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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합수가 말하는 미주운동사2018-12-29 17:34
카테고리한청련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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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운동의 역사는 1902년 하와이로 우리 동포들이 노동력 팔러 나온 것이 계기가 됐죠. 해외미주동포사회가 형성된 것이 그 때니까. 그 때 오신 분들은 전부 가난뱅이여가지고 조국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살아왔던 분들이죠. 하루 속히 일본 놈들 밑에서 벗어나서 조국이 해방되면 돌아가야지, 농장에서 공장에서 식당에서 피땀 흘려서 한푼 두푼 벌어서 소득의 거의 반을 내놨어요. 기록을 보면 10불 벌면 5불내는 식으로 모아서 국내로 들여보내고 상해 임정으로 보내고 그랬어요

여기다가 군사사관학교를 세워가지고 목총 들고 훈련도 받고 항일 투쟁한다고 등등 그렇게 열심히 운동을 했었는데. 8•15가 되자 그것도 끝난 거예요. 여기서는 이승만이가 못된 짓을 하도 많이 해가지고 이승만이를 애국자 로 생각지 않았는데 이승만이 들어가서 설치고, 미국 놈들이 들어가 설치고 . 해방됐다는 조국이 남북으로 갈라져갖고 으르렁거리고. 또 갈린 그 속에서 으르렁거리고 맨날 학살하고 감방에 쳐 넣고 일제 때보다 더 심하고.

그래갖고 워메 우리 조국 해방됐는데 이 모양 이 꼴인가 이렇고 있는데 6.25가 터지고. 이승만이가 또 대통령 된 다음에는 미국에서 자기에 대해서 비판, 비난했던 사람들을 국내에 못 들어오게 하고. 어떻게 해서 들어온 사람들 쫓아내버렸어요. 경찰들이 잡아다가 하룻밤 씩 유치장에다가 재우기도 하고. 그래갖고 절망을 해버렸어요. “내 조국, 내 민족이 요 모양 요 꼴인가. 해방을 기다렸는데 해방된 조국이 요 꼴인가.”

심지어 하와이 같은 데서는 이승만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 찬밥 먹이고 불순세력으로 몰고. 그래갖고 좌절 해버렸어요 절망했어요. 그래서 8.15전까지만 해도 자녀들에게 너는 코리안이다, 우리 민족이 해방되면 돌아갈 것이다, 영어 쓰면 꿀밤 먹이고 우리말 가르치고 했던 부모들이 8.15 이후에 돌아가는 상황보고 절망을 해가지고 자녀들에 대한 민족교육을 중단시켜버렸어요. 너는 미국화 되가지고 잘 먹고 잘 살아라 해가지고. 그걸 1기 이민이라고 그래요. 일제 때 오신 분들, 노동자로서 팔려 오셨던 분들. 그 1기 이민의 운동의 맥이 끊겨버렸어요.

그래갖고 그 분들의 자제들도 민족교육을 등한히 하고 세월이 흘러 완전히 미국사회에 녹아서 없어져버렸어요. 그 때 오신 분들의 자녀들이 지금 3세, 4세 되는데 우리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완전히 사라져버렸어요.

지금 미주 각지에서 우리 한청련이 운동을 하고 있지만 하와이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고 거기다가 한청련을 만들라고 몇 번을 맘먹었어요. 긍께 하와이에 나한테 밥만 먹여주고 재워줄 사람만 있으면, 2,3달만 있으면 얼마든지 한청련을 만들어 낸다고요. 근데 하와이엔 한 명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없는 거예요 그 정도로 1기 이민의 운동 맥이 끊어져버렸어요.

2기 이민이 60년대 중반, 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뤄졌죠. 그 때 당시 60년대 미국이 아주 경기가 좋았죠. 그래서 저임금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이민을 많이 받아들였죠. 또 박정희 입장에서는 실업자들 해소하고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해소할 구멍을 뚫어 줘야하니까. 그것이 맞아 떨어져서 시작된 거예요.

2기 이민은 1기 이민하고 계급적으로 다르죠. 1기 이민은 가장 밑바닥, 하층계급이 왔었는데. 그리고 그 사람들은 조국을 버리고 온 것이 아니라 돌아갈 조국을 떠나왔을 뿐이었어요. 2기 인민은 계급적으로도 중간계급 이상이야. 그리고 조국을 잠시 떠나온 것이 아니라 버리고 온 거예요. 잘 먹고 잘살아보자. 이러니 민족의식이 희박할 수밖에. 미국을 천사의 나라로 천국으로 알고 온 사람들이죠.

