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수 이주영 장학금 나는 82년에 퀘이커의 미국친우봉사회에 약 6개월간 나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만난 분들 중에 정만수 할아버지와 이주영 할머니 부부가 있었다. 항상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시는 정만수 할아버지는 일제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감옥살이를 하신 경력도 있는 좀 특이한 분이셨다. 정만수 할아버지는 평생을 이발사로 살아오셨고 이주영 할머니 또한 평생을 바느질 등 노동으로 살아오셨다. 두 분은 열심히 노동해서 모은 돈으로 가난한 학생들 학비를 대주거나 고 함석헌 선생의 민족교육운동을 돕는 등의 장한 일들을 하시며 사시다가 칠십 고령이 되자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 오셔서 노인 아파트에서 검소하게 생활하고 계셨다.
두 분은 민족학교에서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깡통과 중고품을 수집판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는 매일 새벽에 길거리로 나가 쓰레기통을 뒤져 깡통과 중고품을 주워 모아 민족학교로 보내주셨다. 심지어 이주영 할머니는 주워 모은 것들 중 에서 더러운 옷들은 직접 세탁을 하고 찢어진 옷은 꿰매기까지 해서 보내주시곤 했다. 한번은 우리들이 깡통을 싣고 오기 위해 아파트로 찾아갔는 데 정만수 할아버지가 2불을 내놓으시기에 웬 돈이냐고 물었더니 새벽에 길거리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으니까 지나가던 백인 한 사람이 거지로 알고 돈을 주기에 안 받을까 하다가 민족학교에 주려고 받아왔다고 대답하셔서 아무 말도 못하고 받아온 적이 있었다.
두 분은 민족학교에 음식물과 기부금도 꾸준히 보내주셨다. 한겨레가 결성되자 함께 회원으로 가입하신 후 80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학습과 회의에 열심히 참석하셔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또 두 분은 89년의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 대행진’에 참가하여 젊은이들도 힘들어 하는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의 행진을 끝까지 끝마치셨다. 당시 정만수 할아버지는 수술로 인해 항문 기능을 잃고 옆구리에 대변주머니를 차고 다니셨는데 행진단 최고령자였기 때문에 백두산 정상에서 출정식을 할 때 출정 선언문을 낭독하시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우리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시고 흐트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던 정만수 할아버지는 91년에 암으로 돌아가셨고 이주영 할머니는 변함없이 민족학교를 보살펴 주시는 우리들의 할머니로 남아 계신다.
민족학교에서는 정만수 할아버지의 영정을 녹두장군과 맞보도록 모셔놓았다. 민족학교는 또 두 분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소박한 사랑과 헌신적 실천을 이어받기 위해 깡통과 중고품 판매 수익금 전액을 매년 민족의식이 투철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주기로 결정하고 그 장학금 이름을 ‘정만수,이주영 장학금’이라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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