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언행록

 
 
 
제목46-12년 만의 귀국2019-01-09 10:07
작성자

12년 만의 귀국

 

93년 5월 12일의 늦은 오후 서울의 모 신문사 기자 한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영상 대통령의 특별담화 내용 중에 나의 수배해제와 귀국허용 조치가 들어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전화였다. 

나는 한참 동안을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원수 같은 전화는 그때부터 귀국하는 순간까지 내게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을 잠시도 주지 않았다. 정말로 빗발치듯했다. 시간차를 모르는 듯 한밤중에도 전화는 끊이지 않았다. 

축하 전화, 인터뷰 요청 전화,내일이라도 당장 귀국하라는 광주로부터의 독촉 전화,가족들 전화,각 지역의 회원들 전화…

나는 92년 말부터 조국에서 대선이 끝나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 귀국을 허용해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와 예상은 하고 있었다. 공안정국 때문에 일시 활동이 중단되었던 나의 ‘귀국 추진위원회’가 92년 3월부터

활동을 재개했다는 소식은 말할 것도 없고,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가 앞장서서 나의 귀국 허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서명운동을 전개해서 7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했다는 소식,광주의 재야와 5.18 관련 단체들도 5.18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나의 귀국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소식,YS 정권에서도 5.18 문제 해결을 위한 전향적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 등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늦어도 연말에는 귀국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나는 정부 당국이 나의 귀국을 허용하더라도 사전에 귀국 허용 조건으로 미국 내에서의 활동을 반성한다느니 YS 정권을 지지한다느니 하는 따위의 각서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하고,그럴 경우에는 5월 영령들과 해외한청련,한겨레와 각 지역 마당집과 우리 집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각오까지 단단히 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 대한 수배해제와 귀국 허용조치가 나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갑작스럽게 대통령의 담화를 통해서 내려져 버린 것이다.

나는 전화에 시달리면서도 순간순간 생각을 정리해 ‘내가 귀국하면 공항에서 구속될 가능성이 높다. 구속될 경우를 대비해 언제 다시 볼지 모를 회원들과 후원자들,그리고 개인적으로 보살펴 주신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 후 귀국하자. 각 지역을 돌며 인사하고 뒷정리를 하는 데는 두 달 정도가 필요하다. 7월 중순경에 귀국하자.’라고 결정했다.

나는 광주에 나의 결정 내용을 알리고 언론과 인터뷰할 때도 그렇게 밝혔다. 그랬더니 광주에서는 5월 행사 주간에 꼭 귀국해야 한다며 난리를 피웠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바꿔 ‘일단 귀국하자. 구속이 안 되면 2주간만 있다가 나와 인사를 하자. 구속되면 법정과 옥중에서 계속 싸우자.’라고 결정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국무총리 앞으로 “나의 귀국 허용이 5.18 민중항쟁의 정당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재미한청련을 이적 단체로 몰았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내린 조치인가 아니면 해외운동을 와해시키고 나를 구속하기 위한 음모에서 비롯된 조치인가?”라는 내용의 공개질의서를 발송했다. 내가 그런 공개질의서를 보낸 까닭은 재미한청련의 목에 걸린 올가미를 나의 귀국을 통해 확실히 풀어버리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빨리 귀국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회원들과 후원자들은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윤한봉 선생 안전귀국을 위한 해외 대책위원회’를 꾸려서 내가 구속될 경우를 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미국 생활 12년 만에 처음으로 영사관에 찾아가 임시 여권을 발급받았다. 그리고 시간을 쪼개 해외 각지에서 정치적 이유로 귀국을 못하고 있는 분들과 도와주신 여러분들 그리고 각 지역 회원들과 마당집 식구들에게 대충대충 전화 인사를 하고 내가 거처하던 민족학교 자료실을 청소하고 재미한청련연합 회장인 정민 씨에게 이것저것 당부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 쁘게 움직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회원들이 급히 구입해 놓은 양복과 구두를 거절하고 평소 입던 옷 중에서 제일 좋은 옷으로 골라 입고 평소 신던 운동화를 신고 똥가방을 맨 채 마지막으로 민족학교를 구석구석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민족학교,나의 혼이 스며있는 민족학교는 날더러 가지 말라며 자꾸만 발목을 붙잡았다.

