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애 선생님 구술 녹취록 □ 개요 ○ 구술자 : 유정애(한청련 활동) ○ 면담자 : 안재성, 이영선 / 정리 : 임명규 ○ 구술일시 : 2016년 1월 21일 3시 ○ 구술장소 : 서울역 레스토랑 면담자: 먼저 한청련 초기부터 편하게 선생님 기억을 말씀해주기 바랍니다. 구술자: 저는 메사추세츠쪽에 있었어요. 보스턴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스터디 그룹을 했어요. 쉽게 말해서 뉴잉글래드쪽이라고 하거든요. 이후 스터디 그룹이 한청련으로 바뀌었고요. 면담자: 그럼 선생님이 제일 처음 시작한 것은? 구술자: 미국 코네티컷에서 만났어요. 미국 지도를 보면 이해가 쉬워요. 코네티컷이 뉴욕하고 가까워요. 저는 메사추세츠에 있었고 코네티컷에서 주로 만났는데, 여기에 이지훈씨랑, 최관우씨가 있었어요. 최관우씨가 개인 주택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집에서 주로 모였어요. 거리가 다 3~4시간씩 운전하는 거리였어요. 그 거리를 매주 모여서 달려오는 거죠. 면담자: 정확하게 몇 년도인가요? 구술자: 83년도 쯤 일 거에요. 당시 저는 메사추세츠대학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으면서 합류를 하게 되는 거죠. 저 같은 경우 평화운동과 여성운동 쪽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무지했어요. 우리가 한청련을 결성하게 되었을 때, 물론 합수형님이 있어서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거기에는 벌써 이런 것들에 대한 자각들이 있었다는 걸 말씀 드리고 싶은 거에요. 광주민중항쟁을 보고 거기서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합수형이 나타난 거죠. 흩어져서 아픔을 삭히고 있을 때 이 사람이 나타나서 조직으로 묶어 준 거죠. 최근 지난 16일 토요일 날 미국에서 최관우씨랑 밥을 먹으면서 지난 이야기를 했어요. 합수형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었냐. 삶의 방향을 정리해준 사람이 아니었나 했었어요. 면담자: 선생님은 언제 미국 가셨어요? 구술자: 저는 16살 때 미국 갔습니다. 합수형 만났을 때는 20대 초반, 대학 졸업 후 얼마 안 됐을 때었고요. 아마 83년에 만난 것 같구요. 면담자: 신소하씨가 초기부터 만난 사람이라 초기 이야기를 해 줄 것이라고. 구술자: 초창기 멤버들 만나세요. 최관호씨는 뉴욕에 있고, 워싱턴 디시에 서혁교가 있고 이난희 교수는 UCLA에 있고. 정기열 목사가 당시 학생으로 있었기 때문에 모임을 학교에서 2박3일 했어요, 아는 사람들 집에서 숙박했는데, 그 때 처음으로 합수형을 만났어요. 충격이었어요. 저는 한국사람들과 교류가 없었는데, 갑자기 시골 사람 같은 남자 하나가 나타나서. 백팩 하나 들고 나타나서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 하는 거에요. 그래서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때까지 저 같은 경우는 접해온 사람과 틀린 분류의 사람인거죠, 모든 게. 면담자: 당시 연결시켜준 사람은? 구술자; 연결시킨 사람은 시카고 쪽 이난희일 거에요. 뉴잉글랜드 쪽은 제 생각에 한호석씨가 연결해서 오지 않았나. 그 분이 유니온신학대학에 있었는데, 그리고 강완모씨는 뉴욕에 있었고. 김난원은 뉴욕에 있었고. 강완모랑 합수형이랑 연결되었을 거에요. 학연이 있었던 사람들이 스터디 그룹을 만든 거죠. 면담자: 그룹 규모는? 구술자: 스터디 그룹은 처음에 15명 정도가 되었던 것 같아요. 뉴잉글랜드는 다들 지식인층이었어요. 면담자: 서혁교 선생님은 나중에 사이가 좀. 구술자: 분란이 있었지만, 합수형에 대한 애정은 의심하면 안돼요. 어찌되었든 우리는 합수형 때문에 인생에 많은 것을 빚지고 살죠. 저는 초창기 멤버이면서 일찍 조직을 나온 케이스에요. 뉴잉글랜드 스터디모임이 한청련 지부가 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하나는 서명을 많이 받았어요. 보스턴 하버드대 앞에 전두환 비판하는 서명 같은 걸 많이 받았어요. 퍼블릭 라디오에서 인터뷰하고 5.18 학살에 대해를 설명하고. 제3세계 연대운동을 많이 하고. 그러다 워싱턴 디시에서 코리아 인포메이션 리소스 센터를 시작했어요. 기본적으로 로비를 할 수 있는 그룹이 필요한데, 1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입장을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면, 워싱턴에 센터를 만들자. 