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다니던 1982년 10월,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후배 박관현이 감방에서 군부독재에 항의하는 장기간 단식 중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들불야학 강학의 한 명이던 박관현은 윤한봉의 권유로 1980년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던 아끼던 후배였다. 항쟁이 시작되기 사흘 전의 비상모임에서 다가올 군부의 대대적인 탄압에 맞서 각오를 단단히 하자고 격려해 보낸 게 마지막 만남이었는데 죽음의 소식이 미국까지 전해온 것이다.
외롭고 슬플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마당 구석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며 울고 또 울었다. 윤상원의 죽음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도록 부끄럽고 분했는데, 유달리 아끼던 후배의 한 명인 박관현까지 목숨을 바쳤다고 생각하니 도미 1년이 넘도록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를 않았다.
울분과 자책감을 견디지 못한 윤한봉은 박관현의 죽음에 항의하는 단식농성을 하기로 했다. 절친해진 홍기완이 동조해주었다. 둘이서 미국 친우봉사회 사무실을 빌려 10일 간 둘이 단식농성을 했다. 일종의 추모식이었다. 단식 소식을 들은 동포 운동가들이 꽤 많이 찾아와준 것도 격려가 되었다. 미국 내 한국어 신문들도 작게나마 다뤄준 것이 힘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