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숙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김희숙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5일 ○ 구술장소 : 미국 뉴욕 민권센터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 처음에는 공부를 하고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셨나요? 구술자 : 여기서 뼈를 묻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진짜로. 면담자 : 처음에는 학교를 입학을 하셨나요? 구술자 : 로스엔젤레스 커뮤티니 칼리지(Los Angeles Community College)라고 갓 이민 온 학생들이 가는 2년제 대학이에요. 거기서 ESL을, 처음 영어를 시작 하고. 미국에서 살아가는 게 그렇게 쉽지 않잖아요. 일을 했죠, 저두. 학교는 한 두 시간 듣고 나머지는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고. 다음에는 큰 마켓이 있었어요. 거기 캐쉬어로 들어가서 풀타임으로 일했어요. 주말에는 60시간씩도 일하고요. 거기서 친구도 사귀고 돈도 벌면서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고, 놀러 다닌 것이 끽해야 식당가서 밥 먹고 얘기하고 바다 좀 보고 이런 건데. 그랬는데 학교에서 누가 반핵 서명을 받고 있드라구요.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서명 운동을 받고 있드라구요. 근데 반응들이 안 좋을 거 아니에요. 특히나 한국 학생들은. 이런 걸 여기 와서 왜 하지? 너무 신기해가지고 서명을 해주면서, 궁금한 거죠, 어디서 나왔냐? 왜 이렇게 하냐? 이렇게 하다가 한청련을 만나게 된 거죠. 면담자 : LA 처음 오셔서 집에서 식구들하고 다니셨나요? 구술자 : 예, 그때는 저두 일하고 동생은 중학생이었으니까 일을 안 하고. 엄마는 바느질 공장 다니시고. 같이 일하면서 살았죠. 면담자 : 대학 내에서 반핵 서명을 받고 있는 사람을 봤을 때 그때 처음으로 한청련이라는 거를. 구술자 : 알게 됐죠. 면담자 : 누군지 기억나시나요? 구술자 : 아, 안동현씨라구요. 면담자 : 그 이야기를 듣고 직접 좀 찾아가셨나요? 구술자 : 한청련 회원 몇 분들이 그때 LACC(Los Angeles Community College)를 다니고 계셨어요. LACC 안에 풀빛이라는 독서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때 김갑송씨도 계셨고. 풀빛에 가서 책도 같이 보고 토론하는 독서 모임이었으니까. 한청련 활동이 있으면 도와드리고 이랬죠. 당시 저는 미국 생활 하면서 풀빛 정도로만 만족하고 있었어요. 바쁘게 살고 있으니까 풀빛 이상의 활동은 할 수 없었죠. 면담자 : 풀빛이라는 써클 모임은 독서 토론 모임이었나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건국대 다닐 때 만들었던 독서모임과는 달랐나요? 구술자 : 역사 학습을 하는 거는 똑같은데 훨씬 클로스드(closed)된 상태였어요. 누가 이 모임에 있는지 얘기해서 안 되고. 풀빛이 공부만 했던 건 아니에요. 한청련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거를 같이 한 거예요, 반핵 슬라이드 쇼를 학교에 가져와서 한다든지, 유연복씨라고 민중 판화가가 오시면 LACC에 있는 오디토리움(auditorium)을 빌려 판화를 전시한 거죠. 면담자 : 자연스럽게 한청련 활동을 하게 되었네요. 구술자 : 그때는 한청련 회원으로 한 건 아니었죠. 뭐, 좋은 일이니까 같이 하자 이렇게 된 거죠. 면담자 : 풀빛이라는 독서모임을 같이 했던 분들은 6,7명 정도 되나요? 구술자 : 예, 저는 다 기억해요. 안동현 선배, 김갑송 선배 두 분은 학교를 안 다녔으니까 나가고 그 담에 저하고 황정아라는 친구가 있었고요. 그 다음에 김창, 김상범 김창현 다음에 이희재, 한 일곱 명 정도 있었어요. 면담자 : 한청련에는 언제 가입을 하셨나요? 구술자 : 90년에 가입했어요. 면담자 : 어찌 보면 늦게 가입을 했네요? 구술자 : 한청련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어요. 내 인생을 확 바꿔놓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계속 회원 가입을 권유받았는데 안 한다고 그랬었어요. 그때는 남자친구랑 헤어질 생각을 하고 들어갔어요. 그런데 남자친구가 미국에 오게 됐어요. 면담자 : 사귀셨던 남자친구은 누구? 구술자 : 그 친구가 문유성씨에요 (웃음) 면담자 : 선생님 때문에 미국을 들어오신 건가요? 몸을 핑계로... 구술자 : 두 개 다죠 (웃음) 면담자 : 그때 주로 활동했던 내용들 좀 기억나시나요? 한청련이 어떤 조직이었는지요? 활동 내역이라든지 그 안에 소속되어 있는 인물들, 그리고 성향들 그런 것이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 90년에 여러 문화 활동가들을 초대해가지구 미주 순회를 했죠. 