그러다보니까 재빨리 미국화 되는 것이 생활의 어떤 신조였죠. 1기 이민들하고는 정반대였지. 심지어는 자녀들한테 같은 코리안들끼리 놀지 말라고 그러고 너는 아메리칸이라고 그러고. 아무런 탄압도 없는데 강아지 이름들 지어갖고 에드워드 킴, 발바라 이, 동티 나 해쌓고 강아지 이름들. 자기 아들, 딸보고 미녀 되라고 그래갖고 여배우들 이름 붙이고 마가레트가 어떻고. 참 한심하지. 자기이름도 바꾼 사람이 있어 나이 처먹어갖고 와갖고도. 그런 식으로 해서 민족의식이 형편없지.

그래갖고 돈들 벌고 낑낑거리고 살고 그러는데 이 2기 이민들 사이에서 운동이 시작된 것이 언제냐면 70년대 초에요. 그 이유는 박정희가 60년대 말에 3선 개헌해갖고 독재정권을 연장하려고 71년에 여러분들이 잘 아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죠. 그러고 나서 김대중이가 인기를 끌었지만 떨어져갖고 여기를 왔어요. 와갖고 돌아다니면서 정치에 꿈을 가진 사람들 김대중이 다음에 청와대에 들어가리라 생각해갖고 미리 투자해놓는 것이 유리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 정치 성향이 강한 사람들 그리고 인권적 차원에서만 문제를 보는 독재라는 그것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그런 저열한 의식수준에 머문 사람들이 김대중 씨가 온 것을 계기로 해서 하나 둘 모였어요.

그 때 당시만 해도 김대중 씨가 LA같은 데서는 강연회도 못했어요. 강연회를 추진할 사람들도 없을뿐더러 하면은 뭐 계란을 던지겠네 똥을 찌끄러버리니 영사관에서 장난해갖고 못하고 말았다고. 그래가지고 그 사람들 중심으로 해서 묶어 놓은 것이 한민통이라는 거예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출신 성분이 그래서 그런가 몰라도 간판도 더럽게 거창해. 이걸 만들었어요. 이것이 73년입니다. 그래 놓고 김대중 씨가 일본으로 갔어요. 일본으로 가서 한민통 조직 작업하다가 납치돼 버렸죠. 근데 김대중 씨가 미국에 와있는 동안에 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 나와요. 7.4 남북 공동성명. 그러고 73년 8월 8일 날 김대중이가 납치된 거예요.

그 사이에 뭐가 있었냐면 역사적인 72년 10월 17일 유신쿠테타라는 걸 일으켰죠. 그것이 더 해외동포사회에 자극이 됐죠. 나도 그것 때문에 모범생에서 운동가로 변했지만. 그래가지고 일본에서 김대중 씨가 납치되죠. 일본 지부를 결성하다가 납치됐어요. 납치된 후에 일본에서 한민통이 만들어졌어요. 그 한민통이 지금도 있죠. 미국에서는 사라버렸지만 그 때 당시만 해도 한민통 미주본부, 한민통 일본지부 이랬어요.

그런데 이제 그 때 당시에 국제정세의 변화를 한 가지만 읽어드릴게요. 뭐냐면 75년에 제30차 UN 총회에서 남북조국의 입장에서 제출한 결의안이 서로 상충되는데 통과된 거예요. 양쪽 안이 다. 그렇게 된 거는 UN이 미국의 독무대였는데 그래서 남쪽에 유리한 결의안을 미국이 항시 손써서 일방적으로 통과가 됐었는데 75년에 이런 혁명적 일이 일어난 거예요. 북을 지지하고 남을 지지하는 게 동시에 통과되어버린 거에요. 다시 말해서 세계적으로 그만큼 제3세계 세력이 커지고 비동맹 세력이 강화된 거예요. 그래서 UN을 미국 맘대로 좌지우지를 못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 계기로 해서 그 다음부터는 남부조국에서. 우리 문제를 UN에 상정을 안 해븐다고 북부조국도 마찬가지. 왜그냐면 해봤자 남쪽은 이길 자신이 없고 북쪽은 우리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야지 왜 자꾸 거기 가서 이런 입장에서 안하고.

