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평화대행진과 미주평화행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우리 조국의 분단 배경뿐만 아니라 Korea에 자기나라 핵무기가 많이 배치되어 있고, 4만 명의 자기 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자기 나라가 Korea의 군사 작전 지휘권까지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Korea에 40년 가까운 휴전상태와 일촉즉발의 군사긴장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미국인들과 국제사회에 Korea의 분단문제와 군사,핵문제의 심각성과 그에 따른 코리언의 고통과 분노를 위해서 해외운동이 해야 할 중요한 사업 활동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 방도에 대해 궁리한 끝에 84년에 백두에서 한라까지 국제평화대행진을 구상하게 되었다.
나는 국제평화대행진을 구상한 후 회원들에게 조직역량이 약하면 할 수가 없으니 부지런히 조직을 강화해서 구체화시켜 보자고 이야기했다. 그때의 구상은 타민족 형제들과 시민권을 가진 회원들로 행진단을 구성하여 남부조국에서의 행진은 불가능하니까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판문점으로 내려와 남부조국과 미국의 저지를 무시하고 판문점의 군사 분계선을 통과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타민족 형제들을 포함한 행진 참가자들 에 대한 구속과 재판문제를 둘러싸고 남부조국 당국과 미국 정부가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되고 이 문제는 국제사회의 폭발적 인 관심과 여론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 후 조직 역량이 많이 강화되고 국제 외교 연대운동도 많이 발전했다고 판단한 나는 Korea의 미국핵무기 철거요청 10만 명 서명운동이 끝나고 나면 국제평화대행진을 본격적으로 거론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서명운동을 한참 진행하고 있던 89년 1월에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발생해 계획을 앞당겨 실행하게 되었다. 지역조직 내에서 갈등이 생겨 한청련을 탈퇴했던 정기열 목사가 1월 초순에 나를 찾아와 물었다.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진보적인 타민족 형제들과 함께 만든 ‘Korea 비핵 자주화 위원회’ (CNSK)회원들에게 형님이 구상했던 국제평화대행진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기가 막힌 계획이라며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히고 나왔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마침 그때가 평양에서 열리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 축전 참가 문제를 놓고 한청련 내부에서 의논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평양축전에 참가한 김에 행진까지 해버리면 굉장히 많은 경비절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2월에 열린 한청련,한겨레의 합동회의에 그 문제를 상정하였다. 합동회의에 서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一축전에 참가한다. 축전이 끝나면 곧바로 국제평화대행진 에 참가한다. 국제평화대행진은 타민족 형제들과 함께 준비위 원회를 구성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추진하도록 한다. 한청련,한겨레 대표들은 그 준비위에 적극 참여한다. —국제평화대행진과 같은 기간에 뉴욕에서 워싱턴 DC까지 미주평화행진을 한다. 서명운동에 박차를 가해 10만 명 목표를 달성한 후 그 서명용지를 미주평화행진단이 짊어지고 가 미의회에 전달한다. 그렇게 결정이 나자 나는 회원들과 함께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서둘러 평소에 연대해 왔던 타민족 형제들과 함께 준비위원회 구성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문제가 우리들을 가로막았다. 미국 재무성의 해외자산통제조절법은 북부조국,캄보디아,베트남 등의 국가를 방문시킬 목적으로 정부의 허가 없이 방문자들을 모집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어떤 여행사가 그 법을 어겼다가 수 십 만 불의 벌금형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리들은 궁리 끝에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되 본부는 영국에 두기로 했다. 