민족학교와 다른 워싱턴 상황에 맞게 정보와 상황을 알리고 제3세계 운동그룹과 연결을 하는 센터로서 작동을 하자. 그래서 센터를 워싱턴에 만들었어요. 그걸 자세히 아는 사람이 서재정 교수에요. 센터를 구하는 역할을 했고. 처음으로 “코리아 리포트”를 그 사람과 제가 같이 냈거든요. 먹는 거는 동포나 어르신들이 가져다주고 센터에서 잠을 자요. 센터를 구해서 좋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홍등가 안에 있던 사무실이었어요. 뉴욕에서는 UN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LA는 동포사회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워싱턴은 정계 쪽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뉴잉글랜드는 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했어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과 맞게 활동했거든요. 5.18이 계기가 되어서 자각이 있었지만, 흩어졌던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같은 장소에서 공감하고 교류할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벅찼을 거에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도 큰 힘이 되었고. 힘들었지만 내 삶을 다시 살아도 그 경험은 바꿀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굉장히 열심히 살았고 그렇게 보람되고 벅차게 살 수 있었던 게 합수형에게 가장 고마운 것 중에 하나에요. 합수형이라는 한 운동가가 아니었으면 흩어져 있던 우리가 그렇게 모일 수 없었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운동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도 인연에서도 그 사람을 만난 게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만들어준 사람인 거죠. 이리 저리 갈지 몰라서 헤매던 시기에 가장 좋은 길을 제시해준 사람이 합수형이 아닌가. 면담자: 지금 이때는 주로 민주화 이야기를 할 때? 통일 이야기는? 구술자: 맞죠. 이때는 한국 민주화문제를 주로 이야기한 거에요. 물론 통일문제 이야기도 했지만 당시 중심축은 5.18이었어요. 면담자: 언제부터 통일문제는 나왔죠? 구술자: 초기에는 안 나왔구요. 사람이 모이게 된 중심축은 518이었어요. 아픔과 상처와 각성. 그 사람이 가진 상징성이 있잖아요. 그 사람이 가진 인적 자원이 있고요. 한청련을 전국조직으로 만드는데 자금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펀드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상용형이 날 데리고 원주에 김지하를 만나서 난을 쳐서 줬고 그 그림을 받고 미국에서 판매하고 또, 광주에서는 홍성담 선생 만나서 판화를 받아서 가지고 가고. 면담자: 그 자금 만드는 일에 선생님이.. 구술자: 네, 제가 그랬죠. 당시 한국에 와서 몇 주씩 있었을 거에요. 당시에는 목숨을 내놓으라고 해도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러 온 사람들이 자기 공부를 미루고 하루에 12시간 일하고 밤에 나와서 공부하고 일주일에 한번 씩 서명을 받으러 다니고 이런 것들은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아요. 가슴이 시켜서 하는 일인데요. 광주 같은 학살을 상대로 싸운다는 자긍심이 있었어요. 먼가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냐. 다 자비로 하는 것이었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랬어요. 면담자: 그럼 한청련이 내세운 강령은 어떤 게 있었을까요? 구술자: 있었어요. 기억은 못하는데, 강령을 만들었고 공부를 했고 우리가 전국적인 회의를 할 때, 저는 뉴잉글랜드 대의원이었는데, 나가서 토론을 하는 과정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직을 어떻게 이끌고, 의사결정은 어떻게 하고 등등 이런 게 쭉 있어요. 근데 그게 그 서혁교씨가 많이 모으는 사람인데요, 한번 물어보세요. 일단은 나랑 서재정씨가 나오고 난 다음에 코리아 인포메이션 리소스 센터에서 내가 나온 다음에 들어온 사람이 서혁교이기 때문에. 