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연대행진] 참가기
심인보 30년
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과제입니다. 특히 이 짧은 글이 지난 30년전 진행된 미소 냉정종말과
국제질서의 재구성, 남부/북부조국의 정치 (군부)권력의 변동, 북부조국의 경제파탄과 식량부족 그리고 DPRK 군부의 핵무장화,
미국 시민사회와 행정부의 변화 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상황에서 당시 윤한봉 선배님의 국제연대운동과 평화운동의 역사와 성과가
재조명되는데 저의 글이 어떤 도움이 될까 하는 의구심이 앞섰습니다. 시대와 상황의 변화를 깊이 참고하시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까까머리 중학생일 때 부모님과 함께 79년에 도미하였고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84년에 북가주 버클리대 근처에 만들어진 [민족학교] 분교에서 청년 윤한봉을 만나게 됩니다. 그날 망치를 들고 판화를
걸고 있던 합수형님은 대낮에 불쑥 찾아온 나에게 그 망치를 던질 것 같은 눈으로 저를 바라 보았고, 깡마르고 헝클어진 곱슬머리에
난생 처음으로 들어보는 전라도 사투리에 매료되어 그 해 여름부터 학업을 포기하고 민족학교에서 소사를 자칭하며 활동하는 합수형님
아래에서 급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경과 평양 도착
북부조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오는 행진 참가자들의 마지막 경유지는 북경이었고 나의 작은 업무는 북경에서 도착하는
타민족 활동가들을 환영하고 수속절차를 마무리하여 그들과 함께 평양행 비행기를 타는 간단한 업무이었지만 [천안문 항쟁] 직후인
북경에서의 움직임은 순조롭지 만은 않은 일이었다. 그 당시 북경에서는 텔레비젼 방송이 거의 진행되지 않고 89년 평양청년축전을
맞이하여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의 사회주의의 성공과 번영을 선전하는 20분 가량의 다큐방송만 계속 방영되었고 만나는 북경시
인민들의 모습에선 슬픔과 분노가 가득 찬 도시였다 .
미군을
아버지를 둔 전쟁고아로 하와이에 입양되었고 성인이 되어서 반전평화운동에 참여하다가 한청련을 만나 우리말 이름을 다시 찾은 윤복동
형 “Andre Hall”, 네바다 사막 지하 핵실험 반대 시위장에서 같이 구속된 것을 계기로 의형제를 맺은 [다넷]족 어린추장
스톰-인 “Storm In”, 북가주에서 중남미로 보급되는 무기운송 열차를 막는 시위 중에 다리가 절단된 브라이언 윌슨님을
비롯하여 미주에서 오는 다수의 활동가를 비롯하여 유럽, 중동, 필리핀 호주 등지에서 참여하는 평화운동가, 정치인과 함께 행진 전날
오전에 평양에 도착한 우리들을 마중나온 김영국 형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사정인즉 미리온 행진 지도부와 북부조국
일꾼 관료들 간에 주최와 행진일정에 협의가 진척이 없어 국제평화대행진이 마치 북부조국에서 주관하는 관광행사 정도로 논의되는 것에
분노한 김영국(당시 한청련 행진단 부단장) 선배가 나성지역 한청련 회원들을 주축으로 하여 평양에 도착해 있던 한청련 회원들의
전체회의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고려호텔 로비에서 농민복을 입고 항의시위를 벌였던 것이었다. 1985년부터
진행되어온 한청련의 국제연대운동과 미 의회를 대상으로 벌여온 주한미군 핵무기 철거 10만 명 서명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준비되어온 국제연대행진이 단순히 청년축전의 연장선에서 북부조국의 선전 행사로 전환되는 것에 행진에 참가한 한청련 회원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행진단이 다 도착한 행진 출발 전날 한청련 회원들은 모임을 갖고 김영국선배의 전날의 항의시위에 대한
비판보다도 우리의 원칙을 고수한다는 입장을 재확인 한 후 북부조국 관료들과의 회의를 재기하게 되었다. 회의가 계속 진전이 없었고