준비위원회 명칭은 ‘Korea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연대행진 국제준비위원회’(이하 국제준비위)로 하고 의장에는 영국인 휴스테픈스씨를 추대했다. 또 본부사무실은 영국의 런던에 있는 한국친선위원회(Korea Friendship Committee) 사무실로 하고 아시아지역 사무국은 필리핀의 마닐라 시에,태평양지역 사무국은 호주의 멜버른 시에,북미주지 역 사무국은 워싱턴 DC에 두기로 하였다. 또한 국제준비위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물론 주인 없는 잔치가 없는 것처럼 거의 모든 결정은 한청련, 한겨레 대표들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S.Korea의 운동권에 제안해서 백두산에서 출발하는 행진단과 판문점에서 만날 수 있도록 같은 날 한라산에서 출발하는 국제평화대행진을 추진한다 . -판문점 도착 일은 휴전 협정 조인일인 7월 27일로 하고 그 곳에서 두 행진단이 함께 국제평화대회를 개최한다. 행진에 참 가할 사람들을 모집하기 위해 유럽과 동남아시아,태평양,일본 등지에 대표를 파견한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6.25참전 16개국에서 최소한 한 명씩 행진에 참가하도록 한다. 타민족형제들 중 반은 S.Korea로 들어가 행진한다. 행진에 참가할 한청련, 한겨레 회원들은S.Korea 입국 자체가 거부될 테니까 N.Korea로 간다. 군사분계선 돌파는 이번에는 하지 않고 제2차 국제평화대행진 때 한다. -일체의 경비는 참가자들과 개인 및 단체들의 기부금으로 해결한다. 가난한 제3세계 형제들의 교통비는 국제준비위가 일부 부담한다. -구체적인 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보안을 유지하되 준비가 다 되면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발표한다. -N.Korea에 국제평화대행진 계획을 설명하고 허락을 받기 위해 대표를 파견한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미 국무성에 행진을 위한 N.Korea 방문이 해외자산 통제조절법에 위반되는지 서면 질의 한다. 국제준비위는 결정에 따라 북부조국에 두 명의 대표를 파견 하고 남부조국에 한 명의 대표를 파견했다. 그러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대표들의 결과보고를 듣고 국제준비위는 고민에 빠졌다. 제안 설명을 다 듣고 난 북부조국 책임자는 6월 말에 회답을 해주겠다고 하였고 남부조국 운동단체 간부들은 모두 다 사정이 어렵다며 푸념만 늘어놓더라는 것이었다. 대선 후유 증으로 침체되어 있는 남부조국의 운동권도 선뜻 호응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북부조국 당국도 한 번도 상대해 보지 않은 국제준비위의 제안에 선뜻 대답을 해주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6월말에 협조 응낙을 받는다고 해도 그때부터 준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장시간의 궁리 끝에 국제준비위는 응 낙을 전제로 하고 준비를 계속해 나가고 남부조국에 다시 한 번 대표를 파견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또 다른 대표 한 명을 남부조국에 파견하는 한편 유럽지역에 정기열 목사,아시아 태평양지역에 이지훈 씨,일본에 정민 씨를 파견하여 행진 참가자 모집 활동을 펴게 했다. 그렇게 국제준비위가 바삐 움직이고 있을 때 경쟁이라도 하듯 한청련,한겨레 회원들은 두 곳의 행진 준비와 축전 참가 준 비 그리고 서명접수 활동을 하느라고 눈물겨운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3월에 ‘제13차 세계청년학생 축전 참가 북미주 추진본부’(이하 추진본부)‘를 만든 후 축전 참가 희망자들을 모집하고 있던 한청련은 5월 말에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긴급하게 회 원들의 의견을 물어 축전 참가 포기 결정을 내리고 추진본부를 해체하고 말았다. 88년에 LA와 샌프란시스코의 일부 청년들이 모여 결성한 모 청년운동단체가 뒤늦게 축전 참가를 위한 별도의 추진 기구를 만든 후 사사건건 추진본부에 문제를 제기하며 비난하고,87년에 결성된 모 통일운동단체가 자신들이 북부조국으로부터 축전 참가자 모집 권한을 위임받았다면서 사사건건 추진본부의 오장을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꾹 참고 준비를 해오던 한청련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여 축전 참가를 