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살 직후인 1980년 6월 9일, 로스엔젤리스의 고급한식당인 영빈관 주차장에서 열린 전두환 규탄집회에는 보수니 진보니 할 것 없이 30개가 넘는 단체에서 1천 명 이상의 한인들이 참가했다. 이 단체들은 민주화운동단체협의회로 발전해 1981년 1월의 전두환 방미 때는 며칠이나 쫓아다니며 시위를 벌여 미국언론에 보도되었다. 이후에도 그 주동자들은 매주 화요일마다 올림픽가의 ‘김 방앗간’에 모여 정세를 분석하고 운동의 내용과 방향을 토론하고 있었다.
젊은 유학생들도 정치에 민감했다. 로스엔젤리스 한인 점포들의 벽에 ‘전두환 찢어 죽여라!’는 낙서가 그려지던 시절이었다. 광주학살은 미국 내 여러 대학에 남한 정부를 반대하는 소모임을 만드는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을 경험하고 온 유학생이나 한국 국내보다 더 정확히 정치상황을 알 수 있던 이민자의 자녀들이 주축이 된 이 자생적인 소모임들은 한국의 소식을 공유하고 진보적인 서적들을 학습하며 구체적인 활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