서혁교랑 부부인 심형주, 코리아 인포메이션 리소스 센터가 설립될 때 실질적으로 했던 사람이 서재정교수에요. 이 사람한테 시카고와, 워싱턴 이야기를 들으면 되요. 그 다음 서혁교와 심형주 이야기를 들으면 초창기 5년 6년이 다 이해될 거에요. 그 센터는 운동사적으로 최초의 일이니까 의미가 있는 거에요. 면담자: 선생님은 몇 년생이에요? 구술자: 저는 58년생이에요. 면담자: 무슨 공부? 구술자: 조기유학으로 간 케이스에요. 박사학위는 역사사회학 쪽이에요. 20년 동안 운동조직에서 일했어요. 퀘이커쪽인 미국친우봉사회도 그렇고 3세계 운동권 자금을 대주는 역할을 하는 단체에서도 일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면담자: 합수선생님과의 국제연대와 관련 있네요 구술자: 제가 했던 파트가 합수형이 말했던 3세계와 연결.. 그게 원래 하는 일이고 한청련 일도 같이 하는 거죠. 메세추세츠 주립대학에서는 3세계 여성운동과 타민족의 연결을 했죠. 직업이 그런 거에요. 저희는 여건이 좋았죠. 저 같은 경우는 적어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했죠. 면담자: 계속 한국 사신 거에요? 구술자: 혼자 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오빠들이 미국으로 오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한청련 멤버 서재정교수랑 결혼을 했고. 남편이 서재정교수에요. 재미있는 게 서혁교랑 심형주 경우는 아버지끼리가 친구인 경우에요. 그러다 같이 뉴욕에 들어와서 활동을 하다가 결혼을 한 경우에요. 우리 같은 경우는 활동을 따로 하다가 만나서 결혼한 케이스구요. 면담자; 합수형의 단점은 없었나요? 구술자; 합수형이 처음부터 독단적인 측면이 있었어요.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합의한 결론이 있는데, 합수형이 듣고 그게 아니다라고 하면, 뒤집어져요. 그런 일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누구는 합수형을 옹호하고 누구는 더 비판하고 이런 문제들이 꽤 반복적으로 있었어요. 매력적이고 대단한 운동가이기도 하지만. 독단적인 면이 있었고 그에 대해선 비판이 있었죠. 그렇지만 그걸 같다가 뒤집어 놓지는 못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떠난 것도 많아요. 대화가 안 되고 내적인 갈등이 심해지니까 나는 이 노선을 계속 갈 수 없다. 나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인데 형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그 노선으로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면담자: 떠난 시기는? 구술자: 내가 떠난 게 89년도 나간 거죠. 5~6년 정도 활동 한 거죠. 한청련이 무슨 종교집단 같다고 느꼈던 게 정기열 목사의 경우 내가 떠나고 나서 날 괴롭히고 날 정신병원에 보내겠다고 협박했어요. 그러면서 ‘넌 조직을 떠났는데 누가 네 말을 믿겠느냐’. 그 때 완전히 조직에 남아있던 감정을 완전히 버렸죠. 그러니까 떠난 사람을 지속적으로 괴롭혔어요. 그걸 합수형이 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전화해서 쌍욕도 하고 충격을 먹은 게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운동하는 건데 과정은 결과일 수밖에 없어요. 그 과정에서 그렇게 까지 공격을 당했을 때 그 놀라움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놀라운 거에요. 인간이 저렇게 한솥밥을 먹고 목숨도 내놓겠다고 했는데 조직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내가 배타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이런 게 운동이라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조직에서 나왔다는 것 하나로 내가 적이 되고 직접적으로 전화해서 괴롭히고 그럴까. 내가 가야할 길이라고 정리했지만, 특히 초창기 한청련 안에서 여자가 많았어요. 그게 5, 6년 지나고 나면서 여자가 별로 안 남았어요. 합수형이 가진 좋은 점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었지만, 근데 안 좋은 것은 “가부장적인 태도”였던 것 같아요. 면담자: 나오기 전에 결정적인 내용은? 구술자: 결정적으로 달라진 내용은 뭐였을까요? 