포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회원들이 평양축전에 가려면 북부조국의 초청장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추진본부가 축전 참가 희망자들의 인적사항을 북부조국에 보내놓고 초청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5월이 다 가도록 초청장이 오지 않아 직장 휴가신청 문제,비행기 표 예약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한 참가 희망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5월 말이 되서야 추진본부 측은 북부조국 당국이 4월 말에 이미 앞에서 말한 모 통일운동 단체에게 추진본부에 전달할 초대장을 주었는데 전달은커녕 연락도 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추진본부와 갈등 관계에 있던 다른 쪽 청년들의 추진 기구에는 즉시 초청장이 전달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민 끝에 추진본부 측은 평양 가서도 끊임없이 삐걱거릴 청년들과 함께 가는 것보다는 축전에는 그들끼리 대표단을 구성해 가도록 해주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추진본부를 해체하고 말았다. 한편 국제준비위는 남부조국으로 파견됐던 두 번째 대표가 돌아와 운동권의 침체와 노태우 일당의 탄압 때문에 남부조국에서의 행진추진은 불가능하다는 최종보고를 해서 남부조국에서의 행진은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국제준비위는 각 지역으로 파견되어 타민족들을 상대로 행진 참가자 모집활동을 했던 대표들이 많은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고,기대했던 대로 6월 말에 북부조국으로부터 행진 허용 및 협조 수락의 회신을 받았다. 그래서 7월 초에 평양축전에 참가할 사람들을 상대로 국제평화대행진을 홍보하고 현지에서 행진 참가자들을 모집할 선발대 8명을 1,2차로 나누어 평양으로 보냈다. 또한 7월 6일부터 10일 사이에 영국의 런던과 미국의 워싱턴 DC,필리핀의 마닐라. 호주의 멜버튼,북부조국의 평양에서 잇달아 기자회견을 해서 국제평화대행진 추진계획을 발표하였다. 필리핀과 호주의 행진 참가 희망지들은 현지의 남부조국 대사관에 비자신청을 하였다가 거절당하자 그에 항의하는 기자 회견과 대사관 앞 시위 등을 감행하였다. 한청련과 한겨레도 한국지원 연락망(KSN)과 함께 국제평화대행진과 같은 기간에 뉴욕에서 워싱턴 DC까지 Korea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평화행진을 실시한다고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 발표하였다.
국제평화대행진 계획이 발표되자 당황한 노태우 일당은 행진을 원천봉쇄하겠다고 발표하고 행진 참가자들의 입국불허 방침을 밝힌 후 국제준비위 측이 남부조국에서 행진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으면서도 일부러 한라산에서 판문점까지의 행진도 한다고 거짓 발표를 한 줄 모르고 행진 참가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허둥지둥 제주 시내 호텔에 투숙한 외국인들의 신상조사를 하고 한라산 등산로의 검문검색을 강화하였으며,언론도 그런 사실을 크게 보도하는 등 볼꼴사나운 소동을 피워 행진 준비로 지쳐있는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남부조국의 전대협,통불협,전청협 등 3개 단체도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국제평화대행진을 적극 지지하고 정부의 행진저지와 봉쇄조치를 규탄한다고 밝혀 국제준비위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한편 한청련, 한겨레 회원들은 국제준비위의 협조 요청에 적극 호응해 막바지 서명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두 곳에서 동시에 실시될 행진에 필요한 각종 준비물을 마련하느라 고생을 했다. 한청련,한겨레 회원들은 북부조국에 가서는 숙식과 교통편의를 제공받고 비행기로 싣고 가기 어려운 가로글막과 농기를 메달 대나무 장대를 빌려 쓰는 것 외에는 일체의 폐를 끼치지 않기로 했다. 조국의 문화운동권에서 축전과 행진 때 활용해 달라고 익명으로 보내온 50여 점의 표구된 판화와 홍성담 씨가 보내온 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에 대한 영어설명문을 작성하고,행진에 참가할 타민족 형제들에게 선전,교육 할 때 쓸 각종 시청각 자료와 문건 및 기기,행진 때 쓸 걸개그림을 포함한 각종 시위용품 준비,행진대원들이 입을 옷가지를 준비했다. 