한청련은 학습을 굉장히 강조하는 단체였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꼭 학습을 했어요. 그 속에서 배우고 토론하고 그러니깐 통일성이 강했고요, 단결력이 강했어요. 조직의 풍이라는 게 있는데. 윤선생님은 삶에서의 실천을 강조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마당집 안에서도 한청련 안에서도 그런 풍을 굉장히 강조하셨어요. “내가 바뀌지 않는데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느냐. 설거지 같은 걸 해도 안에만 쓱쓱하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데까지 끝까지 해야지 운동가지.. 설거지는 개판으로 하면서 나가서 사회 바꾼다 그러면 누가 너를 신뢰하겠느냐.”라는 게 윤선생님의 지론이었죠.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회의 때 말만 많이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삔들바우’라고 굉장히 싫어했어요. 말만 해가지구 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면서 삔들바우가 발을 붙이질 못했어요. 소신껏 발언하고 소신껏 일하고가 굉장히 강조가 되고. 합수 형님은 검소하게 생활하려고 노력했죠.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종이 쓰는 걸 보고 굉장히 많이 놀래요. 휴지나 종이를 막 버리고. 마당집은 달랐죠. 꼭 이면지를 쓴다든지 화장지 휴지도 아껴 쓰고. 한청련이 대외적인 거 이외에도 내 자신을 바꾸려고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더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느냐 저는 생각을 해요. 면담자 : 그때 한청련에서 주로 중점을 뒀던 게..... 구술자 : 그 당시에는 민족 민주 운동이라고 표현했잖아요. 미국의 활동을 민족 민주 운동의 지역운동으로 규정했어요. 그전까지 해외 운동이 어른들 위주였고, 젊은이들은 독립적인 역할을 못했죠. 합수 형님이 그거를 바꾼 거요. 운동이란 주체적인 것인데 왜 종속적으로 규정을 하느냐. 합수 형님은 외교연대운동을 굉장히 강조했어요. 그래서 제3세계운동과 연대를 하고. UN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라든지 워싱턴 DC에 가서 백악관 앞에 가서 시위하는 활동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많이 했죠. 미국 생활이 힘들고 빡빡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국내의 양심수 지원활동이라든지, 광주 수난자 돕기라든지. 하루에 1불씩 한사람이 해가지고 그걸 갖다 모았어요. 그 기금은 주로 조국 운동을 지원하는 기금으로 썼어요. 면담자 : 지금은 이민자 권익 활동을... 구술자 : 저희가 80년대부터 쭉 그렇게 해오다가 91년경 북한이 유엔에 가입을 해요. 그래서 저희가 반대하는 단식을 했구요. UN앞에서 15일간. 근데 북한이 가입을 했죠. “아, 북한이 견딜힘이 없구나.” 그때 그 생각을 했어요. “북한이 생존 자체가 힘들구나, 북한이” 그 당시 미국 정세가 굉장히 안 좋았어요. 경제가 안 좋으면 항상 희생양을 찾게 마련이잖아요. 그 희생이 되기 쉬운 사람들이 바로 이민자들이죠. 그때 미국정부가 반 이민자 정책을 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이러한 정세 속에서 우리가 동포사회의 운동을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해요. 윤선생님이 내셨던 구호가 ‘한손은 조국을 위해, 한손은 동포사회를 위해’였어요. 그전까지는 동포 사회 운동보다는 한국에 집중을 했었죠. 너무 열악하니까.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이러니까. 면담자 : 매년 한청련에서도 5·18에 대한 추모식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구술자 : 제가 가입했을 때가 90년이잖아요. 90년에는 5공 비리 청문회가 진행되고 있었고, 광주의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니깐 5·18 영령들을 추모하던 게 이제 진상 규명에 초점을 맞추었어요. 언제까지나 학살 원흉하면 동포들에게 다가오질 않아요. 이제 <파업 전야>라든지 <닫힌 교문을 열며>라든지 그런 영화들을 많이 상영했어요. 그니까 5월의 계승이 5월의 진상규명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에 입각해서 내가 딛고 있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저는 그게 5월 정신의 계승이라고 생각하였어요. 