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통신

제목'Korea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 대행진'의 감동 - 이종록2019-03-04 11:33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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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 (1945년 생):


저는 '75년에 30살때 미국에 왔습니다. 공부하러 시카고로 들어 왔는데 실패하고, 여기 눌러 앉기 위해 '78년에 시애틀로 옮겨 왔지요. '84년 쯤인가 후배 김갑동한테 합수형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고, 무슨 시위나 모금등을 할때나 겨우 참여하는 정도 였지요. 그러다 '87년에 '한겨레운동연합'만들때 준비위원으로 참여하면서 한청련과 함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89년에 'Korea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 대행진'에 홍 찬, 김갑동과 함께 참가하면서 평생 잊지 못할 큰 감동을 얻게 되었지요. 평화 대행진은 한반도의 분단상황과 평화의 염원을 국제사회에 외친 역사적 대사건 입니다. 그리고 북한 정권과 주민에게도 큰 울림이 되었지만 또한 행진하는 우리도 연도에서 울부짖는 주민들에게서 더 큰 깨우침을 받은 것입니다. 행진단이 평양에서 부터 개성쪽으로 내려 올 수록 연도 주민들의 반응은 점점 더 오열과 울부짖음으로 변하였는데 그것은 부모 형제를 잃은 이들의 한과 고통의 눈물이었습니다. 특히 개성 일대는 전쟁때 장정 4명 중 3명이 죽었다는 곳이고 남은 가족들이 아직도 거기 그대로 남아 살아가고 있는 곳입니다. 그들의 울부짖음은 바로 남과 북이 싸우지 않고 공존하는 평화의 열망, 그것이 었습니다. 그것이 통일의 진정한 의미이며 본질인 걸 우리도 깨우친 거지요.

대행진 전에 평양의 한 중학교를 방문했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학생들의 그 누런 갱지 수제노트를 보고 눈물이 콱 났습니다. 그러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 내가 조국을 위해 할일이 하나 있구나'하고.미국의 싼 폐지를 가져다 재생지를 만들자고 흥분했지요. 직장도 때려치고 두어 해 뛰어 다녔는데,폐지는 싼데 운송비가 너무 비싸서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뭔가 조국에 기여해 보려고 중국에 가서 1년여 헤매었는데, 사업하고는 거리가 멀었나 봅니다. 망했지요.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나도 조국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는 자각에서 말입니다.

저는 한청련 식구들의 그 진지한 자세와 헌신성에 정말로 감동받았습니다. '89년 부터 '93년 까지 매년 대표위원 회의와 전국대회에 참석했는데 그때마다 거듭거듭 감화되어 돌아 왔어요. 한청련 안에는 공부 많이한 전문직도 있고 막일하는 젊은이도 함께 있지만, 나서서 아는체 하거나 '날좀보소' 잘난 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모두가 똑같이 진지하고 헌신적으로 열정적으로 일해요. 말하자면 합수형을 몸으로 배운게 보여요. 회원중에 의사나 사업하는 이가 재정부족을 메우기 위해 상당한 액수의 특별회비를 낼때도 조심스럽게 다른 회원들의 눈치를 봐요. 자칫 우쭐해 보일까봐 그러겠지요. 그게 한청련의 모습입니다. 그런 한청련과 함께한 그때가 제 인생에서 정말 의미있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합수 형을 생각하면서 거듭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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