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장광민 선생님 2016년 2월 4일, 시카고 마당집에서, 안재성 면담하다. 면담자 : 몇 년생이세요? 구술자 : 1967년생입니다 면담자 : 여긴 언제 오셨어요? 구술자 : 17살 때 왔죠. 중학교 졸업하고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다 들어갈 때, 저는 1년 꿇었죠.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 미국 오려고 비자를 기다리고 있는데 비자가 안 나오는 거야(웃음) 여기 있는 저의 형님(필라의 장광선)이 처음에 부모님을 초청을 했고 그 다음에 부모님들이 저를 초청했어요. 1984년 8월 달에 여기 도착했어요. 필라델피아로. 그 다음 해 85년도에 윤선배를 만났던 거 같아요. 윤선배가 서부에서 활동하시다가 동부로 오신 게 85년이세요. 저희 큰형님 장광선 형님이 필라델피아의 5.18추모식 때 연사로 초청을 해서 그때 오셨던 거 같아요. 면담자 : 장광선씨요? 구술자 : 네 저희 형님이셨거든요. 면담자 : 형님이 어떤 분이길래 그걸 했어요? 구술자 : 형님도 만나보시면 좋았을 텐데 그분이 아프셔가지고. 여기 미국에 오시게 된 계기가 농업연수원으로 뽑히셔가지고 캔자스 주에 오셨죠. 뉴욕에 해외 한민보라고 진보적인 신문이 있었어요. 제가 올 때쯤에는 한민보 신문사에 편집국장이셨어요. 살기는 필라델피아에 살면서 뉴욕을 왔다 갔다 하셨던 것 같아요. 기차타고. 신문이, 2주에 한번인가 나왔던 것 같은데. 면담자 : 여기 살면서 이제. 구술자 : 예 필라델피아 살면서 기차로 뉴욕까지 왔다 갔다 하시고 주중에 갔다가 주말에 내려오는 식으로 하셨던 것 같아요. 면담자 : 지금 뉴욕이 가깝다 그랬는데 몇 키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구술자 : 기차로는 3시간? 필라델피아랑 뉴욕은 그렇게 가까워요. 3시간뿐이 안 걸려요. 제가 원래 필라델피아 토박이어요. 필라델피아로 와서 저희 누님 둘이랑 같이 왔어요. 제가 저 육남매 막낸데 저희 큰형님은 미리 오셨고... 그래가지고 5월 달에 윤선배님이 필라델피아에 와서 강연을 했어요. 면담자 : 사람 얼마나 모였어요? 구술자 : 강당이 꽉 찼던 걸로 생각이 나요. 면담자 : 필라델피아에서요? 구술자 : 필라델피아에서 강연을 했고요. 이미 85년도에는 여기 뉴욕도 그렇고 뉴잉글랜드 지역에 청년들이 나름대로 모임이 있었어요. 가시면 강완모 형이랑 난원 누님이 시작하셨기 때문에. 그분들이 아 서부에 뭔가 있다더라 이렇게 청년들이 활동한다드라. 그래가지고 84년도에는 서부에 무슨 대회가 있을 때 가서, 그 모임에 참여했었던 것 같아요. 그치만 동부에 윤선배님이 아직 올 때는 아니죠. 85년도에 오셨으니까 그래가지고 윤선배님이 강연한 게 기억나는 게 김민기의 노래 ‘아침이슬’이라던가 또는 ‘작은 연못’ 이런 것들 노래 테이프를 가져와가지고 들려주고 강연을 하셨던 걸로 기억이 나요. 그때 광주의 진상에 대해서 열을 토하면서 강연을 하셨던 것 같아요. 면담자 : 고등학생 땐데. 구술자 : 고등학교 때 그 얘길 처음 들었으니까요. 면담자 : 어떻게 알게 됐어요? 구술자 : 형님이 초청을 하셨기 때문에. 면담자 : 아 형님이 초청을 하셨구나. 구술자 : 합수형님이 저희 집에 묵으면서 몇 개월 계셨을 땐데. 필라델피아 청년들, 결혼하신 선배님들과 함께 소통을 하시면서 학습을 시작하셨어요. 역사학습 같은 것도 하고. 작은 골방에 모여가지고 학습했어요. 그 다음에 아는 선배가 장사를 하는데 장사하는 건물 2층에 모여서 일주일에 한번씩 학습했어요. 면담자 : 고등학생인데 끼었네요? 구술자 : 예 끼었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특이한 게 형님이 그걸 하시니까 한 거죠. 필라델피아에 어르신들이 모임이 있었어요. 신동아 같은 걸 가지고 공부를 하는 모임이 있었어요. 그니까 윤선배님 오시기 전이죠. 공부를 하고 계시더라고. 제가 사춘기여서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그럴 때 아니에요. 상당히 민감할 때잖아요. 그런데 나는 빼고 누나는 데리고 가시더라고요. 