저희는 그래서 간단하게 추모 행사, 기념식을 할 때도 있었고 아니면 5·18기념 영화 상영회 할 때도 있었고. 때에 따라서 무슨 심포지엄 같은거 많이 했죠. LA 같은 경우는 나성 4.29 사태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4.29 나성사태를 바라보며 본질이 뭔지에 대해서 교육하는 심포지엄을 했어요. 면담자 : 선생님께서는 90년에 한청련을 가입을 하셨는데 그러면 매년, 한해도 빠짐없이 5·18 기념식 추모식이 되어 왔던 건가요? 구술자 : 그렇죠. 면담자 : 김대중 정권 들어서고 변화가 많이 생겼을 것 같은데요. 구술자 : 네, 너무 당연스런 일인 것 같애요. 국내에서 민족 민주 운동이 많이 해소 됐잖아요, 민주화도 많이 되구. 윤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는 게 운동이기 때문에 국내에 문제가 있었을 때는 국내의 문제를 잡고 늘어졌지만 그게 어느 정도 해소가 됐다면 지금 여기에서 있는 우리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는 것이 곧 운동이고, 그거를 하다가 아주 잘 되서 여기 있는 문제도 해결이 되면 그 다음에는 자연보호 환경활동도 할 수 있는 거고. 동물들이 죽어 가면 동물들을 위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거고. 면담자 : 그럼 LA에서는 언제까지 활동하시다가 필라델피아로 가셨나요? 구술자 : LA에서는 짧게 했어요, 제가 92년에 결혼을 했어요. 그래서 스물 세 살에 결혼을 한 거예요. 결혼을 하고 나서 문유성씨랑 같이 필라로 가게 됐죠. 필라델피아에서 98년까지 있었어요. 그리고 나서 뉴욕에 98년에 왔어요. 면담자 : 각각 지역마다 한청련 지부가 있었잖아요. 비교를 해주신다면 LA와 필라델피아의 차이, 그리고 이후의 98년 뉴욕에 오셨을 때 활동의 차이에 대해 비교를 해 주신다면요. 구술자 : 일단 도시마다의 특색이 있어요. 한청련의 마당집에 도시의 특색이 그대로 살아나요. 예를 들면 뉴욕 같은 경우는 삶이 너무 바빠요. 정신없이 돌아가거든요. 다른 도시하고는 비교할 수 없게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때문에 회원들의 삶도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게 마당집에 투영될 수밖에 없구요. 필라델피아 같은 경우는 굉장히 느슨해요. 사회 자체가 돌아가는 게 느슨하구. 그래서 뭔가 빠릿빠릿하게 해보고 싶은 사람들은 워싱턴 DC나 뉴욕으로 가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필라델피아에 남아 있어요. 제가 갈 때 많은 사람들이 필라는 죽어가고 있다는 얘기를 했어요. LA는 동포사회가 크기 때문에 한국의 변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많이 받는 동포사회죠.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여러 이슈들이 있을 때마다 LA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도시적인 특성을 갖고 있어요. 저희가 재미 한청련이기 때문에 모든 활동은 똑같은 캠페인을 진행해요. 하지만 뉴욕에는 유엔이 있기 때문에 유엔을 이용한 활동이 많죠. 시위를 해도 유엔 앞에서 한다든지 이런 것들. 그 다음에 워싱턴 DC는 백악관이 있으니까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하구요. 그래서 활동의 목적과 주제는 같다 하더라도 활동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었어요.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운동은 대중과 함께 해야되잖아요. 그믄 필라델피아 같은 경우는 역할이 뭐냐, 필라델피아는 앞에 나가서 싸우진 않지만 뒤에서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어요. 저희가 필라델피아 갔을 때 필라델피아는 보조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그거에 충실해야 한다라고 생각을 해서, 인적 물적 자원을 많이 지원하려고 했었어요. 면담자 : 필라 회원들은 뉴욕에 있는 미 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했죠? 구술자 : 필라델피아가 한국대사관이 없으니까. 같이 모여서 지역을 많이 다녔어요. 어떨 땐 DC가서 하고, 어떨 땐 뉴욕 가서 하고. 노태우라든지 전두환이 방미하게 되면 당연히 저희가 환영 나갔죠. 저희가 가서 굉장히 시끄럽게 환영을 해드리거든요. 뭐 풍물도 치면서. 잘 모르는 분들은 그랬다 그러드라구요. “이 사람들 기동력이 되게 좋다.” 그랬대요, 저희는 회의를 많이 했어요. 각 지역에서는 대표위원을 두고서 의견을 수렴해요...일년에 두 번씩 꼭 대표위원회를 소집을 해요. 한 지역에서 저희가 1박 2일 동안 회의를 해요. 