가슴 아파서 기억이 잘 나진 않아요. 면담자: 정치적인 것은 아니구요? 구술자: 정치적인 노선의 이유도 있었고요. 북에 대한 생각이 있었을 거고. 예를들어 레드 콤플렉스를 없애기 위해서 북의 테잎 같은 걸 돌려보고 그랬거든요. ‘피바다’같은 거. 합수형의 입장에서는 레드콤플렉스를 없애기 위해서 남북관계를 직시하고 북에 대한 편견을 없애야 하는데, 이게 가장 힘든 작업이잖아요. 어느 측면에서는 북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조직 운영 방식에 대한 것이었어요. 가부장적이었어요. 그룹 별로 정보가 선별적으로 돌아가요. 인그룹이냐 아웃그룹이냐에 따라. 저는 기본적으로 퀘이커도이기 때문에 평등한 걸 추구하는 방식이어서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면담자: 그건 잘못이죠. 내 보기엔 북에 대한 명확한 입장이 있던 것 같진 않고. 북도 아니고 남도 아니고 그래서 주사파한테 비판받은 거 아닌가요. 구술자: 또 하나는 제가 가진 불만이었는데, 세계는 변화하는데, 85년 이후에 미국에서는 동서가 뒤죽박죽되고 있다는 게 뉴스에 다 나오는데, 우리 조직은 아직까지도 냉전의 사고방식에 붙들려 있는 거요. 제가 답답했던 거에요. 면담자: 아주 치명적인 문제라고 봐요. 운동가가 사회주의/자본주의/사민주의 문제에 관한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하는데,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를 구분해야하고. 구술자: 그렇죠. 또 문제가 된 게 동포를 어떻게 볼 것이냐. 내가 있을 때만 해도 기본적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체제였거든요. 소위 나 같은 1.5세대. 적당히 한국과 미국을 이해를 하죠. 그 문화는 합수형 중심의 문화인데, 나 같은 사람이 논쟁을 하면 100% 내가 떨어져 나가는 거죠. 왜 동포중심의 운동에 동포는 없고 한국만 있느냐, 이런 문제제기가 그 전에도 있었어요. 우리가 비판하기도 했지만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죠. “내가 죽으면 난 어디에 묻힐 것인가?” 물으면 동포들의 90%는 미국에 묻힐 거란 거죠. 그렇다면 미국 안에서 진보적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틀을 만들어 줘야하는데, 우린 도구로 쓰이는 것이냐 하는 측면의 문제가 있었죠. 면담자: 그럴 수 있겠네요. 자기 존재하고 자꾸 괴리가 생길 수 있겠네요. 구술자: 또 다른 문제가, 한국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와서 물을 흐려놓고 가는 거든요. 저는 그 사람들이랑 합수형이 같은 부류는 아니라고 봐요. 많은 경우에는 운동하다 온 사람들이 폼 잡고 가버려요. 또 다른 사람이 와서 하면 ‘저 사람 몇 년하다가 갈텐데’ 하고 동포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저는 그게 궁극적으로 정체성의 문제라고 보는데,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임정시절의 민족과 2000년대 민족이 틀리죠. 근데 80년대 중반 후반의 그 격동기에 우린 그런 고민이 없었던 거죠. 면담자: 그럼 결혼은 언제? 구술자: 87년도에 결혼 했어요. 북치고 장구치고 하면서. 제 위로는 강완모 김난원 하고 바로 몇 달 후인지 아닌지 기억은 안나지만, 서혁교 심형주가 했고. 장광선 여동생하고 누구하고 결혼하고. 그 다음에 저희가 결혼했고. 면담자: 합수형이 귀국할 시점에 연락은? 구술자: 몰라요. 이후 한국 운동하고는 완전히 끊어버리고. 개인적으로만 아는 사람 연락하고. 미국 운동권 안에서 저는 3세계운동단체 지원하는 쪽으로 일을 했고 그러다가 합수형이랑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하게 된 게. 제가 대학원으로 돌아가서 공부를 하겠다 생각을 한 게 2007년인가요? 돌아가시기 직전에, 무안에 있을 때, 제가 신문을 읽었는데 기사를 보다가 들불기념사업회 인터뷰가 나오면서 건강이 안 좋다는 기사를 보고 기자한테 연락을 했어요. 합수형한테 전화를 했어요 20년만에. 형이 놀라서 받더니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게 그렇게 오랜만에 연결을 했는데도 어제 만났던 사람인 듯이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어요. 끊고 나서 어떻게 어제 헤어진 사람같이 대화가 다시 이렇게 이어질 수 있을까. 한편으로 기쁘고 아련하고. 진작할걸 그런 생각도 들고. 