심지어 구급약품과 문방구와 망치에서부터 못까지 온갖 연장을 준비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 한청련,한겨레 회원들의 몇 달간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모 든 준비가 완료되자 국제준비위는 출발을 앞두고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一행진 주최는 국제준비위로 한다. 一행진 경로와 일정도 국제준비위가 결정한 대로 한다. 一행진단 구성은 국제연대의 성격이 희석되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북부조국 행진 참가자들의 수를 50명 이하로 제한하고 평양축전에 참가한 해외동포들도 참가를 희망할 경우 각 지역 공히 50명 이내로 제한해서 참가시킨다. 一현재 평양축전에 참가하고 있는 전대협 대표의 행진 참가는 본인의 의사에 맡긴다. 一N.Korea를 위한 행진이 아니고 Korea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행진인 만큼 행진 대원들은 정치적 긴장을 유지하고 언동에 주의한다. 한청련, 한겨레의 국제평화대행진 참가자들도 출발을 앞두고 몇 가지 다짐과 결정을 했다. 一행진 참가자들은 자신들을 4천만 남부조국 동포들과 5백만 해외동포들 그리고 한청련, 한겨레의 대표로 생각하여 동포들과 조직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항시 언동에 주의한다. 一남과 북을 하나로 보는 통일된 조국관과 운동의 주체성을 확고하게 지켜나간다. _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 하나로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一북부조국 동포들에게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갖추고 조국을 떠나 살고 있는 해외동포임을 잊지 말고 항상 겸손한 자세를 유지한다. -국제평화대행진은 조국의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점차 규모를 키워가며 계속해야 하는 만큼 이번 행진을 최선을 다해 성공시킨다. -행진 성과를 조직적으로 수렴해야 하는 만큼 행진 도중 타 민족형제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정성껏 선전, 교육을 해서 확고한 신뢰를 쌓도록 하고 행진이 끝난 뒤에 타민족 형제들 스스로 Korea의 문제를 다루는 국제적 연대조직을 결성하도록 지혜롭게 노력한다. -단장은 정민 연합부회장,부단장은 김영국 회원으로 하고 회원들은 규율을 엄수한다. 나는 선발대로 떠나는 정민 단장에게 따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신신 당부했다. “도착 즉시 북부조국 책임자들에게 호소해서 행진 마지막 날 인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국제평화대회를 할 때 6.25 때 돌아가신 남북 동포들과 미국,영국,중국 등의 군인들의 합동위령제를 지낼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남부조국 대표는 전대협 대표가 불가능하면 한겨레 회원 중 한 분이,북부조국 대표는 북부조국 책임자 한 사람이 맡고 참전국 대표는 참전 16개국 대표 16명이 맡아 18명의 대표들이 함께 분향,재배,묵념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해서 하고 공동 성명서를 발표할 수 있도록 하라. 또 그 자리에서 북부조국 대표가 행진에 참가한 미국대표단에게 몇 구라도 좋으니 미군의 유해를 직접 전달하거나 유해 송환 약속을 공개적으로 해주도록 간절히 호소하고 또 북측 비무장지대 안에 국제평화촌을 건설할 수 있도록 허가 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하라.” 나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미국에 나와 있는 북부조국에 대한 각종 자료와 정보를 접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내 나름대로 희미하게나마 북부조국의 실정을 감지하고는 있었다. 또 비록 무식한 촌놈이지만 미국에 살다보니까 미국이라는 나라와 국제사회 그리고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해 조국에 있을 때보다는 조금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나는 북부조국이 남부조국과 미국,서유럽 등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능동적인 노력,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크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관계 개선을 위한 첫걸음으로는 민간 차원의 대화와 교류가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북부조국 