이상하다 나도 가고 싶어 가지고(웃음) 형이 간다는데 차를 몰래 뒤에 타고 가겠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데리고 가시더라고. 가봤더니 신동아 같은 거 복사해가지고 나눠가지고 서로 읽고 하시더라고. 아 이게 뭔가 특이한 게 있다 뭔가 이상하다. 눈을 뜨기 시작했죠. 광주라는 것이... 내가 바로 광주에 바로 떨어지지 않는 강진에서 살았는데. 면담자 : 그렇죠. 강진 출신이니까. 구술자 : 그때 5.18때 저희는 다 휴교했잖아요. 집에 있었는데 저수지에서 어디서 차타고 해남까지 가는 그런 모습도 보고 그랬는데 그때만 해도 그게 뭔지 몰랐거든요. 정치의식도 없었고. 그런데 여기 와서 우리 이웃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까마득히 몰랐다는 거에 더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밖에서는 진짜 난장판이고 학살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내가 모를 수가 있구나. 충격적인 생각이 들고 그랬는데 거기다 더해서 윤선배님이 오셔가지고 역사 학습을 같이 하게 됐죠. 그때 제가 제일 나이가 어렸어요. 면담자 : 그러겠네요. 구술자 : 한청련 만들어질 때도 저 때문에 나이제한을 17살로 했어요. 면담자 : 아아 한청련의 나이 제한이 장광민씨 때문에. 구술자 : 17살로 내려갔죠. 연령제한이, 한청련이 17살부터 40까지에요. 40 이후는 한겨레로 결합하구요. 면담자 : 40세 이하로. 으음. 구술자 : 예 그런데 저희 누님 두 분도 한청련에서 열심히 활동하셨죠. 윤선배님 영향을 받아가지고요. 윤선배님 하면 지금도 생각나는 게 적어놓은 노트 보지도 않고 거의 한 두세 시간 동안 근대부터 현대까지를 다 훑으신 거예요. 그것이 너무나 감동적이었어요. 강의를 칠판 같은 거에 쓰면서 하는 게 그게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학교 때 배우지 못했던 역사를 배우잖아요. 특히 동학 갑오농민전쟁이라고 딱 이야기 하시고 그런 것들 보고. 아 이게 정말 재미있다. 그리고 당시에 일제시대 때 민족운동도 이야기 하시고. 항일운동 무장투쟁 전혀 배우지 못했던 것이잖아요. 저희는 오로지 임시정부와 광복군 이야기만 듣고 김원봉의 의열단 이야기라든지 여운형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해선 전혀 못 들었잖아요. 이번 영화 ‘암살’에 나왔던 그런 분도 그렇고 그다음에 만주에 있었던 김일성이라든가 또는 다른 그 운동했던 사람들의 역사를 모르는데 그때 처음 아는 거예요. 아 이렇게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깜짝 놀랬어요. 아 이렇게 항일운동도 이렇게 있어가지고, 분단 과정에서 38선이 어떻게 그어졌고, 어떻게 미국이 관여하게 됐고 이런 것들을 배우게 된 거요. 그것 참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그렇게 두세 시간을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아주 디테일한 것까지 아주 자세히 설명하면 그것이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스쳐가는 거죠. 도저히 흉내를 못 내잖아요. 그래가지고 저도 한청련 활동을 하게 되었고. 윤선배님은 필라델피아 에 있다가 뉴욕으로 가셔가지고 뉴욕에서 조직 작업을 하셨어요. 뉴욕, 뉴잉글랜드, 뉴햄프셔, 코네티컷 이런 식으로. 면담자 : 그럼 한청련 초기멤버는 아니겠죠. 구술자 : 완전 초기멤버죠. 저는 저희 형님하고 누님이랑은 다 초기멤버죠. 8월 달에 시카고에서 대회가 있었어요. 85년 8월 달에. 면담자 : 음 85년에는 시카고였구나. 구술자 : 그게 재미 한청련을 결성하는 대회였던 것 같은데. 면담자 : 그때 한청련이 정식으로 결성되는구나. 구술자 : 그렇죠. 그렇죠. 그때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올라갔고, 뉴욕, 필라델피아,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밴을 빌려가지고, 거기서 밴 같이 타고 시카고 까지 왔어요. 