밤늦게 회의 장소에 허름한 인민복에 빵모자를 쓰고 낡은 가방을 든 노인이 들어왔다. 이분이 논의되던 안건을 검토 한 후 북부조국
간부들에게 “동무들은 주최에서 빠지고 일정도 바꾸라우!”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당혹스런 표정의 얼굴을 한
간부들과 행진추진위원회 지도부는 행진 출정식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까지 계속된 회의를 거쳐 국제평화대행진 추진위원회가 단독
주최하는 행진일정에 합의를 보았다. 관광이 아닌 백두에서 판문점까지의 행진 일정 말이다. 이후
김영국 형이 주도했던 개인적 시위가 없었다면 우리의 입장이 북 지도부에 전달되지 않았고, 한청련은 행진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 말을 전해줄 기회는 없었다.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 건국 처음으로 89년 7월 평양 한복판에서
항의데모가 진행되었고 해외에서 온 타민족평화단체의 단독주최의 행사, 북의 어떤 관료기관도 참여하지 않은 독자적 행사가 건국 이후
처음으로 열리게 되었다. 평양에서 11,000Km 떨어진 뉴욕에서 윤한봉의 지도
윤한봉 선배는 1984년 재미 한청련 창립총회를 치룬 후 1985년 8월 9개도시의 지역 한청련 회원 1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1차 총회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고, [통일과 제3세계 연대를 위한 재미동포대회]를 개최하여 해외운동에서 국제외교 연대
운동의 역할과 방향을 제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재미 한청련은 미국 내 코리아문제에 대한 교육과 선전활동, 각 지역 단위에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 연대세력들과 교류와 협력활동, 타민족형제들을 중심으로 한 코리아 연대단체 조직, 그리고 나아가 외교연대 활동
전문일꾼 양성과 전문기구 창설 등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해외 국제연대 역량을 쌓게 됩니다. 그 후 4-5 년 국제연대운동의
일환으로 위싱턴 디씨 한겨레 미주 홍보원설립, 영문기관지 [코리아 리포트] 발행, 주한미군 핵무기철거 10만 명 서명운동 등의
성과를 이루고 각종 영문 교육도서 홍보자료, 영상자료 제작 및 보급, 지역별 공개 토론회 코리안포럼 개최를 통하여 코리안 문제에
관심 있는 진보진영 활동가들과 연대를 강화 한 것을 토대로 국제평화연대행진 과 미주지역연대행진을 조직할 수 있었다. 합수형님이
1984 년에 한반도에서의 국제평화대행진을 구상한 후 틈틈히 내용을 채워가기 위하여 토론할 때만 해도 달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던
것들이 89년 초가 되어 평화대행진 시기가 결정되면서, 엄청난 준비에 돌입하게 되었다. 먹고 자는 일을 제외한 모든 준비는 해외
한청련이 준비해 가야 한다는 원칙 아래 행진에 시위장비, 영문 교육자료의 발간, 판문점 제삿상 물품, 행진단 복장에서 문화행사에
필요한 물품, 그리고 비디오 영상기와 타자기를 포함한 모든 홍보 및 사무기기, 못과 망치까지 미리 명단을 작성하여 평양으로 운송이
되었다. 합수형님은 행진지도부와 참가자들에게 정치적으로 발생한 모든 상황에 대비하여 지침서와 각종 집회의 성명서 초안들을
정리하여 넘겨주고 조국에서 11,000Km 뉴욕 마당집에서 북경 조선대사관을 통하여 연결되는 평양에서의 전화를 기다리며 미주에서
진행되는 뉴욕에서 디씨까지의 평화행진을 뒷바라지를 하고 계셨다. 그는 하루 온종일 쉼 없이 마당집 청소에서 설거지까지 소일거리를
하시면서 앞날을 정확히 예상하고 엄청나게 큰 규모의 국제적 사업과 활동을 구상하고 쉴 틈 없이 추진하는 것에 대해 철없는 우린
당시엔 그냥 당연스럽게만 받아 들였다. 환영인파와 행진단의 벽이 무너지다
평양축전기간 내내 평양 시민들은 한복을 차려입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박자에 맞추어 꽃을 흔들어 축전 참여자들을 환영을 하였다.