그런데 74년 민청학련사건 그 다음에 인혁당사건 있죠. 나도 그 때 감방에 들어가서 15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는데. 그것이 국내외에서 조작이었다 항의가 빗발치고 박정희가 75년 2월 15일 2.15조치로 전부 석방을 시켰죠. 나오자마자 김지하 씨가 인혁당이 조작된 사건이라고 폭로하고 고문해갖고 만들었다고 그라고.

그러니까 미국에서 나가있던 선교사 신오트신부 하고 오글 목사. 두 사람이 막 정부한테 삿대질하고.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 사형집행을 했는데 그 사람들 장례식을 할라고 한디 경찰이 와서 장례식을 못하게 장례차를 끌고 가버렸다고. 그런께 신오트 신부랑 오글 목사랑 길바닥에 자빠져서 차 밑에 타이어 밑에 들어가블고. 그래갖고 결국 강제 출국 당해버렸죠.

강제 출국 당해 쫓겨 왔으니까 뿔따구 안나? 욕하고 막 떠들고 다니고 이런 분위기 등등에 의해서 미국에서 우리 문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동포사회에서 운동도 열기가 올라간데다가 카터가 대통령이 되면서 쿠바, 북한 등등에 대한 여행제한을 철폐했어요. 여행이 허가된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의 변화가 79년의 평양에 세계탁구선수권 대회가 있는데 미국 쪽에서 대표단을 파견했죠. 카터의 북한여행 자유화가 생기고 이런 분위기가 되면서 데탕트가 어떻고 하면서 이제 서서히 북에 대한 관심이 동포사회에서도 높아져 가기 시작한 거예요.

여기 미주동포사회에서 한민통을 중심으로 해서 인권, 민주화, 자유를 외치면서도 미국 최고, 친미, 반공, 반북적 입장에 확고히 섰었어요. 또 한쪽의각성한 세력들은 “친미, 반공을 외치면서 민주화를 외치다니 저런 바보들이 어디 있어?” 이런 입장에서 주한미군 철수, 남북통일 이런 구호를 70년대 중반부터 외치던 사람들이 또 나왔어요.

그 때만 해도 이 사람들은 단체가 따로 없었어요. 개인자격으로든 소수로 흩어져 있었어요. 임창용 박사가 중심이었어요. 그러다보니까 갑자기 동포사회에 빨갱이 소동이 벌어진 거예요. 지금도 걸핏하면 빨갱이로 모는 판에 70년대 중반에 어쨌거나 여러분들 상상을 해보세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악랄해븐 거야. 길거리 가다가도 섰어야할 판이야. 그 상황에서 운동권이 티격태격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거야. 그렇지만 통일운동을 외치는 사람들은 확신이 있으니까 신념이 있고. 무식한 새끼들 뭣도 모르고 막 그런 식으로 대들고 저쪽은 뽈갱이, 김일성 똘마니, 이런 식으로 공격하고.

그런데 서서히 통일운동 세력들이 더 강해져가. 시간이 갈수록 옳으니까. 한 쪽에서는 또 “야 이렇게 분열돼서야 쓰것냐 힘을 합해야한다.” 어쩌고저쩌고 해갖고 이 미주리 주에 있는 센트 로이스에서 77년 6월 달에 회의가 열렸어요. “하나로 합하자. 그래가지고 통일을 외치는 사람들하고 민주를 외치는 사람들하고 싸울 것이 아니라 한번 합해보자.” 모였어요.

근데 이것도 반공 친미 반독재 세력들이 먼저 주선을 딱 해갖고 자기들이 주도권 장악할 준비를 해놓고 모였어요. 그라고 회의를 준비하면서. 다 맞춰놓고 느그 와라 한 거예요. 준비할 시간도 안 주고. 그래갖고 와갖고 인제 모 호텔에서 하는데 그게 되겠어요? 통일운동 쪽은 임창용 박사를 내세우고 이쪽은 김재준 목사를 내세워요. 캐나다 토론토에 있었던 한신대를 세웠던, 기장의 원로지. 그 사람이 자유주의 신학, 진보적인 신학을 공부해 들어갖고 이제 기독교장로회를 만들었지요. 그 김재준 목사를 내세워요.

