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고생 87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방미 중이던 유홍준 교수가 이곳저곳 다니며 이런저런 이야 기를 들은 후 민족학교로 나를 찾아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국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하겠더라. 술도 못 먹으면서 어떻게 버텨 내냐?” “담배로 버텨 내지.” 조국에서 운동할 때도 마음고생을 하긴 했지만 망명 생활중 나의 마음고생은 강도도 높고 내용도 좀 색다른 것이었다. 제일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조국으로부터 내가 조국에 있을 때 나를 도와주었거나 만났거나 나와 가까웠다는 이유로,그리고 내가 망명한 후 나와 만났거나 연락을 취했다는 이유 때문에 전-노 일당에 의해 고통받는 분들의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듣고 분노만 할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어 느끼는 죄책감과 미안함과 무력감이었다. 그리고 요랜 망명생활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된 나와 회원들에 대한 중상모략과 훼방에 따른 분노와 배신감과 환멸과 슬픔과 인간에 대한 회의였다.
나는 그런 마음고생을 겪으면서 사람들 중에는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역량이 아니라 파괴적인 역량,그 중에서도 남의 일을 훼방 놓고 남을 괴롭히는 데 탁월한 역랑올 가진 자들이 있다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다. 허울뿐인 민주화운동이나 인권운동을 한답시고 떠들고 다니는 DJ 지자들과 일부 교회 쪽 사람들은 나와 한청련,한겨레와 각 지역 마당집에 대해 내가 귀국하는 그날까지 줄기차게 모함을 계속했다. 친북이니 빨갱이니 북에 갔다 왔다느니,돈이 어디서 나서 저렇게 활동하겠냐느니,FBI가 뒷조사를 하고 있으니 곧 끝장날 것이라느니,국내에서 운동할 때도 중심부에 있지 않고 변두리에 있었던 별 볼일 없는 놈이라느니,국내 운동권에서도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하여 제명처리해 버렸다느니,안기부가 곧 국내와 해외를 묶어 간첩단 사건을 하나 터뜨릴 것인데 그때는 윤한봉이 해외 총책이 될 것이라느니, 국내 운동권에서도 윤한봉과 한청련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일체의 관계를 끊었고 운동권 자료도 못 보내게 하여 고립되었다느니,광주 운동권에서도 피해를 많이 입어 아예 죽은 사람 취급하고 연락도 안한다느니 등등. 나를 안기부 끄나풀로 몰다가 한동안 잠잠하던 일부 통일운동권 사람들도 범민련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들과 갈등이 생기자 90년 후반기부터 또다시 반북이니,반통일이니, 국내 운동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모르는 한심한 놈이라느니,대세를 모르는 놈이라느니 하며 비열한 공격을 해댔다.
내가 귀국하게 되자 그들은 또 안기부와 타협하고 들어간다느니,들어가면 설자리가 없을 것이라느니,잘해야 재교육 대상이 될 것이라느니,들어가자마자 한청련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라는 등의 중상모략과 간절한 소망이 담긴 예언을 나에게 귀국 선물로 안겨주었다. 또 한청련에서 탈퇴(총 120명)하거나 문제를 일으켜 제명당한 사람들(총 21명) 중의 일부도 우리에 대한 해코지가 삶의 전부인 양 집요하게 비민주적이라느니,독선적이라느니,윤한봉의 사조직이라느니,X도 아니라느니 하며 욕하고 다녔다. 조국에서 활동 중이거나 미국을 방문한 운동가들 중 일부도 미주운동 상황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청련에서 탈퇴하거나 제명당한 사람들과 우리들에 대한 중상모략과 비방이 중요한 사업 활동 중의 하나인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그들에 동조하여 한청련을 비방하고 다녔다. 또 다른 일부 조국의 운동가들은 너무 청교도적이라느니 금욕주의자들 모임같다느니 너무 경직되었다느니 하며 비아냥거리고 다녔다. 마음고생에는 아픔뿐만 아니라 슬픔도 있었다. 한청련,한겨레 회원들 중에는 하버드,예일,MIT, 콜롬비아, 버클리 등의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들과 휴학한 사람들 그리고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가 운동을 위해 중단해 버린 유학생들도 있었다. 