행진단이 행진 시작지인 백두산으로 가는 길마다 이러한 환영을 계속되었지만 행진단원들에게 사실은 더운 날 동원되어 오신 분들에게
미안하고 거북한 환영인사였다. 하지만 백두산에서 행진이 시작되면서 행진단은 풍물패를 앞세우고 준비해간 구호를 꾸준히 외치자
북부조국 동포들은 생소한 박자의 구호에 동참하여 외치기 시작하였다. 백두산 주변 마을에서 오신 주민들은 한눈에 보기에 건강하고,
순박하고, 낙천적인 젊은 환영인파들이었고 우리는 축제분위기에서 그 들을 뒤로 하고 백두산 기슭 환영 인파가 없는 길을 운동가요를
목소리 높여 부르면 판문점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행진이
텔레비젼으로 연인 방송되어 평양에 도착하면 대규모의 환영인파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란 말을 대충 듣고 평양도심에서 행진이
시작되었고, 도로변을 질서정연하게 빽빽히 나열하여 꽃을 흔드는 평양시민들 사이로 우리는 구호를 외치면 싸이카를 따라 행진 하는
중에 장대 같은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분단장애물을 넘어 한라산까지 간다는 우리 행진단에게 어느 지점, 어느 때에서 부터인가
여름비에 쫄닥 젖은 할머니들이, 목이 메인 소리로 구호를 따라 외치면, 우시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몸소 체험한 전쟁과
분단의 고통을 마냥 호소하는 사무친 눈물, 판문점 넘어 있을 가족과 핏줄에 그리움을 토해 내듯이 그냥 우시는 것이었다. 씩씩하게만
걷던 행진단원들도 이젠 빗물과 눈물이 구분되지 않은 얼굴로 목매인 구호를 외쳤고, 질서정연하게 나열된 환영인파는 싸이카를 넘어
행진단을 에워싸 행진단원들을 팔을 잡아주고 끌어안기 시작하였다. 축전에 참가하면서 항상 질서정연하고 규율 있게 연출된 환영단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몇몇 타민족형제 청년들도 평양시민들의 새로운 반응을 보면서 묘한 감동에 빠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무너지는
인파를 막으려고 무리한 행동으로 안간힘을 쓰는 당황해진 관리들과 안내요원들을 보면서 이 장면은 일상적인 모습이 아니고 북부조국
당국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로청에서 파견 나온 우리 연배의 한 안내원은 그날 저녁, 우리에게
평양시내에서 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일은 없었다는 말로 사리원과 개성의 행진에 대한 걱정과 기대를 전해 주었다. 엉성한
주택건설이 도시 곳곳 진행되는 황해도 사리원시에는 마치 전 시민이 거리로 다 모여 나온 것 같았다. 더 이상 화려한 한복에 꽃을
흔드는 환영인파가 아닌, 행진단보다 더 치열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열광하는 인민들의 모습들은 한청련 회원들이 그동안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집회현장에서 경험한 어떠한 강열함 보다 깊이 머리속 마음속에 각인 되었다. 사리원시의 행진은 몇 차례 인민들의
인파에 의하여 중단되었고 목적지까지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안전상황을 대비하여 중단하게 되었다. 행진 베너에 혈서를 쓰겠다고 피
묻은 손으로 달려드는 청년들에서부터 무작정 우리와 같이 판문점을 넘겠다고 때를 쓰는 어린 학생들과 행진단을 만져보고자 길을 막는
인민들을 남기고 개성으로 발길을 향했다. 평양이
질서가 무너졌다면 사리원은 통제가 불가능 상태에서 행진단과 인민들의 안전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이산가족 인구가
월등히 많은 개성시 행진을 포기하고 판문점으로 바로가자는 의견이 개진되었지만 이 소식을 들은 개성시 당국자들은 행진을 포기하면