그래갖고 두 사람을 놓고 회장을 누굴 시킬 건가를 갖고 표 대결에 붙었는데 2차까지도 과반수가 서로 안 나온 거예요. 그 과정에서 싸움이 붙고 어떻고 해갖고, 합하자고 모였는데 더 깊은 골이 패어븐 거야. 그래갖고 거기서 두 개로 나눠져븟어요.

하나가 민주주의 국민연합 북미본문. 이 사람들 도대체 북미 소리 좋아하고 간판이 커. 여가 줄여서 국민연합, 이것이 나오고 또 하나는 뭐냐면 미주민주국민연합, 이걸 줄여서 미주민렵이라고 그랬어요. 요것도 77년 세인트 루이스 미주리 주에서 시작합니다. 요것도 77년입니다. 6.25날 만들었어요 기분 나쁘게들. 어쨌든 간에 이렇게 두 개로 나눠진 거예요.

어쨌던 한민통은 자기들 나름대로 유지를 한 거야. 이렇게 세 개가 됐어요. 그런데 김대중이가 납치돼갔고 연금되고 깜방에 들어가고. 이 시발 김대중이가 대통령 될 줄 알고 집에서 재우고 고기도 사다 먹이고 용돈도 주고, 호텔에 모시고 그랬는데 줄이 끊어져버렸거든.

79년에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리고 그러자 80년에 미국친우봉사회 퀘이커 모임이죠. 미국친우봉사회에서 대표단을 북에다 파견했어요. 데이빗 리스터하고 마데 리스터 부부인거지. 이 사람들이 북에 갔다 온 거지. 갔다 와갖고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놓자 미국과 북 사이에 어쩌고 글도 쓰고 그랬는데 이제 북을 갔다 오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예요. 임창용 박사도 갖다오고 그런 분위기를 타고 일본에서 79년에 ‘범해외학자 통일심포지움’이란 걸 열었어요. 여기서 미국에 있는 학자들도 이걸 많이 참가했죠. 서낙원씨 이런 사람들 등등.

81년 3월에 심장부인 워싱턴 D.C에서 ‘해외동포학자 민족통일심포지움’이 열린 거요. 통일 앞에다 민족을 집어넣어 갖고 연 거예요. 81년에.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얼마나 갑갑해 브러요. 난리가 났지. 북괴 돈 받아서 한다느니, 회의장 2층 호텔에는 북괴 간첩이 와 있다느니 난리가 난 거지. 그리고 국민연합과 관련된 사람들, 김경자 같은 놈. 그냥 막 몰아치는 기사를 쓰고 난리 장판구고 그럴 때야. 미국에서 서낙원씨, 김동수 이런 사람들이 참석했죠. 최익환 이런 분들, 최익환 박사 시애틀.

그런데 81년 11월에 난리가 났어요. 비엔나에서 국가해외동포기독자들과의 대화 그래갖고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에서 만난 거예요. 북쪽동포들하고 미주동포들하고가. 유렵동포들 참여하고. 그러니 난리가 나븠지. 그래갖고 거기서 아리랑을 부르고 뭐 도라지를 부르고 눈물을 흘리고 뭐 통일이 어떻고 떠들고 어쩠고 하니 이 반공광들이 잠이 안 와블지. 똥 싸나 앉으나 이가 갈리고. 거기 갔다 온 사람들 막 몰아친 거지. 거기 간 사람들이 또 주책없이 우리 최길한박사가 한바꾸 돌아다녔지.

또 내용이 ‘자주, 반미, 미국이 나가야한다, 주한미군 철수해야한다’부터 시작해서 북과 어째야 한다느니 이런 소리니까 거기다가 비엔나에서 남북 동포들이 만나 버렸네. 미국에 살지만, 북쪽 방문한 사람들이 그전까지만 해도 몰래 가고, 갔다 와도 갔다 왔다는 소리 않고. 뭐 싹 퍼지지 알사람 다 알지. 그랬는데 ‘나 간다!’ 그라고 막 가븐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거야. 최덕신이니 이런 사람들. 이제 막 터진 거야 봇물 터지듯이.