면담자 : 배를 타고? 구술자 : 밴이어요. 밴. 밴 뭐냐면. 면담자 : 아 그거 차. 구술자 : 네 승용차보다 큰 5인승 밴을 타고 뉴욕에서 시카고 까지 온 지금도 기억나네요. 면담자 : 형도 타고 누나도 타고. 구술자 : 그렇죠. 거기에 다 타고 왔죠. 면담자 : (웃음)집안이 통째로 들어왔네. 구술자 : 그렇죠. 저희 3남매가 다 들어오게 되고. 형님이랑 같이 하게 되었고, 그때 초기에 활동했던 분들 중 지금 남아계신 분들이 강완모형님이나 김난원 누님이 있었고요. 면담자 : 그렇게 해서 필라에서 활동한 거네요? 구술자 : 그렇죠. 85년부터 한청련 활동을 해왔고, 89년까지 필라델피아 있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를 거기서 다녔었거든요. 템플대학교를 다녔는데....뉴욕에서 85년도에 뉴욕청년교육 봉사원이라는 게 만들어졌잖아요. 뉴욕 한청련이 봉사원을 만들었는데 상근자가 필요하다고 해요. 89년도에 거기 선배가 “너 왜 학교 다니냐?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웃음) 89년도죠. 한국 같으면 87년 항쟁이 이루어진 다음에, 어떻게 보면 다들 마지막이잖아요. 그래가지고 나도 사실 학교 다니기가 싫었고. 학교를 때려치웠어요. 한 학기인가 남겨두고. 봉사원의 상근자를 하게 되었죠. 상근하면서 봉사원의 이름을 청년학교로 이름을 바꿨어요. 89년에 바뀌었어요. 제가 가서 상근하면서 이름 바꾸자고 해서 바꿨죠. 면담자 : 아 봉사원이었구나. 구술자 : 네네. 청년교육봉사원이었어요. 마당집 이름이 각자 다르거든요. LA는 민족학교였고, 시카고는 85년인가 시카고 청년교육문화원으로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문화원에 상근자가 없다고 누가 갈래 해요. 이래서 내가 시카고로 왔죠. 면담자 : 그게 90년. 구술자 : 그게 뉴욕 갔다가 90년도에 여기 오게 되었죠. 면담자 : 어차피 무보수 실무잔데. 구술자 : 그렇죠. 상근자는 다 무보수였어요. 면담자 : 오히려 회비내고? 구술자 : 그렇죠. 그렇죠. 그러면서 회비내고, 그러면서 회비 내요(웃음). 무보수하면서 회비를 내요. 온 가족이 다 도와준 거죠. 어머니도 그렇고 형님도 그렇고 생활비를 보내주시고. 면담자 : 활동을 하는데도 보내준 거예요? 구술자 : 그럼요. 형님은 한청련 활동이 중요하다 생각했고, 저희 어머니도 자식들이 하니까. 어머니는 정부에서 연금 받은 거, 꼬불쳐 모아놨다가 내가 한 번씩 가면 용돈 써라 하면서 주고 (웃음) 면담자 : 가족이 용감무쌍하네요. 구술자 : 지금 생각나는 게 시카고에서 85년도에 처음 모였을 때 여기서 큰 학교의 기숙사가 있잖아요. 거기서 가족이 다 잤어요. 면담자 : 전체가 온 거예요? 구술자 : 다 왔었어요. 저는 어려서 잘 모르지만, 그때는 영어로 같이하고 이중어로도 하고 막 그랬는데. 면담자 : 아 저기 한국어를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구술자 : 그렇죠. 예예. 2세들까지 다 있었어요. 1.5세들 특히 한국말 좀 하면서도, 영어가 좀 편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대부분이 대회에 참석하면 공부를 하고 모여서 정세 분석을 하고, 정세분석 국내정세, 한국정세, 미국정세, 국제정세, 이런 식으로 정세공부를 많이 했어요. 몇몇 사람이 발제하고 토론하고 근데 학장님이 다 정리하시죠. 그때 100명 정도는 모였었던 것 같아요. 면담자 : 아 100명 정도? 구술자 : 내 생각으로는 100명 정도 모였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대회들이 많이 있었죠. 특히 한청련이 만들어지면서 대표위원회 회의가 있었고, 그다음에 중앙위원회 회의가 있고. 거기에 일반회원들이 다 참여하고 막 그러니까. 그리고 뉴욕에서 한다고 하면 뉴욕회원들 다 오게 하고, 회원들 다 오게 해서 같이 듣고 그렇게 했으니까. 면담자 : 91년도에 뉴욕에 있다가 시카고로 온 거죠? 구술자 : 그렇죠. 