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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44-광주의 충격2019-01-0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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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충격


 귀국한 직후 나는 몇 사람으로부터 몇 차례 똑같은 당부를 받았다.

“광주에서 편안히 대접받고 살려면 DJ와 모 운동세력과 5월 단체들과 충돌하지 말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라.”

당시에 나는 그런 당부를 웃어넘겨 버렸다.


“내가 편안히 대접받고 살려고 귀국했나? 잘못하고 있으면 비판하고 잘하고 있으면 함께하거나 도와야지.”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DJ측과도 모 운동세력 측과도 일부 5월 단체들과도 부딪치고 말았다. 

일부 5월 단체들,일부 운동 세력 측과 내가 부딪치게 된 이유는 나의 환멸과 분노 때문이었다. 

영령들에 대한 죄책감과 도망자로서의 죄의식을 안고 10여 년 동안 열심히 운동하다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5월 관련자 들이나 단체들은 광주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내가 이리저리 알아보았더니 외면당하는 이유는 일부 5월 관련자들과 일부 운동세력 측이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단을 위한 투쟁은 훌륭하게 했으나 평상시에 5월 항쟁은 자신들만 했던 것처럼 행세하며 

항쟁의 주역이었던 시민들을 5월과 무관한 사람들로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5월을 자신들의 개인적 명예와 채권과 이권으로 

간주하는 듯한 처신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심한 환멸과 배신감을 느꼈고 더 나아가 절망하고 분노하게 되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5월 관련자들이 학살정권과 싸우면서도 항상 모든 영광은 영령들께 돌리고 자신들은 한쪽에 비켜서서 

예우나 받는 자세를 유지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올바른 5 • 18 정신계승을 위해 노력하기로 마음먹고 서둘러 5.18 기념재단 설립 활동에 뛰어들었다. 

귀국해서 보니 5.18의 기념과 계승을 위한 재단 설립 문제를 놓고 5월 관련자 들이 둘로 나뉘어져 서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나는 5.18과 정신계승 사업의 주체가 될 재단이 올바르게 설립되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귀국한 지 한 달 만에 그 일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나는 귀국 후 망월동의 영령들께 찾아가 “저는 앞으로 5 • 18 정신의 계승과 도망자의 빚을 갚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다짐한 대로 앞으로 설립될 재단에서도 어떠한 지위나 직책도 맡지 않겠다고,산파 역할만 하겠다고 선언하고 그 일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5월 관련 단체들과 상당수의 운동가들,일반 시민들, 해외동포들이 참여한 5 • 18기념재단은 

많은 갈등과 진통 끝에 1년이 지난 94년 8월 말에야 창립되었다. 

갈등과 진통의 이유는 복잡했다. 5 • 18기념재단 창립선언문 중 일부를 참고로 실어보겠다.

 (재단 창립선언문은 내가 직접 써서 추진 위원들의 동의를 받아 창립 대회장에서 낭독되었다.)


“5월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이며 채권도 이권도 아니고 채무이고 희생이고 봉사입니다. 

5월은 광주의 것도 구속자,부상자,유가족의 것도 아니고 조국의 것이고,전체 시민과 민족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또한 5월이 광주의 5월로 올바로 서야 진정한 전국화,세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5월이 다시 섰습니다. 구속자,부상자,유가족들이 5월을 더럽히고, 가신님들을 욕되게하고,광주를 부끄럽게 하고,

시민들을 분노케 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80년 5월의 정신과 자세로 되돌아갈 것을 다짐하며

 가신님들과 7천만 겨레 앞에 옷깃을 여미고 섰습니다. 시민들 앞에 고개 숙이고 나란히 섰습니다. 

5,18 기념재단이 창립되었습니다. 가신님들이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나는 처음에 선언했던 대로 재단의 어떤 지위나 직책도 맡지 않았다. 그러나 재단 설립 과정에서 나는 추진위원으로 함께 활동했던 

김현장,윤강옥과 마찬가지로 협박 전화를 받고 폭언을 듣고 충격적인 모함 중상도 당했다.

“안기부와 짜고 들어와 광주,전남의 운동을 분열시키려고한다.”

“청와대의 지원을 받아 모 정파와 손잡고 우리를 깨려고 한다.”

“수상한 놈이다.”

   

꿈에 그리던 조국에 돌아와 광주에 돌아와 그것도 운동한다는 사람들로부터 협박과 중상을 당한 것이다.

여가 선용 차원에서 운동한답시고 설치는 해외의 일부 못된 사람들이 나와 민족학교,한청련에 대해 중상을 해 왔을 때마다 

나는 마당집 식구들이나 회원들에게 “조국 운동권에는 이런 더러운 짓을 하는 사람들이 없다. 

그 사람들은 운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말 하곤 했는데 돌아와 보니 조국의 운동권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운동의 탈을 쓰고 5월을 팔고 조국과 민족을 파는 일부 위선자들이 재단 설립 과정에서 자신들의 주도권과 영향력과 

명예와 권위가 훼손되었다고 판단되자마자 대뜸 그런 모함 중상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런 중상은 미국에서와는 달리 나의 분노만 촉발시켰을 뿐 거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환멸을 느껴 5.18 기념행사장에는 귀국 후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도청 앞에도 망월동에도 행사 때는 가지 않았다. 

또 중상을 한 모 운동 세력들이 설쳐대는 행사장에도 아예 가지 않았다. 대신 이곳저곳의 강연회나 토론회의 연사나 토론자로

초청받아 5월 정신의 올바른 계승과 올바른 운동을 강조하고 호소하는 활동만 했다. 


나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설립인가를 받은 5.18기념 재단의 사무실 현판식을 3시간 앞두고

5월 영령들께 보고를 드리기 위해 조비오 이사장님을 비롯한 이사님들 그리고 설립 추진위원들과 함께 망월동에 찾아갔다가 

재단 설립 과정에 불만을 가진 일부 관련자들로부터 횡포를 당하고 “〇〇〇 팔아서 돈과 명예를 챙기는 놈들”이라는 욕설을 듣고 

모두들 분향도 묵념도 못하고 쫓기듯 돌아온 그날의 참담함을!

 

 "나는 80년 이후 오늘까지 5월 영령들을 가슴에 고이 모시고 살아왔는데,5월 정신을 가슴에 안고 해외에서나마 

내 나름대로 열심히 실천해 왔는데,보상금도 받지 않았고 5월에 관련된 어떠한 명예도 챙긴 적이 없는데 이렇게 영령들께 참배도 못하고…’


그런 일이 있고 난 얼마 후에 나는 미국에서 찾아온 한청련 회원들과 함께 망월동에 참배하러 갔다. 

참배를 마친 한 여자 회원이 비닐봉지에 묘역의 흙을 하도 많이 퍼 담기에 물었다.

“마당집마다 다 있는데 또 어디다 쓸려고 그렇게 많이 담지?”

여자 회원이 이렇게 대답했다.

“회원들 결혼 선물로도 주고 아기를 낳을 때마다 축하 선물로 줄려고 그래요.”

“.......”

   

나는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그래,5월은 광주만의 것은 아니지 . 5월 정신을 광주에서만 계승하는 것은 아니지. 그래,너무 절망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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