근데 80년대의 이 변화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배경을 하나 이해해야혀. 80년 5월 광주를 잊지 말아야혀. 80년 5월 이전에 또 잊지 말아야혀. 10월 26일. 10.26 박정희가 죽었잖아요. 거 민주화됐다고 춤을 추고 난리 났어요. 김대중이 대통령 되븐 거야. 어느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냐. 박정희가 죽었다고 하니까 이쪽에선 축하 데모가 벌어진 거야. 운동에는 참여 안했던 사람들도 박정희 죽었단께 기분이 좋아갖고 속으로 미워했던 사람들이 만세! 민주화 어쩌고 같이 데모대에 끼니까는 다 된 밥에 숟구락 들고 달라들어?

요라고 못 오게 막어. (하하하하) 숟구락 들고 나온다고. 그래가지고 국내로 들어간 목사 김상일있지. 김상일 박사가 그 데모대에 있는데 ‘언제부터 운동했다고 여기 나오냐고’ 난리가 난 거야 인자. 이 사람들도 자기들도 국내에 들어가서 이제 한 자리 하는 거야. 그래갖고 보따리 쌀 준비하고 난리가 나븟어. 이제 들어간다고. 저번 선거 때하고 똑 같았다고. 상상을 해봐요.

그런데 5.18이 몰아쳐븐거야. 이 사람들은 날아가 떨어져븐 거죠. 워메 또 끈 떨어졌네. 이제 청화대가 캄캄해져가지고 안 보여븐 거지. 푸른 기와가 까만 기와로 보였지. 근데 절망 속에서 그 절망을 극복하려는 과격하고 진보적인, 힘이 나오게 돼 있어. 역사에서는 절망적 과격성이 있는 거예요. ‘예끼 느그들 이왕 배린 몸’식으로 그 절망에서 비롯된 과격성으로 막 북에를 가븐다던가 통일을 외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자연발생적으로. 필연적인 거예요. 예를 들면 평화적으로 뭣 해보자 시위 0나게 했는데 총으로 쏴서 많이 죽여븟어. ‘평화? 시바 앞으로 평화가 어쩌고 떠드는 시키들 다 때려죽인다’는 식으로 ‘나는 칼, 총’ 이렇게 되는 경우가 많던 거예요.

광주 충격이 그렇게 가해지면서. 그래가지고 반공 요 사람들의 기지가 팍 꺾인 거예요. ‘예 0돼라. 시키들아 분단 상황이 지속되고 미국이 개입되어 있는데 웃기는 소리하지마. 민주? 웃기는 소리하지 말어.’ 논리적으로 저쪽이 깨지고 이쪽이 정당성을 얻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서 갑자기 자생적인 통일운동 세력이 나오고. ‘미국이 우리 편 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뭐? 들쥐들 따라가듯이 전두환이 똥꾸녁 빨고 따라갈 거라고? 나는 들쥐 아닌디? 나는 로마시민인지 알았는데 0도 아니잖아’ 이런 식.

그래가지고 통일운동 쪽으로 돌아서고. 그런 그 절망 속에서의 새로운 탈출구를 찾으려는 몸부림으로 통일운동 쪽이 활발해 진 거예요. 그러면서 또 이산가족들. 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이 나오자 ‘이거 통일되는 거 아닌가’ 카터 여행 자유화가 나와도 ‘나는 미국 로마 시민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국에 친척이 있는데 뭐 들어가면 또 감방에 가는데’하고 못가고 주춤하고 그랬던 사람들이 ‘워메 돌아가는 본께 내 죽기 전에는 통일 어렵겠다. 죽기 전에 한번 우리 어머니, 우리 형제 살아있을 때 얼굴이나 한 번 봐야지’ 해갖고 이산가족들이 그 절망 속에서 못 기다리겠다 이거지. 줄서서 기다리고 나까지는 표가 있겠지 했는데 표가 있니 없니 곧 떨어진다는 소리가 나면 새치기 안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식이 된 거예요.

통금시간 됐을 때 택시고 0랄이고 싸움해서 서로 타블라고 하듯이 막 가기 시작인 거예요. 갔다 오면 빨갱이로 몰고 난리가 난 거죠. 이런 상황이 배경으로 작용을 해요. 이런 통일 운동이 막 비엔나에서 만나고. 이런 배경하고 무관한 게 아니에요. 5.18하고. 이해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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