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한청련의 소리 - 정리 이종록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의 상임 이사를 맡으신 황광우 선생으로 부터 시애틀 한청련의 소리를 들려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그래서 2019년 1월 16일, 시애틀 인근 훼드럴웨이 한 식당에서 현재 시애틀 지역에 남아 있는 이들 중 김형중, 이종록, 홍 찬, 노선길, 권종상 등 5명이 만나 합수 선생을 기리면서, 선생과 시애틀 그리고 한청련을 회고하는 감회젖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은 모인 이들의 소회를 정리한 글입니다.
시애틀은 합수 윤한봉 선생이 처음 미국에 발을 디딘 곳이다. 선생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군부정권에 항거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이를 폭동으로 규정한
신군부가 윤한봉을 배후 주모자로 지목하여 수배령을 내리자, 1년 가까이의 도피생활 끝에, 1981년 4월 29일 마산에서 화물선 표범호의 짐칸에 실려, 바람한줄기 들어 오지 않는 찜통같은 철판 벽에 갇힌채, 옆에 붙은 굴뚝의 뜨거운 열기와 굶주림을 견디며, 35일간의 긴 항해 끝에, 6월 3일 시애틀 인근 벨링햄에 도착하였다.
도착했다고 끝 난건 아니었다. 표범호는 원래 출항 17일 후 시애틀에 닫기로 되어 있었으나, 중간에 갑자기 항로가 변경되면서, 항해시간도 35일로 늘어나고, 도착날짜 뿐아니라 도착지점 또한 바뀌는 바람에, 선생을 맞으러 간 김동건 김진숙 부부와의 '접선'에 차질이 생겨, 도착하고도 또 한동안 마치 스파이 영화같은 숨바꼭질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땅을 밟은 곳이 시애틀이었다.
시애틀의 김동건 김진숙 부부 집에서 신분을 숨긴채 지낸 넉달 남짖은, 말 그대로 가슴을 쥐어 짜는 '절치부심'의 시간이었다. 항쟁 때 학살당한 영령들과 감옥에 갇혀 울분에 떨고 있을 동지들의 생각 속에 그들을 거기두고 혼자 도망나온 자신을 머리 쥐어뜯어 자책하면서, 그는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나는 이미 광주에서 죽었다. 나는 이땅에 다시 살아나서 조국의 민주화와 자주평화를 위한 투쟁에 이목숨 온전히 바치겠노라'고 맹세하고 또 맹세하였던 것이다.
그해 '81년 10월 정치망명 신청은 아직 재판에 계류 중인 가운데, 하비 목사와 케네디 사원의원의 도움으로 미국에 임시 체류할 수 있는 노동허가서만 받아 들고, LA 한국 민주화 운동의 대부 김상돈 전 서울시장의 제안에 따라, 한인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LA로 옮겨 가게 되었다. LA에 갔다고 바로 뭘 할수 있는건 아니었다. 아직 정치망명 신청이 받아들여 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밀항온 사람이요'라고 떠들 수도 없는 것이어서, 그가 신분을 숨기고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발목을 풀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안기부였다. 1982년 말 한국의 안기부는 선생의 잠적을 북의 지령을 받기 위한 월북으로 몰아 가기 위해,그의 가족을 잡아 들여 문초하다가 뜻밖에 선생의 밀항사실을 캐내게 되었고, 이를 공식 발표하면서 LA영사관에 그의 미주 활동을 방해,차단하도록 훈령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안기부에 의해 신분의 자유를 얻게 됨으로써 본격적으로 해외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1984년 다시 시애틀을 방문하였다.
1984년 여름, 선생은 시애틀 북쪽의 '디셒션 패쓰'캠프장에서, 김형중(당시 42세), 함수철(당시 34세) 김갑동(당시 30세) 그리고 그외 3,4명의 청년들과 함께 텐트를 치고 하룻밤 캠핑을 하였다. 밀항해 온 한국의 운동권 지도자의 입에서 광주학살의 참혹함이나 그에 대한 분노, 그리고 피말리는 밀항 이야기등이 나올 줄 예상했던 그들은, 그에 관한 얘기는 별로 듣지 못하고, 초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진 그의 '웅변'에, 머리를 세게 얻어 맞은 듯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는 달변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해하기쉽고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현실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남북간 군사적 대립 상황 속에서의 민주화, 자주, 평화군축등 자칫 추상적 개념일 수 있는 문제들을 쉽고 명쾌하게 현실에 맞춰 풀어 내놓았던 것이다. 해방과 함께 찾아온 '분단' '미군정' 단정수립' '반민특위의 실패' '군사 쿠테타' '망나니 정권의 패악'까지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역사적 연원과 앞으로 전개 될 또다른 '과거'를 전망하면서, 우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살아 가야 되는가하는 깊은 고민을 던져 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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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깨우침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의식있는 자라면 무언가를 해야 된다는 단호하고도 간곡한 호소였다. 그러기 위해 우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기 위한 공부, 혼자서가 아닌 모여서 하는 공부를 강조하여 주문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형중, 김갑동, 함수철(후에 작고)등이 모여 '해방 전후사의 인식' '전한시대의 논리'등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뒤에 홍 찬이 가세하면서 시애틀 한청련의 모태가 만들어 지게 되었다.
