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집은 만드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운영비 마련은 더욱 힘들었다. 장광선은 이때의 심정을 2014년에 고백한다.
“저도 사실은 속으로 겁나고 걱정이 된 거죠. 이걸 어떻게 운영할까. 이걸 아주 헌신적으로 청년들이 자기 먹어야 할 끼니를 매일 한 끼씩 굶어가면서, 또 인제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뒤로 밀쳐놓고 앞장서서 어떤 크리스마스 때 같으면 출입하는 활동을 거리에 나가서 하고 뭐 꽃 파는 활동을 정말 그 거리에 나가서 하고. 이런 활동들을 해가면서 모금을 해가지고. 또 그 다음에 자기가 일을 하는 사람은 벌이에서 적어도 뭐 한 교회 십일조 이상 십 분의 삼 내가면서 마당집을 훌륭하게 꾸려나가면서 확장해나가는 것을 보면서 선배들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이것을 마련해 줄 수 있었고 이것을 토대를 닦아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윤한봉 선생님의 그 기량과 그 다음에 국내활동에서 쌓아 오셨던 조직 활동 경험, 기초. 이론 학습, 이런 것들이거든요.”
필라델피아 마당집은 지역의 한계 때문에 나중에 문을 닫지만, 장광선의 동생 장광민은 뉴욕을 거쳐 시카고로, 신경희는 로스엔젤리스로, 홍정화는 워싱턴디씨로, 정승진은 뉴욕으로 가서 뉴욕 마당집인 민권센터의 책임자로 일하는 등 탁월한 활동가를 여럿 배출했다. 장광민의 경우는 형을 따라서 고등학생 때부터 한청련에서 활동해, 본래 18세 이상 40세 이하이던 연령제한을 그에게 맞춰 17세로 낮췄을 정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