나는 눈물을 감추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똥가방 속에는 조국에서는 면으로 만든 옷값이 비싸다며 회원들이 사준 하얀 속옷 10여 벌과,회원들이 비행기 안에서 먹으라며 비닐봉지에 담아 준 내가 좋아하는 호박죽과, 민족학교 뒤뜰에서 내가 직접 가꾸었던 풋고추가 들어 있었다. 나는 동행하기로 한 최진환 박사님,강완모 한청련 부회장과 함께 눈물로 배웅해 주는 회원들을 뒤로 하고 샘솟듯 눈물이 솟구쳤지만 애써 눈물을 감추며 LA국제공항 검색대를 통과했다.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조국에서 오신 손님들을 배웅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저곳을 통과해서 비행기를 타고 조국으로 돌아갈까?’하고 생각하며 수없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기만 했던 바로 그 검색대를 통과해서 묵직한 납덩이를 매단 듯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는 탑승구를 지나 비행기에 올랐다.

 

1993년 5월 19일 LA발 서울행 대한항공

 

비행기에 오른 후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귀국길에 오르고서야 내가 우리 회원들과 얼마나 정이 깊이 들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추억 속에 명멸하는 수많은 얼굴들이 비행기가 이룩한 후 두 시간 동안이나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그리고 12년 만에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온갖 생각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서른네 살에 왔다가 마흔 여섯 살이 되어 돌아가는구나.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중년이 되어 돌아가는구나. 젊음을 송두리째 바쳐 원없이 뛰다가 이제 돌아가는구나. 캄캄한 밤에 외항선에 숨어 타고 떠나온 조국에 백주 대낮에 보란 듯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는구나. 떠나올 때는 36일이었는데 돌아가는 길은 12시간이구나. 떠나올 때는 화장실 바닥에 혼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동행자들과 함께 좋은 의자에 편히 앉아 가는구나. 떠나올 때는 칫솔 하나 찬 빈털터리였는데 지금은 똥가방도 있고 회원들이 급히 모아준 몇 천 불의 돈도 있는 부자가 되어 돌아가는구나.

그래 구속해 봐라,덕분에 좀 쉬고 밀린 책도 좀 보자. 그리고 법정과 감옥에서 악착같이 싸워보자.

 

5월 영령들이여! 옛 동지들이여!

미국에 도착한 후 다짐했던 대로 살아남은 죄,도망친 죄를 깨끗이 씻고 가기 위해 편안한 생활하지 않고 부끄러움 없이 살다가 돌아갑니다. 열심히 운동하다 돌아갑니다. 조국운동,광주운동을 훼손하거나 더럽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운동하다 돌아갑니다. 미국을 객관적으로 보고 배울 것은 배우고 갑니다. 세계에는 우리 민족보다 훨씬 더 한 많은 역사,훨씬 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인종과 민족과 종족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깨닫고 갑니다.

국제사회와 해외 동포사회에 대해서도 제법 배우고 갑니다. 정세분석 훈련도 열심히 하고 갑니다. 목욕도 한 달에 두 번씩만 하고 운전도 안 배우고 영어도 안 쓰고 침대에서 자지 않고 ‘내 것을 갖지 않고 허리띠 안 풀고 12년을 살다 돌아갑니다. 몸이 좀 쇠약해지고 늙은 것 빼고는 변한 데 없는 촌놈 ‘합수’, 그대로 돌아갑니다.

 

5월 영령들이여! 옛 동지들이여!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다 이루고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정세 분석 훈련을 열심히 하기는 했으나 분명한 한계를 느꼈습니다. 비록 12년 동안 해외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정세 인식을 잘못하거나 정세 전망을 잘못해서 주위 사람들이나 회원들로부터 지탄받거나 책임 추궁을 당한 적은 없었으나 독일의 통일,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를 전망은커녕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니카라과의 대선에서 산디니스타 정권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차모로에게 패배할 줄은 전망도 못했고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미국이 인구가 10만도 안 되는 그라나다를 침공하고 또 파나마를 침공하여 명색이 한나라 대통령인 노리에가를 잡아와 미국 감옥에 넣는 것은 예상은커녕 상상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해 도 못했었습니다.

걸프전 때도 미국이 그렇게 신속하게 그렇게 엄청난 병력과 무기를 투입해 이라크를 공격할 줄은 예상도,상상도 못했고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 순순히 전쟁 비용을 분담해 내놓을 줄 또 한 예상도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정세 분석과 전망에서 한계를 느끼고 정세의 변화에 충격만 받았던 이유는 저에게 지식과 정보와 자료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와 호주와 서독과 스위스를 제외하고는 세계 어느 곳도 가본 적이 없는 제가 국제 정세를 제대로 분석 전망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욕심이었던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와 자료를 토대로 한 정세 분석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훈련해 나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더 많고 정확한 지식과 정보,자료를 얻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력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5월 영령들이여! 옛 동지들이여!