시애틀 한청련은 독자적 지역활동은 별로 없었고, 미주 한청련 전국 차원의 투쟁과 사업들, 즉 군부독재 규탄 시위, 반전 반핵 시위, 민주화 투쟁 자원 모금,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통일 마당집 한돌 쌓기 운동 모금, 국보법 철폐투쟁, 한국의 핵무기 철거 10만명 서명 운동 등을 적극적으로 함께 벌여 나갔다.
그리고 활동의 정점은 1989년에 있었던 두 갈래의 '평화 대행진'이었다. 그 하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여,임수경을 앞세우고 국제 평화 운동가들과 함께,1989년 7월 21일 백두산에서 부터, 7월 27일 판문점까지 벌인 'KOREA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 평화 대행진'이었고, 여기에는 시애틀에서 홍 찬, 이종록, 김갑동 (타주 이주)이 참가 하였다. 또 하나는 같은 기간 동시에, 뉴욕 UN본부에서 부터 워싱턴 DC까지 '핵무기 철거를 요구하는 10만명 서명지'를 등에 지고 행진하여, 미국 의회에 전달한 '미주 평화 대행진'이었고, 여기에는 이창재(타주 이주)가 참가하였다. 특히 백두산에서 부터 판문점까지 벌인 국제 평화 대행진은 한반도의 분단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반핵평화의 염원을 민간차원에서 국제사회에 외친 정치적 역사적 대 사변이었고, 또한 참가자 모두에게도 엄청난 감격과 울림을 준 충격의 사건이었다.
1990년대 들어와 국제정세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1991년 12월, 구 소련의 연방 해체가 선언되면서 세계 냉전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고, 또한 1991년 9월,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함에 따라, 통일 문제는 뒤로 미루어 지게 되었고, 그 보다는 남과 북의 경쟁구도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 군축 문제가 당면과제로 다가 선 것이었다. 게다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YS가 당선되면서 군부독재의 종식이 예고되었고, 국내 정치 상황 또한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미주 한청련은 1992년 10월 대회를 통해 새로운 운동 방향과 노선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통일 환경도 변함으로 하여, 민주화 투쟁을 지원하던 운동 역량을 동포사회의 권익운동과 미국의 민권운동에 집중하기로 방향을 전환하였던 겄이다. 그러기 위해 운동의 추동 세력으로서의 한청련 조직 강화보다는 LA의 민족학교, 뉴욕민권센터, 시카고 하나센터등 마당집 활동에 더 많은 역량을 투입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미주 한청련은 해외 운동의 추진 동력체로서의 조직을 해체하고, 대신 모든 역량을 각 지역 마당집에 투입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청련의 조직체는 없어 졌지만 그 역량과 역활은 마당집에 그대로 옮겨져 남게 된 것이다.
한편 시애틀에서는 그 동안 꾸준히 한국의 평화, 군축, 통일 문제 등을 위해 활동해 오던 홍 찬 주도로 2018년 7월 9일 '6.15 공동선언실천 시애틀 지역위원회'가 결성되었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7.4공동선언을 계승하여 '남과 북의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고'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의 공통성을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15일에 합의 발표한 역사적 선언이다. 한청련은 그 강령에 '7.4 남북공동선언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 정신'에 따라 남과 북을 하나로 보는 통일된 조국관을 가진다고 규정하였는데, 그 정신과 조국관은 '6.15 남북공동선언'의 기본 정신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홍 찬이 회장, 권종상과 황규호 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이 운동체에 김형중, 이종록, 노선길, 조대현 등 옛 한청련 동지들이 그대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합수 윤한봉 선생은 갔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이곳 미국에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선생이 실천으로 보여준 가르침에 깊이 감사드릴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