국제정세분석에서부터 시작을 해요. 그래서 미국 정세분석하구 그 다음에 조국 정세를 분석해요. 동포 사회 현안에 대해서도 얘기하구요.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업과 활동을 할 것이냐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거죠. 그래서 회의하기 전에 각 지역으로 공문이 다 나가요. 공문에 어떤 걸 안건을 가지고 할 테니까 의견을 수렴해서 오세요. 각 지역에서 대표위원회를 하기 전에 회의를 다 하죠. 의견을 수렴해가지고 대표위원들이 다 오게 되면 그 자리에서 논의를 바탕으로 수렴된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가 해왔던 사업과 성과들에 대해서 평가하고 다음에 새로운 정세에 맞춰서 어떻게 보강할지 결정하고 그 자리에서 활동이 결정되요. 5·18 같은 경우도 우리가 항상 해왔던 연례였기 때문에 거기서 얘기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번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운영이 됐었어요. 그 면담자 : 98년에 뉴욕으로 오셔서 한청련 활동을 계속 하고 계셨던 때죠? 구술자 : 네. 그때도. 저희가 필라델피아에 가게 된 것도 필라에 상근자가 없어서 유성씨가 상근하려고 저랑 같이 간 거구요. 뉴욕에 올 때도 뉴욕에 상근자가 없어서 저희가 와서 유성씨가 상근했죠. 면담자 : 예전 한청련 관련된 사진을 보면 상당히 세도 컸고 활동 영역도 넓었고 그런 게 사진으로도 눈에 훤히 보이거든요. 전체 모임하면 기념사진 찍으신 분들만 해도 5,60명 되고 백 명 넘을 때도 있는 것 같은데 한청련이 정확히 언제 해산이 된 건가요? 구술자 : 2004년쯤인 것 같애요. 확실한 기억은 아닌데. 면담자 : 이때 전체 모임을 가지고 조직에 대한 방향이랄까, 해산을 해야 되는지 논의가 있었나요? 구술자 : 한청련 자체 내에서 논의해서 해산하기로 했다고 들었어요. 제가 그때 한청련 임원도 아닌 상태에서 조직의 결정을 본인들이 해야 되니까 관여를 하지 않았어요. 각 지역에서 한청련 사람들이 상의는 했겠죠.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에 대해 상의하고 결정을 한 거겠죠. 면담자 : 근데 해산 결정을 내려가면서까지 그만 두게 됐었나요? 구술자 :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정세가 국내 운동권도 굉장히 어려운 상태였어요. 사회적인 이슈가 폭발할 때는 운동권이 일어나게 되죠. 아까 말씀하셨던 민주화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불편 없이 잘 먹고 잘 살게 됐는데 내가 굳이 뭘 해야 하는가라는 게 크게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도 그건 마찬가지가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찾기가 힘들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런 외부적 조건을 인정해야만 했어요. 한청련의 규율은 굉장히 강해요. 정세 변화 속에서 그런 규율을 유지 할 수 없음을 인정한 거죠. 또 한청련을 해체할 수 있었던 또 한가지 이유는 마당집이 많이 강화된 거요. 민족학교도 그렇고 민권센터도 그렇고 다 한청련이 만든 단체에요. 동포 사회의 운동이 강화되면서 마당집 이름을 걸고 했어요. 민권센터라는. 대중에게는 민권센터가 더 어필하죠. 한청련이 망한 것이 아니라 활동의 틀이 바뀐 거죠. 면담자 : 네. 알겠습니다. LA나 시카고, 뉴욕엔 마당집이 있었는데 마당집이 없는 지역의 경우 한청련 해산이 좀 아쉬웠겠어요. 구술자 : 당연히 있었죠. 한청련은 저희 청춘을 바친 단체였잖아요. 마당집은 비영리단체로서 대중화라는 부분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결집된 조직이 아니라는 단점이 있어요. 예를 들면 비영리단체기 때문에 선거 참여는 권유할 수 있지만 누구를 찍자는 운동은 못하게 되어있거든요. 마당집이 있는 뉴욕에서도 아쉬운데, 마당집이 없는 지역은 어땠겠어요. 면담자 : 현재 민권센터 이사직을 맡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예전의 청년학교가 민권센터로 이름을 바꿨어요. 지금 민권센터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하고 있는 업무가 있다면... 구술자 : 어, 소개 잘 할 사람 왔는데? (웃음) 민권센터는 코리안 어메리칸들로 이루어진 코리안 어메리칸 커뮤니티의 베이스에요. 이민자 권익 옹호 단체죠. 미국에서 이민자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은 정의롭지가 않잖아요. 우리가 코리안 어메리칸이니까,, 이민자니까 이민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거죠. 