또 부부 형제 남매 자매 회원들뿐만 아니라 3남매 4남매 회원도 있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의사 변호사 목사 전문가 사업가들도 있었다. 내가 미국에 나타나지 않았거나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학업을 마치고 잘 살 수 있었을 그런 자녀와 형제자매와 남편을 회원으로 둔 가족들 중 일부는 나를 증오하고 저주하고 심지어 가정파괴범으로까지 몰았다. 그럴 때는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고통이 아닌 슬픔이었다. “5.18 때 죽어 버리지 왜 죽지 않고 나와서 내 자식을 망쳐 놓느냐?” “왜 소련으로 가지 미국으로 와가지고 괴롭히냐?” “문선명이보다 더 무서운 세뇌가다.” “김일성보다 더 무서운 놈이다.” “네가 미국 욕하는 것을 들었다. FBI에 고발해 버리겠다.” “미친 촌놈 새끼가 와가지고 집안을 망쳐 놓았다’ 등등. 색다른 마음고생 중에는 고독감도 있었다. 12년 동안 해외운동을 하면서 나는 조국에서 운동할 때는 느껴 보지 못했던 고독감을 여러 차례 느꼈다. 가끔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 어쩔 수 없이 나 혼자서 궁리하여 결정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었다. 물론 의식 수준도 높고 경험도 많이 쌓은 헌신적인 한청련,한겨레의 간부들도 있었지만 조국에서 운동해 본 경험이나 직접적인 탄압을 받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혼자서 모든 책임을 지고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중압감과 고독감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그렇지만 조국의 운동가들처럼 고문, 투옥 등의 몸 고생을 하기는커녕 뺨 하나 안 맞고 편하게 지내고 있는데 대한 벌,도망쳐 나온 데 대한 벌이라 생각하며 그 모든 마음고생을 이겨냈다. 나는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민족학교의 공터 이곳저곳을 일구어 만들어 놓은 채소밭과 꽃밭에 나가 일을 하곤 했다. 조국을 생각하며 취미삼아 가꾸기 시작한 채소와 꽃들은 나의 그리움과 외로움과 슬픔과 울분을 달래주고 녹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식사시간을 즐겁게 만들어주고 마당집 분위기도 밝게 해주었다. 시금치,상추,고추, 호박, 부추,오이, 쪽파 등의 채소들과 분꽃,봉선화,코스모스, 채송화 같은 꽃들은 내가 잡초를 뽑아 주고 퇴비를 주고 물을 줄 때마다 한결같이 날더러 운동을 그만두고 한적한 농촌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마음 편히 살라고 권하곤 했다.
위로, 격려해주신 방미 인사들 만리타국에 홀로 나와 활동하고 있는 나와 한청련,한겨례 회원들과 마당집 식구들에게도 남다른 외로움이 있었다. 미국을 방문한 조국 동포들이 전화나 인편을 통해서 또는 마당집 방문을 통해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거나 우리들의 사업 활동에 직접 참여해주거나 용돈이나 기부금을 내놓고 가면 나나 회원 들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내가 미국에 도착한 81년부터 완전 귀국한 93년 8월까지 그 동안 격려해 주거나 도움을 주셨던 고마운 분들의 이름을 써 보겠다. 고 성래운 교수님,고 황인철 변호사,광주 YMCA의 조아라 장로님과 김경천 총장님,김승균 선생님, 한완상 박사님,문동환 목사님,박형규 목사님,백기완 선생님,언론계의 김태홍 선생님, 김종철 선생님,김성 선생님,혜진 스님,법륜 스님,여연 스님,문정현 신부님,홍근수 목사님 내외분,양길승 의사님,김용태 선생님,유연복 선생님, 홍선웅 선생님,안치환 선생님,정태춘 선생님,임진택 선생님,문병란 선생님,송기숙 교수님,고 은 선생님,황석영 선생님, 윤정모 선생님,원동석 교수님,유홍준 교수님,이애주 교수님, 전홍준 교수님,김동원 교수님,이영희 교수님,백낙청 교수님,윤석두 교수님,김남선 선생님,김현준 선생님,최열 선생님,차준엽 선생님,김현 선생님,정찬용 선생님,유미옥 선생님,황인성 선생님,조성우 선생님,최병상 선생님,민상흥 선생님,문국주 선생님, 이대훈 선생님, 장기표 선생님,이명준선생님,김근태 선생님,이미경 선생님,박귀현 선생님,서상섭 선생님,김민석 선생님,김상현 의원님,서경원 의원님,이부영 의원님,박석무 의원님, 박계동 의원님,한승헌 변호사님, 김광일 변호사님,박원순 변호사님, 조용환 변호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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