쟁 후 여기저기 도망을 다니다가 80년도 말쯤에 서울 의 모 도피처 두어 군데에서 합수 형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입안에 쓴물이 솟구친다. 나는 어쨌든 예술물을 먹은 낭만주의자였고 합수 형은 지독한 원칙주의자였다. 얼마나 도피생활을 철저히 하는지 기상시간, 취침시간은 물론이고 똥 싸는 시간까지 정해져 있었다. TV도 못 보게 했고 밤에 불도 켜지 못하게 하는 거였다. 오로지 책과 소근거리는 대화가 전부였다.그때의 도피생활 경험을 나는 후에 ‘그들은 잠수함을 탔다’라는 희곡으로 써냈다.
아무튼 극단 토박이는 북미주 7개 도시를 건너뛰어 다니며 5월극 ‘모란꽃’을 공연했다.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DC, 시카고, 캐나다 토론토, 로스앤젤레스, 산호세 등이었다. 10일 동안 그 널따란 아메리카 대륙 7개 도시를 강행군하며 공연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지옥훈련이 따로 없었다. 


동포들과 제3세계 민족들이 우리 공연을 보러왔다. 그들은 조국의, 그것도 광주라는 지방도시에서 온 이 조그만 극단의 공연에서 눈물과 흐느낌의 감동을 얻었고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보내주었다.
‘모란꽃’ 북미주 순회공연은 5월 항쟁의 세계화라는 과제수행의 한 성과였다. 오수성교수의 얘기처럼 5월 광주는 광주만의 것이 아닌 한반도, 아니 세계 속의 5월이 되어야 했다. 토박이는 그 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진보적 연극운동의 국제적 진출이라는 면에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우리 민족극의 수준이 세계 어느 나라에 비교해서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난 그 공연에서 확인했다. 북미주 동포들의 5월 항쟁에 대한 자부심과 열의는 국내 못지않았다. 무엇보다 척박한 조건의 낯선 해외에서 조국과 민족문제에 깊은 애정을 갖고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는 재미한국청년연합 회원들의 활동에 우리는 감동 받았다. 


지금도 공연이 끝난 후 샌프란시스코의 미숀이란 한 추레한 동네를 방문했을 때의 충격이 생각난다. 제3세계 민중벽화로 온통 장식된 1백m의 골목 한 그림 밑에 쓰여진 글귀를 잊지 않는다.

- Culture contains the seed of resistance which blossoms into the flower of liberation. 

  (문화는 저항의 씨앗을 잉태해 해방의 꽃을 피웁니다.)

극단 토박이가 사무실의 임대료조차 해결하지 못해 문을 닫아야 하는 지경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윤한봉은 또 팔을 거두어 부쳤다. 사람들을 조직하고 기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모금활동을 펼쳤다. 이듬해 1995년,아담한 소극장을 다시 꾸리게 된다.

윤한봉은 해마다 치러지는 5‧18 행사에 나가지 않았다. 도청 앞 기념행사에도 나가지 않았고, 망월동 참배에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5월에 관한 강연에는 나갔다. 가끔 미국에서 한청련 회원들이 오면, 그들과 함께 망월동에 참배하러 갔다. 참배를 마친 한 여자 회원이 비닐봉지에 묘역의 흙을 하도 많이 퍼 담기에 물었다.


“미국의 마당집마다 다 있는데 또 어디다 쓸려고 그렇게 많이 담지?”

여자 회원이 이렇게 대답했다.

“회원들 결혼 선물로도 주고 아기를 낳을 때마다 축하 선물로 줄려고 그래요.”

 윤한봉은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그래, 5월은 광주만의 것은 아니지. 5월 정신을 광주에서만 계승하는 것은 아니지. 그래, 너무 절망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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