다른 이민자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정의롭지 못한 것들을 개선해나가기 위해서 일하는 거죠. 가장 큰 부분은 이민자 권익옹호 운동이에요. 서류 미비자 친구들을 위해 이민 시스템을 개혁해요. 이민자 자신이 힘들어서 미국으로 이민을 하는 것이지만, 미국이 저임노동이라는 이민자들을 필요로 해요. 그러다 미국이 경제적으로 힘들 때, 먼저 모든 부담을 이민자들에게 전가하는 거죠. 미국이 선심을 써서 들어온 것처럼 이야기하죠. 그래서 저희는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서류 미비자들의 신분을 합법화(legalize)해야 한다 주장하는 거죠. 미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세금을 내고 살아가고 있잖아요. 어차피 미국이 이민으로 이루어진 나란데. 면담자 : 한인들에만 한정돼있는 활동은 아닌 것 같네요. 구술자 : 저희의 베이스는 코리안 어메리칸 커뮤니티지만 다른 이민자 그룹들과 힘을 합쳐 활동을 해요. 중국 커뮤니티랄지 멕시코라든지 함께 일을 하죠. 연대해서 을하는 거죠. 어떤 부분은 저희가 주도적으로 하기도 하고. 정치 참여, 교육이라든지. 정치 참여의 경우 유권자 등록을 강조하죠. 선거 관련해서 교육시키고. 선거는 언제 어떤 식으로 하는지 홍보를 해요. 옛날에는 선거를 안 하셨거든요. 우리의 권리를 정당하게 보호받기 위해서는 정치 참여와 선거를 해야된다 선전을 계속 하는 거죠. 면담자 :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해외동포, 한인 사회 운동의 방향이라고 할까요. 구술자 : 호호호호 사람을 잘못 봤어요. 동포 사회의 운동 방향이요? 그니깐 유성씨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제가 곁다리로 보고 생각하는 거는...지금 이민자 권익 옹호 활동에 초점을 맞춰서 하고 있잖아요. 근데 이 이민시스템이 어떤 식으로든지 바뀌고 나면 그때는 좀 달라지겠죠. 지금 우리가 이민시스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바로잡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이 이뤄졌을 때, 그때는 무엇에 초첨을 맞춰서 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겠죠. 커뮤니티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해야겠죠. 운동이라는 게 나 혼자 보람 느끼고자 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성씨와 많은 얘기를 해요. 지금 노인분들이 어려움을 얘기를 해요. 미주 동포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는 사람들이 누구냐, 노인 서류 미비자들이어요. 저희는 C4라고 하는데 C4로 등록을 하면 라비(lobby)를 할 수 있거든요. C4 단체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해야겠죠. 우리가 역량이 되는지, 만든다면 어떤 규모로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야하겠죠. C4 같은 경우가 챌린지하는 하나고...... 한청련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저희두 책임감이 크죠. 그래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거요. 여기에 베이스를 둔 커뮤니티 차원에서 예를 들면 하우징이 너무 심해요. 렌트 문제가 너무 심각해요. 하우징의 문제를 포커스로 잡아 해결하는 활동도 필요하구요. 가장 베이스로 깔리는 건 역시 교육이죠. 왜냐면 윤선생님이 항상 강조하셨거든요. 운동은 곧 교육이고 교육가가 되는 거라고. 그래서 이런 활동도 사실은 교육의 일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학습과 실천을 병행하는 교육 말이에요. 우리가 계속 이런 일을 해나가려면 중요한 것은 보람과 자긍심이거든요. 희망을 제공해주는 게 교육가의 역할인데 한청련 식구들한테 저희가 그걸 못한 거죠, 중요한 건 저는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청년들에 대한 교육, 커뮤니티에 대한 교육이 중요해요. 청년들이 꿈이죠, 키워서 활동가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큰 바램이고 꿈이죠.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챌린지가 많이 있으니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저희 교훈 아시죠. “바르게 살자. 뿌리를 알자.” 그거잖아요. 그거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우리 원칙이에요. 5·18하고도 연결되잖아요. ‘바르게 살자’는 항쟁정신하고 통하고, ‘더불어 살자’는 대동정신하고 통하죠.