구술자 :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많고 그래서 상근자를 구하기가 힘들어요. 나같이 학교를 그만둔 사람들은 상근하기가 편하잖아요. 아무것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부모님이 말리는 것도 아니고, 나 같은 사람이은 적임자였죠. 어떻게 보면 시카고 오게 된 게 아무 것도 없어서 온 거요. 면담자 : 회원 가입을 엄격하게 했나요? 구술자 : 그때는 회원이 되기 전까지 예비회원이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학습을 함께 하는 거죠. 예비회원이 되면 조직 학습을 시켜요. 조직이란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르치는 거죠. 조직문화를 가르치는 거죠. 학습과정표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을 다 만들었어요, 그걸 가지고 10회 정도 일주일에 한번 씩 학습하고 마지막에 시험을 보는 거죠. 시험이라는 오픈 북이죠, 오픈북. 회원이 되면 또 돈을 많이 내잖아요. 여러 가지 많이 내거든요. 회비도 한 달에 50불씩 내지만 회비 말고도 연합회비가 따로 있고 지역회비가 따로 있고 합쳐 50불이고 그다음에 한국에 어려운 분들을 돕는 다던가 큰 대회 열려면 특별기금을 걷죠. 회원들이 상당히 많이 냈던 것 같아요. 최소한 100불 정도씩 평균적으로 내지 않았나, 회원들이 부담되었을 텐데 그때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상당히 자발적으로 진행됐거든요. 미국이 땅덩어리가가 넓은데 이 넓은 50개의 땅덩어리가 있는 데 동부 중부 서부 북부까지 다 있잖아요. 한 달에 한군데 정도는 다니신다고요. 비행기 타고 와가지고 타지역이 소식을 전해 주세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잖아요. 겨우 팩스나 전화로 소통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와가지고 지역의 사정들을 낱낱이 다 이야기 해주었어요. 그렇게 해서 한청련이 공통된 인식을 공유했다고 할까요? 지금 생각에도 정말 대단하셨다 싶어요. 지금 은 인터넷에 올리기만 해도 되고, 페이스북 같은 걸 보면 공부가 되어버리잖아요. 여기서 태어난 애들,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 운동했던 사람들, 운동 안했던 사람들, 영어 못하는 친구, 영어만 하는 애들, 한국말 못 알아 듣는 애들 정말 다양해요. 이런 다양한 청년들이 청년조직을 통해 모여서 뭔가 통일되는 힘으로 나가가기가 되게 힘든데, 그때 선배님께서 해주셨던 가장 중요했던 게 내 생각에는 공통된 의식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노력들이었어요. 저도 한번 따라간 적이 있는데 똑같은 말을 타 지역에서 똑같이 계속 하시더라고요. 각 지역에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있잖아요. 후원자들이 어떻게 생겼다드라, 어떻게 와서 한청련을 도전하게 됐다드라. 이런 얘기들을 농담까지 섞어다 전해주는 거야. 그니까 사람들이 그걸 듣고 같이 공감하는 거죠. 그 이야기들을 참 잘하세요. 재밌게! 그걸 들으면 막 힘을 얻고 힘을 얻어가지고. 면담자 : 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을 해서해주는 거죠. 농담까지도. 구술자 : 그러면서 지역의 이야기들을 듣고 그다음에 또 다른 지역 가서 이야기를 해주고 이런 식으로 하니까. 면담자 : 같이 다니면서 있었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구술자 : 초기에는 혼자 안다니시려고 했거든요. 납치, 암살 이런 것을 생각하신 걱 같아요. 전두환 정권이 험악한 정권이었으니까. 항상 가방을 목에 매고 다니거든요. 면담자 : 그 가방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어요? 구술자 : 멜빵가방이라고 하죠. 면담자 : 검정색? 