못난 저는 82년 말에 세운 해외 운동 10년 계획 중 몇 가지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해외한청련을 만들기는 했으나 일본의 청년 운동은 참여시키지 못했습니다. 2세 운동도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10년 계획에는 안 들어 있었지만 세 가지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스위스의 제네바에 국제 외교 연대 마당집을 설립하려다 실패했고 LA 한인회를 개혁하려다 실패했습니다. 면목 없고 부끄럽습니다!

어느덧 비행기는 조국의 하늘로 들어섰다. 광대하고 거친 그래서 귀신마저 머물 곳이 없는 미국의 산천과는 전혀 다른, 꿈에 그리던 아늑하고 부드러운 조국 산천을 내려다보며 나는 눈시울을 적셨다.

“마침내 돌아왔구나!”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승무원들이 다른 손님들이 내리는 것을 막고 우리 일행을 먼저 내리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구속하기 위해 그런 줄 알고 마음을 다잡은 뒤 최진환 박사,강완모 씨와 함께 걸어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우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수많은 카메라의 섬광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카메라 앞에 서 본 적이 없던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앞에서 당황하고 말았다. 사진 기자들은 날더러 두 팔을 번쩍 들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침묵으로 거절해 버렸다. LA에서 시사저널과 인터뷰할 때 밝힌 것처럼 나는 도망자이지 개선장군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자들과 환영객들 사이를 정신없이 밀려다니고 끌려 다니다가 어느 응접실 같은 곳에 들어가 수많은 기자들 앞에 앉았다. 기자들로부터 귀국성명서 발표 요청을 받고 나서야 나는 구속될 것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만 하고 왔지 언론들과 마주할 경우에 대비한 준비는 하나도 안하고 온 나를 발견하고 어색해서 머리를 긁었다. 대충 기자회견을 마친 나는 환영 나온 일가친척들과 정상용, 정용화 등의 옛 동지들,그리고 죽마고우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광주에서 올라온 버스를 탔다. 차창 밖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버스에 함께 탄 옛 동지들과 친지들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보면 볼수록 흐뭇했다.

 

“기어코 우리는 다시 만나고야 말았구나!”

 

나는 그날 밤을 광주의 둘째형 광장 형님 집에서 자고 다음 날 21일 아침에 망월동으로 가 5월 영령들 앞에 무릎 꿇고 죽지 못하고 도망간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명복을 빌며 큰절을 올렸다.

13년! 그 13년 만에 나는 광주로 돌아와 영령들 앞에 사죄를 하고 명복을 빈 것이다. 국내 도피생활 1년,망명생활 12년을 합한 그 13년 동안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려 왔던가! 마침내 나는 망월동 영령들 앞에서 사죄를 하고 명복을 빈 것이다. 영령들 앞에서 용서를 빌고 나니 13년 동안 나를 그렇게 짓누르고 있던 죄의식과 가슴의 응어리가 많이 녹아내려 나는 무척 홀가분한 마음으로 망월동을 떠나왔다.

그 후 고향 강진으로 내려가 죽은 자식 살아난 듯 울며 기뻐하시는 늙으신 어머님을 뵙고 선영을 찾아 인사 올렸다. 그리고 나를 숨겨주신 것 때문에 고초를 겪으셨던 강진의 김용근 선생님 묘소와 오송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신 군산의 이광웅 선생님 묘소를 찾아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80년 5월 27일 새벽,전남 도청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체포된 후 고문 후유증으로 나주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는 김영철을 괴로운 마음으로 찾아갔다가 괴로운 마음으로 떠나왔다.

광주에서 환영식,전국연합의 서울 환영식,민청학련사건 관련 동지들의 환영식에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참석해서 부담스러운 꽃다발을 받았고, 그때마다 짧은 인사말만 되풀이했다.

 

“명예가 아닌 멍에로 알고 살아가겠다.”

“퇴비처럼 짐꾼처럼 열심히 살아가겠다.”

 

조국의 하늘은 변함이 없었고 고향산천도 여전히 아늑했다. 그러나 설자리가 아닌 곳에 이상하게 수많은 아파트들과 늘어진 차량들과 혼탁한 공기와 한참을 보아야 옛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벗들과 동지들의 얼굴에서 나는 I2년 세월의 무상함을 조금씩 느껴가기 시작했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