개성시민의 항의를 감당할 수 없다며 대안으로 노년들과 학생들을 제외한 청장년들의 대다수를 시외로 인원을 동원하겠으니 개성시에게 꼭
행진을 하도록 해 달라며 요청하였고, 행진단은 개성시를 마지막으로 행진하여 판문점으로 향하게 되었다. 판문점을 향하기 위하여
DMZ를 들어서면서 행진단은 16개 참전국 언어들로 [평화]가 쓰여진 새로운 (미국에서 준비해온) 베너를 들고 판문각으로
행하였다. 판문점 국제평화대회 1989
년 8 월 27 일 워싱턴 디씨에서 “한반도 전쟁종식을 위한 평화대회”를 개최하고 뉴욕에서 출발한 행진단에 의해 11 만여 명의
서명지가 미 의회에 전달되는 시간에 서독, 필리핀, 남아프리카, 호주에서 타민족형제들이 연대시위를 개최하였다. 판문점 안에서는
세계 유명언론들의 취재하에 행진단은 27 일 당일에 맞추어 도착한 캐네디 상원의원 정책보좌관을 포함한 미의회 참석단, 문규현
신부님이 동참한 국제평화대회가 열렸고 행진에 참가한 타민족형제들을 중심으로 그 동안 준비해온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연대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그날 한청련 회원들의 머리에는 온통 오늘 판문점을 넘어 남부조국으로 갈 것인가 그리하여
한반도의 분단의 현실, 군사긴장과 전쟁의 위협을 전세계에 알릴 것인가로 차 있을 뿐이었다. 국제평화행진단이
판문점을 넘는 순간 자동적으로 전쟁이 돌발할 수 있다는 북측 군부의 경고와 판문점내에서 외부와 (특히 미국과의) 통신이 완전
차단된 상황에서 분단선을 통과하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판문점 통과 허용을 요구하는 단식을 행진단의 일부, 문규현 신부님과
임수경님이 판문점 북측에 위치한 통일각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6 일간 진행되는 단식동안 매일 판문점 앞에 나가 남부조국을 향하여
통과를 호소하였지만 높은 분단의 장벽은 평화행진단의 판문점 통과를 막아버렸다.
단식
2일째부터 방송에서는 9 시저녁 뉴스의 첫 소식이 수령에 관한 것이 아닌 통일각 단식 행진단의 소식으로 방송될 만큼 북부조국의
인민들의 평화와 비핵화에 대한 관심은 행진단에 의해 고조되었고 그후 2 차 행진이 북부조국 당국에 의하여 거절되었 때 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재미한청련은
같은 해 10 월 뉴욕 유엔본부 앞 길바닥에서 평화협정체결 촉구와 유엔분리가입 저지를 위한 3 주간의 단식농성 치렀고 12월에는
밀린 자금마련을 위해 맨하탄 길거리에서 밤낮으로 크리스마스 나무를 파는 재정사업을 벌이는 것으로 한해를 마감했다. 그해 남부조국
군부정권에 의하여 재미한국청년연합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모략하였지만 국제평화대행진 2 년후 미국은 1991 년
주한미군의 전술핵 (공군용 제외)의 폐기를 발표하고 남/북부조국은 공동으로 사실상 핵개발을 포기하기로 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하게 된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윤한봉 선배님의 국제연대활동이 80 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반전반핵평화운동 커뮤니티와 제3세계
연대운동에 미친 성과는 형님이 93년 귀향한 후 잊혀진 한 장의 역사가 되어 버렸다. 형님은 부단한 공부와 연구, 탐구와 적용,
실천과 반성의 과학적인 운동론 수립 과정과 절제된 생활과 헌신을 통하여 먼 앞을 내다보고 운동하는 존경받는 국제연대운동의 선지자가
되었고, 귀국 앞두고 한청련 회원들에게 코리아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 다시 해외로 나와 후배들게 함께 고통받는 제 3 세계
민중들의 투쟁에 동참하기 위하여 아프리카든 어디든 국제연대활동이 필요한 곳으로 같이 가자는 약속을 남기고 미국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