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중 (1942년 생): 저는 '73년에 서른 한살 때 미국에 왔습니다. 한국에서는 흥사단에 좀 관계했고, 그 때 한참이던 한일협정 반대 데모에 열심히 좋아 다니기도 했지요. 미국엔 처음 펜실바니아로 들어와서 자동차 Body Shop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일을 배우고 있는데 시애틀에 일자리가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79년에 이리로 옮겨 왔지요. 여기 와서 김동건 김진숙씨가 하는 동양식품점에 드나 들다가, '80년에 광주가 터지자 그 분들이 인권옹호협회를 만들었는데 저도 거기에 가입 했습니다. 근데 그때 웬 꾀죄죄한 친구가 식품점 뒤켠 구석에서 무릅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걸 봤어요. 김진숙씨 한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친척 동생인데 고향생각하고 그러나 보라고,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요. 그러다 그 사람이 LA로 떠난지 한참 뒤에 그가 바로 밀항해 온 윤한봉이라는 사람이라는 거라. 그리고 '83년 인가 '84년인가 김진숙씨가 그 사람이 시애틀에 다시 온다고 그래요. 미국에서 한국의 반군부 민주화 투쟁을 벌이려고 뜻있는 청년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라는 거야. 난 그때 청년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가까이 지내던 김갑동이와 함수철씨 한테 얘기 했어요. 그래서 그해 여름에 디셒션 패쓰 캠프장에서 캠핑하면서 얘기를 듣게 됐는데, 야! 대단했어요. 우린 그냥 광주얘기며 시국 얘기를 들을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런 정도가 아니고 국제정세며 한국의 현실, 군부독재, 한반도의 평화통일 그런 얘기를 굉장히 쉽지만 깊이 있게 구체적으로 풀어 놓는데, 속이 시원하게 뻥 뚤리면서 귀에 쏙쏙 박히는 거라.그러면서 그러는 거야.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그냥 이대로 식충이로 살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미국에서라도 조국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되지 않냐고, 사정없이 패대는 거예요. 숨도 제대로 못 쉬겠더라구.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러면서 당부하더군요. 작게나마 몇몇이 모여서 근현대사 공부부터 시작하라고. 그래서 한청련과 함께 하게 된건데, 정말 너무너무 고마웠어요.덕분에 사람답게 산 것같아 정말 행복했습니다. 윤형이 새삼 그립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