아프다니까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구요. 이 사람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꼭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하고. 형이 살아온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하고 싶기도 했고. 합수형이 우리 삶에 있어서 존재감 같은 것을 저는 이야기해주고 싶었어요. 면담자: 소화언니는 언제 알았어요? 구술자: 소화는 결혼한 것도 몰랐고. 2013년 여름에 미국학자와 한국학자가 평화기행을 했어요 저도 거기 멤버로 5.18재단이랑 연결을 하는데 형이 묻혔던 신묘를 처음 갔는데 거기서 서재정교수도 있었고 다른 친구도 있었는데. 그 친구랑 셋이서 묘지에 절을 했어요. 저는 마음이 안 좋드라구요. 5.18재단 이사장님이 부인을 만나보겠냐고 그래서 식당으로 이동을 하는데 그때 저는 경희라고 전혀 생각을 못한 거죠. 극적인 상봉을 한 거죠. 그 친구 보니까 마음도 아프고 만감이 교차하고. 네가 혼자되기는 너무 젊고 어떻게 형이 너를 두고 떠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하고. 면담자: 코리아 인포메이션 리소스 센터가 미국 내에서 평가된 것들이 있었나요? 공식적인 연구나 3세계 운동이 정리된 자료 안에서 그 센터가 평가된 부분이 있나요? 구술자: 저는 그 부분은 모르고 학자들이 잘 알거에요. 캘리포니아에 있는 학자도 이걸 인터뷰하고 싶다고 하긴 했는데 들리는 이야기는 없어서. 면담자: 선생님께서 3세계 활동을 했는데, 그 센터에 대해서는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지. 구술자: 미미했죠. 다른 곳은 훨씬 잘되는 곳이 있었는데, 다만 우린 상징성이 있었고. 코리아 레포트를 만드는데 둘이 밤새고 근데 다른 3세계 운동 중에도 그 정도도 못하는 것이 많았거든요. 나는 상징성이 크다고 생각해요. 시작의 의미가 있는 거고 지속할 수 있었다는, 정부에서 돈을 받는 것도 아닌 자원봉사를 하면서 일했던 자부심도 있었고. 그 홍등가에서 무서워서 나가지도 못하는 거에요 밤에는.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가 먼가를 시작한 거에요. 이건 개인이 아니라 우리 동포가 도와서 이 정도 했다는 자부심 그런 것들.. 그때 했던 시도들을 보고 어느 정도까지 우리가 해왔다는 외침이 있었다고 보고. 근데 이건 연구하는 사람들이 봐야 할 거에요. 면담자: 코리아 레포트는 언제까지? 구술자: 서혁교가 알 거에요. 면담자: 제가 만나 본 분들 중에서 유 선생님은 굉장히 이성적인 분이세요. 다른 분은 굉장히 감정적인 쪽인데. 의미는 의미고 상징성은 상징성이고 한계는 한계고. 잘한 건 잘한 거고 단점은 단점이고 그런 걸 명쾌하게 써줘야지. 위대하다고 모시는 분들이 있어. 구술자: 그렇죠. 난 참. 합수형이 소설가가 되었으면 대성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쉽게 풀어서 사람들의 가슴을 충만하게 만드는 비범한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하고 만나면 두 시간 있으려고 했는데 24시간 있게 되고. 굉장히 어렵고 복잡하고 어렴풋한 걸 쉽게 풀어내버리니까. 그니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근거림은, 모르는데 대한 두려움을 동반하는데.. 아주 적당히 잘 조절을 했으니까 합수형 같은 사람이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아주 좋았죠. 사투리가 또 한 몫을 했을 것이고. 한국에 대한 채무가 있었고, 정통성이 있기 때문에.. 면담자: 교회 다닌 사람은 많았어요? 구술자: 네 그랬죠. 뉴욕 난원이도 목사였고, 한호석도 목사였고 정기열도 목사였고 시카고도 스터디그룹이 있었는데, 그것도 목사중심으로 이루어졌거든요. 각성된 사람이 있었고 달변이었고 뉴잉글랜드 쪽에서는 이지훈씨 아버지가 목사였구요. 우리가 기독교에서 자란 사람이 많았고 오히려 필라델피아에서는 기독교 쪽 사람이 없었어요. LA는 미국 내에서 진보운동하는 친구들이 초창기에 민족학교 만드는데 그 친구들이 다 한 거에요. 이재화, LA, 샌프란시코 등 좌파운동을 하는 친구들이 도와서 민족학교를 세운 거죠. 생각을 해보세요. 망명을 온 사람이 영어도 못한 사람이 혼자서 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죠. 운동했던 친구들과 좌파에 있는 친구들이 해줬기 때문에 그런 거죠. 이후에 이 친구들이 하나씩 떨어져나가죠. 