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전쟁 위기에 대응하다 10월 대회와 총회를 마친 우리들은 조국의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은 채 ‘국보철 미국본부’ 이름으로 미국 캐나다 호주에서 양심수 돕기 운동을 전개해 장기수를 포함한 131명의 양심수들에게 1만 불에 해당하는 내의와 양말을 보내고 방미 중이던 가수 안치환씨의 북미주 순회공연을 추진해 7개 지역의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92년 12월 당시 우리는 87년 대선 때 깊숙이 뿌리내린 지역주의 때문에 DJ가 패배하고 YS가 승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주의의 광풍에 휩싸인 조국의 대선 과정을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93년 1월이 되자 우리들은 냉전체제도 무너졌고 남,북부조국 사이에 남북불가침 부속합의서까지 발효된 마당에 미군의 계속된 주둔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화군축운동 차원에서 백악관에 미군 철수를 촉구하는 전보치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동서남북으로 뛰어다니고 밤낮으로 전화를 걸어 동포 6백 50명과 타민족 형제 2백 50명의 참여를 이끌어 내 백악관에 905통의 전보를 몰아쳤다. 전보치기가 끝났을 때는 북부조국의 핵개발 문제를 둘러싼 조국에서의 군사긴장이 한층 더 고조되어 있었다.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재개,국제원자력기구의 북부조국에 대한 압력 강화,북부조국의 핵확산 금지조약 탈퇴,북부조국 핵문제의 UN 안보리 상정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는 우리들을 극도의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들은 조국에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3월의 한청련,한겨레의 합동회의에서 조국에 조성된 전쟁 위기 상황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의 비핵화와 영구적인 평화 정착을 촉구하는 의견 광고를 한겨레와 해외한청련 이름으로 워싱턴포스트지에 게재하고 UN 본부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기로 긴급 결정했다. 한청련과 한겨레는 광고 게재 운동에 동참할 개인과 단체들의 모집과 필요한 광고료 모금을 위해 조직 역량을 총동원했다. 우리들은 50일 동안을 조국을 전쟁 위기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그 결과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국제평화기구를 비롯해서 화해를 위한 국제 신앙인회,평화와 자유를 위한 국제여성연맹 등의 전국적 단체, 캐나다 성공회,호주 연합교회 총회,미국의 메리놀 신부회,콜롬반 신부회 등의 종교단체와 유럽의회 의원 7명과 호주의 전 현직 의원 2명,뉴질랜드 국회의원 2명, 11명의 대학교수,5명의 변호사,1명의 주교를 포함한 15명의 목사와 신부,12명의 저명인사와 지도적 운동가 등 타민족 형제 단체 20개를 포함한 78개 단체와 타민족 형제 377명을 포함한 849명의 개인을 참여시켰다. 모금도 1만9천 달러를 해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우리들은 준비된 광고를 5월 12일자 워싱턴포스트지에 실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갔다. 첫째,국제원자력기구와 유엔은 핵확산금지 원칙을 공정하고 일관성 있게 적용할 것. 둘째,국제원자력기구와 유엔은 남북 간에 맺어진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존중하고 코리아의 핵문제를 코리언들 스스로 해결하게 놓아둘 것. 셋째, 현재의 위기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영구 중단하고 북에 대해 핵무기를 쓰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것. 그리고 N. Korea는 핵확산 금지조약 탈퇴 선언을 철회할 것. 넷째,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결과 지난 40년간 Korea에서 지속된 위기 상황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유엔과 N.Korea(북부조국)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은 주한 미군을 철수할 것. 나는 그 때 워싱턴포스트지 광고 게재 운동이 내가 미국에서 한 마지막 활동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광고가 나간 93년 5월 12일 그날 오후 늦게 민족학교에서 유엔본부 앞 단식 준비와 제13주기 기념행사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있던 나는 조국의 모 신문사로부터 대통령 특별담화 내용 중 나의 수배해제와 귀국 허용 조치가 발표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5월 19일에 꿈에 그리던 조국을 일시 방문한 후 망명생활 청산과 영구 귀국 준비를 위해 2주만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