뿐만 아니라 조국과 민족 전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북부조국에서 들어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실낱같은 기대를 갖고 세계의 모든 언론이 지켜보고 있을 국제평화대회장에서의 합동위령제 거행과 유해 송환을 호소해 보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나는 준비도 안한 채 제안하는 것보다는 구체적인 준비를 해서 떼를 써보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방미 중이던 유연복 화가에게 판문점에서 위령제를 지낼 때 위패 대신 제상 전면 벽에 걸 걸개그림을 부탁했다. 슬픈 표정으로 어깨동무하고 내려다보고 있는 6`25 때 돌아가신 남북 동포들과 참전국 군인들의 영령 모습을 해당국들의 국기와 함께 그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부탁해서 만들어 놓은 대형 걸개그림과 위령제 때 읽을 미리 써놓은 성명서 겸 제문을 향로,촛대 등과 함께 정민 단장에게 주어 보냈다. 또 나는 군사긴장이 높은 조국에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평화와 군축이 이루어지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을 통해서 조국의 군사긴장과 전쟁위기 상황을 국제 사회에 널리 알리고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는 것도 효과적이지만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평화 운동가들과 의식 있는 해외동포 청년들이 뜻을 모아 비무장지대에 단계적으로 남,북방 한계선에 걸친 3개의 평화촌을 건설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전쟁 예방에 이바지하는 한편 반핵,반전운동 수준에 머물고 있는 평화운동을 평화공존의 새로운 문명체계를 인류에게 제시해 줄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평화운동가들 중심의 ‘연구촌’,‘평화 운동가들의 성자,모든 인종,민족, 종교,문화, 언어,사상,철학이 한 곳에 모여 연구하고 생활하는 ‘소지구촌’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 또한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서 국제평화촌 건설을 허락해 달라고 호소하도록 당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 후 평양에서 온 정민 단장의 보고는 호소해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무반응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떼를 써보라고 당부했으나 결국 나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여하튼 평양에 도착한 행진단은 두 가지 문제를 둘러싼 의견대립으로 북부조국 책임자들과 심각한 마찰을 겪게 되었다. 행진 실시에 관한 기자회견을 앞두고 북부조국에서는 행진 주최를 국제준비위와 조선반핵평화위원회가 공동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고 국제준비위는 독자 주최로 해야 한다고 맞서 밀고 당기기를 시작한 것이다. 행친 참가 의사를 밝힌 임수경 학생도 국제준비위의 입장에 적극 동조했기 때문에 힘을 얻은 국제준비위는 기자회견 시작 5분 전까지 타협을 거부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여 기어코 독자 주최 주장을 관철시키고 말았다.
또 하나의 마찰은 행진 경로와 일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북부조국 책임자들이 국제준비위가 제안했던 경로와 일정을 부분적으로 바꾸려 하자 국제준비위와 임수경 학생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결말이 안 나오자 한청련 회원들은 국제준비위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숙소로 쓰고 있던 호텔 로비에서 농성을 시작해 버렸다. 비록 동포이기는 하지만 해외에서 온 손님들이 느닷없이 머리띠 두르고 농민복 입고 앉아 농성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북부조국 책임자들은 굉장히 당황한 눈치였다. 농성 덕분인지는 몰라도 북부조국 책임자들은 결국 국제준비위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런 마찰을 겪고 나서부터 북부조국 당국은 행진에 관한 거의 모든 결정을 국제준비위에 맡기고 일체 간섭하지 않았으며 우려와는 달리 놀라울 정도로 협조와 배려를 잘해 주었기 때문에 행진단의 사기는 충천했다.