구술자 : 짙은 색이었어요. 항상 운동화도 신고 다니시고.. 구술자 :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갔을 때 저랑 같이 뉴욕에서 식당을 갔는데 도가니탕을 사주시더라고요 먹으라고, 같이 먹자고 잘 먹고 힘내자고. 운동은 분노로 해서는 안 되고 사랑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분노로 할 경우에는 운동의 지속성이 없어지고 사랑으로 했을 때는 끝까지 운동할 수 있다고 했어요. 민족이나 민중에 대한 사랑이 없이 그냥 분노만 가지고 운동을 하면 언제든지 무너진다. 그런 이야기가 가장 기억나네요. 면담자 : 그렇죠. 권력에 대한 증오로 운동을 하면... 구술자 : 89년일까요. 그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이 몰락하잖아요. 그때 상당히 충격이었잖아요. 소련의 목락이 충격으로 다가오긴 했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없으니 “그런 갑다”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당시에. 형님은 핵심을 잡는 능력이 뛰어나셨어요. 예를 들어서 정세를 판단하는 능력도 탁월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포인트를 잡아가지고 한마디로 던져놓잖아요. 그니까 예를 들어서 “한 손은 조국을 위해, 한 손은 동포사회를 위해” 이게 92년도의 모토였거든요. 이제 또 하나의 구호는 “운동의 생활화, 꾸준한 학습”이었어요. 여성해방 얘기하는 사람들이 집에 가서는 설거지도 안하고 맨날 집에서 그냥 빈둥 빈둥거리고 부인한테 모든 걸 맡기려고 그런다면서 특히 남성회원들에게 설거지를 시키고 그런 문화를 만들었죠. 운동의 생활화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느끼게 만들었죠. 가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냐고 말했죠. 그 당시 우리가 전문적인 역량을 개발해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할 때니까, 운동의 생활화와 접목시켜서 어떻게 자기전문성을 개발할 것이냐 하면서 자기가 하던 직장이라던가 학업을 계속해 나가야된다 말했죠. 저 같은 경우도 사실 대학을 중퇴했으나 다시 이제 학교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면담자 : 한청련, 공식적인 해산식을 한 건 아니었어요? 구술자 : 후배들이 해산식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그때 학교에 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없어지면서 정치운동이 사라진 거죠. 그리고 남은 것이 마당집인 거죠. 마당집은 정치운동 단체가 아니고 사회봉사를 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기금을 받던 정부프로그램을 따가지고 스태프들을 고용하고 더 잘나가게 된 거죠. 면담자 : 어린 직원들이 들어오고 2세들이 들어오고..... 구술자 : 그래도 진보적인 이사들도 있고 면담자 : 이사들이 있구나. 구술자 : 이사들이 한청년 회원들이니까 이사들이 장악을 하고 있죠. 면담자 : 그거 참 괜찮네요. 구술자 : 분위기를 잡고 정치적으로, 그렇지만 정치운동을 못하니까 면담자 : (들리지 않음) 구술자 : 시카고는 없는 데, 엘에이하고 뉴욕, 워싱턴 디씨이 만든 ‘희망연대’라는 게 있어요. 거기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에도 관여하고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추모하면서 만들어졌는데 그게 참 안타까워요. 윤선배님이 여기 계속 있었으면... 수술 받으시면서 돌아가신 게 너무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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