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을 이곳에서 실천하면서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면서 살 거예요, 면담자 : 마지막 말씀을 해주시고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구술자 : 그러니까 5·18재단에서 오셨잖아요. 5·18이 어떻게 영향을 끼쳤고 그런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시려는 거잖아요. 해외에 있는 분들 각 개인들을 다 인터뷰를 하셨고. 주제넘게 한마디 더 얹는다면, 사실 한청련, 한겨레, 마당집은 5·18하고 떼놓고 얘기할 수가 없어요. 왜냐면 5·18의 파편이라고 할 수 있는 윤선생님이 여기 오시게 되어 여기서 씨앗을 뿌린 것이 한청련, 한겨레, 마당집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5·18이 어떻게 해외에 영향을 끼쳤느냐 하는 부분은 이들 단체가 동포사회나 미주사회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저는 맞는다고 봐요. 나름대로의 보람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을 해요. 저희가 동포사회 활동을 하기 전에는 동포 사회 커뮤니티 분위기가 굉장히 보수적이었어요. 유권자 등록하는 분들도 거의 없었고. 더구나 유권자 등록하는 분들은 다 공화당이시고. 그랬어요. 그리고 투표하는 분이 7퍼센트도 안 되었어요. 반 이민정책을 하면서 저희가 들고 일어났거든요. 마켓 나가 홍보하는 것은 기본이구요. 다른 단체들하고 같이 행동하구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자기들 생존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호응을 안 해주실 수가 없어요. 여러 가지 교육과 활동을 했어요. 유권자의 참여율이 92년에 7퍼센트 정도였다면 지금은 45% 정도 까지 올라갔구요. 옛날에는 유권자 등록을 아예 안 했죠. 지금은 유권자 등록을 굉장히 많이 하시구요. 동포사회 내에서 이민 문제와 관련해서는 공화당 쪽 보다 민주당 쪽으로 분위기가 많이 바꼈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자긍심을 가져요. 우리가 했던 일이 커뮤니티의 의식을 바꿔내는 데에 일조를 했구나 하는. 공헌을 했구나. 면담자 : 우리 재단에서도 처음 이곳에 5월 운동을 기록하러 올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LA나 뉴욕이나 시카고에 있는 마당집, 그리고 한청련 활동, 5·18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런.... 구술자 : 저희 태생이 그런 걸요. 면담자 : 관계가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주로 저희 구술 대상자가 되었죠. 군사정권 시절에서 반정부 단체로 낙인을 찍히고... 선생님이 활동하실 때 동포사회 내에서 그런 시각도 있지 않았습니까. 뭐, 빨갱이들이다 그렇게 바라보는 뭣도 있었을 거구요. 구술자 : 아주 많았죠/ 제가 처음에 민족학교 나갈 때 저희 엄마가 아주 결사반대 하셨었거든요. 왜냐면 민족학교는 빨갱이라고. 그게 굉장히 보편화된 시각이었어요. 제가 처음 가입해 활동할 때. 빨갱이 소동은 항상 있었구요.. 면담자 : 마당집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그런 인식이 많이 변하지 않아나요? 구술자 :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은 민권센터가 자리를 잡아서 우리 이민자 권익을 위해 일하는 단체라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일부에서는 과거의 생각에 붙들려 있는 경우도 여전히 있구요. 저희가 하는 ‘노동자 권리 프로젝트’라고 있어요. 여기서도 임금을 못 받고 쫓겨나는 노동자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 분들은 변호사도 살 수가 없어요. 저희가 노동자 권리 프로젝트를 통해서 변호사 대여섯 명과 함께 일을 하거든요. 그분들의 입장에 서서 돈을 받아드리는데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그런데 소규모 업자 분들은 굉장히 디펜시브(defensive: 방어적)하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쟤네들이 빨갱이이라 그런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있드라구요. 면담자 : 여기서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구술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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