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무지고 영특한 아이, 말 잘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는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었다. 윤한봉은 여기에 한 가지 특징을 더 가지고 있었다. 유달리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었다. 1950년대에는 전쟁으로 인한 거지가 넘쳐났다. 농촌마을마다 유랑하는 빈민들의 구걸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거지가 오면 어머니는 식구들이 먹을 만치 남기고 적당히 밥을 퍼주기 마련이었다. 윤한봉은 이게 불만이었다. 어머니가 없을 때 걸인들이 오면 집에 있는 밥을 몽땅 퍼주었다. 타고난 동정심이 너무 크다보니 어려운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도 못했다. 정미소를 하는 아버지가 누구네 집에 가서 도정비를 받아오라고 시키면 미적대다 못해 억지로 가다 말고 돌아와 버렸다. 반대로 할머니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이나 떡을 나눠주라고 시키면 바람처럼 튀어나가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왔다.
나눠주는 성격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걸인이 아니라도 대다수 농민들이 허기져 살던 시절이었다. 전쟁 통에 토지개혁이 이뤄진 직후여서 다들 비슷비슷하게 살았다. 빈부격차가 있다고 해도 과거 봉건시대나 훗날의 자본주의 시대와는 달랐다. 윤씨네도 마을 제일의 부자라지만 초가집에 살았고 직접 땀 흘려 일했다. 다만 정미소를 하니 쌀은 떨어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마루에서 밥을 먹다가도 누군가 문밖으로 지나가면 꼭 불러들여 나눠 먹었다. 농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볏짚 한 단도 귀했다. 할머니는 어려운 집에 볏짚 한 단이라도 땔감으로 갖다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할머니의 후한 인심은 근동에 유명했다. 집을 나설 때면 항상 앞치마에 쌀 잔뜩 담아 이 집 갖다 주고 저 집 갖다 주었다. 먼 이웃의 제사에도 쌀이 없다면 쌀을 갖다 주고 애기 낳은 집에는 미역을 갖다 주었다. 식구들은 할머니를 ‘개구멍이 반질반질하도록 남을 위해서 퍼 나른 분’으로 기억할 정도였다. 윤한봉뿐 아니라 형제들이 모두 민주화투쟁으로 감옥에 드나들면서도 지금까지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이 다 할머니의 음덕이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윤한봉은 어려서부터 할머니를 꼭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 그런데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것도 닮았다. 할머니는 평생을 남에게 퍼주고 살았지만 본인의 쌀이 떨어지면 누구에게도 궁한 소리 않고 굶을 사람이었다. 나중에 운동을 하면서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신세를 지게 되지만, 어린 시절의 윤한봉도 그랬다. 동생들과 광주에서 자취하던 고등학교 때였다. 추석에 학교가 하루밖에 안 놀아 집에 가지 못한 때가 있었다. 주인집에서 딱하다며 송편을 가져오자 윤한봉은 동생들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하고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동생들이 먹고 싶어 하자 야단을 쳤다.
“거지도 아닌데 왜 남에게 얻어먹어? 절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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