그 전에 이미 운동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면담자: 교회는 다른 것이 누구를 믿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죠. 메시아 같은 의존하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 예를 들어 최용탁, 백도사 같은 사람들. 초기에 기억나는 교재는? 구술자: 그 교재들은 교재들이 뒤저 보면 어디 있을 거에요. 주로 현대사에 대한 것이고, 기억나는 것은, 시작은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관을 형성시키는 작업 이후에는 바로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와다 하루키, 케빈 맥코맥.. 그리고 군비 예산 쪽으로 쓴 글들을 쭉 읽죠. 기본적으로 한국 운동권에서 1학년들이 하는 교재로 영어로 된 교재를 주로 썼죠. 나중에는 온갖 운동권 서적을 사서 날랐거든요. 신촌에 독수리 다방 옆 알서점에 가면 책을 이만큼씩 사서 나르고. 면담자: 윤한봉을........ 구술자: 특히 윤한봉이 가진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그 사람이 가진 결벽증이 그 사람을 지켜준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그 결벽증을 알기 때문에 저 같은 경우는 개인적으로 신뢰를 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자신의 머리로 움직이긴 보단 신념과 가슴이 통일이 된 사람이에요. 굉장히 드문데.. 그런 나름의 결벽증이라는 형태가 나타나긴 했지만, 그게 저 사람을 지켜주겠다. 그래서 쉽게 변할 사람이 아니다. 만약 그 사람이 변한다면 진짜 불가항력의 요소가 있는 거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면담자: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서는 . 구술자: 그렇죠. 통화 이후에 얼마 안 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진짜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이 인간이 잡초 같은 인간이라서 그 힘으로 극복할 거야”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진짜 충격이었고.. 그래도 이제 조금 위안이 된 것은 내 입장에서 마지막에 나름대로 내 입장에서 화해할 수 있었다는 게, 이기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좋은 사람 가기 전에 내가 한 가지 해결해준 게 아닐까하는.....마음이 참 아팠죠. 젊은 사람인데. 분명히 저 사람의 심장이 쪼그라드는데 나도 일조를 했을 거야, 그런 생각도 들고.. 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마음이 무겁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그런 거였던 것 같아요. 나중에는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잘 가시라고. 훨훨 날아서 잘 가시라고 남을 위해 평생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살았으니까, 면담자: 윤경자 선생님이.. 구술자: 너무 잘 알죠. 제가 한국 갔을 때 머물렀으니까. 첨에는 사람들이 내가 합수형하고 결혼할 사람이라고 잘못 알았던 것 같아요.. 면담자: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진 걸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구술자: 저는 가끔 일을 하다가 합수형이 떠오르는 때가 있는데, “이 사람이 정말 질긴 사람이네” 그 사람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인 것 같고.. 나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 가끔 형상처럼 나타나서. 그런 걸 생각을 할 때 이 사람의 삶이 값진 삶이었고 내 삶에 녹아나는 그 사람의 이상이랄까.. 그런 면에서 기념사업회에서 선봉에 서서 하는 역할이지만, 보이지 않게 하는 거니까. 잔잔한 파도가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기념사업회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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