7월 21일 백두산 정상에서 출정식을 한 국제평화대행진단은 한청련의 사물패를 앞세우고 판문점을 향해 7일간의 대행진을 시작하였다. 같은 날 미국의 뉴욕에 있는 UN 본부 앞에서 출정식을 한 미주평화대행진단도 워싱턴 DC의 의사당을 향해 7일간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국제평화대행진에는 북미주에서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28명 , 중남미에서는 니카라과를 포함한 6개국에서 8명,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는 필리핀을 포함한 7개국에서 30명,유럽에서는 서독을 포함한 8개국에서 11명,중근동에서는 팔레스타인에서 1명 등 참전 16개국을 포함한 30개국의 대표 85명의 타민족 형제들과 중국,소련,독일,캐나다,미국,일본에 거주하는 해외 동포 113명 그리고 북부조국 동포 70명과 동포 2명 (문규현 신부,임수경 학생) 등 총 270명 이 참가하였는데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한 나라는 미국(27명)이었고 다음은 18명이 참가한 필리핀이었다. 타민족 형제들 중에는 수석대표 다무 스미스씨,휠체어를 탄 브라이언 윌슨씨, 80세의 분 셔머씨와 같은 진보적인 평화 운동가들이 숫자가 가장 많았지만 필리핀의 아트 발라가 트 신부와 같은 민족해방 운동가들도 상당수 있었다. 재미동포 행진단에는 생후 3개월 된 신보람이부터 80세의 정만수 선생님 내외분까지 그리고 2세인 노소윤 회원부터 혼혈1세인 입양아 출신 윤복동 씨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다 있어서 주위의 눈길을 끌었다. 국제평화대행진 후원단체로는 독일의 녹색당,‘평화와 자유를 위한 세계 여성연맹’(WILPF),미국의 ‘무지개 연합’과 가장 큰 평화운동단체인 ‘세인/프리즈’(SANE/FREEZE)‘ 등 영향력이 큰 70여 개 단체가 참여하였다. 후원자로는 로날드 델럼스 미국 하원의원을 포함한 각국의 전,현직 국회의원 3명,토마스 검블톤 주교를 비롯한 주교 2명 등 20여 명의 저명한 정치인, 종교인,교수,평화운동가,인권운동가 등이 참여하였다.
한호석 교육부장을 단장으로 한 미주평화대행진단은 국제평화대행진단에 비해 규모도 훨씬 적었고 구성도 단순했다. 빌 헤이글씨를 비롯한 몇 명의 타민족 형제들과 캐나다와 서독에서 온 동포운동가 서너 명 그리고 한청련,한겨레 회원 40여 명 만이 참가한 소규모 행진단은 열광적인 북부조국 동포들의 환영 속에서 진행된 국제평화대행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로운 행진을 했다. 행진 도중 가끔 미국인들로부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비아냥거림과 욕설까지 듣기도 했다. 그래도 미주평화대행진단은 기죽지 않고 조국으로부터 "미국 핵무기를 철거하라“는 11만 명이 넘는 미국 시민들의 서명지를 초록색 보자기에 나누어 싸 짊어지고 마치 11만 명과 함께 행진이라도 하듯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조국에서 오신 소설가 윤정모 씨와 화가 유연복 씨가 가끔 동행해주는 바람에 더욱 더 사기가 올라 지친 발걸음을 다그치곤 했다.
한편 행진 준비를 위해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나는 막상 행진이 시작되자 뉴욕의 마당집인 청년학교에서 먹고 자며 세계 곳곳에서 늦게 떠난 타민족 형제들의 출발 및 도착 상황과 시간차가 큰 두 곳의 행진 상황을 점검하며 뒤치다꺼리를 하느라고 자리를 뜰 수가 없어 행진 참가는커녕 구경 한번 못하고 말았다. 그때 당시 나는 80년 서울에서 도피생활을 할 때 숨겨 주셨던 윤정모 님이 조국에서 찾아오셨고 또 화가 유연복님이 나와 있었지만 접대 한번 할 시간도 낼 수 없을 정도로 바빴었다. 국제평화대행진단과 미주평화행진 단은 7월 하순의 무더위와 가끔 쏟아지는 소낙비를 뚫고 목이 터져라 “Korea는 하나다’,“미군 철수,핵무기 철거” “평화협정 체결”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계속해 예정대로 7월 27일에 판문점과 워싱턴 DC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국제평화대행진단은 뒤늦게 도착한 문규현 신부를 환호 속에 맞이한 후 계획대로 판문점에서 국제평화대행진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자리에서 타민족 형제들은 우리가 기대했고 또 노력했던 ‘Korea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연대위원회’(이하 국제연대위)‘결성을 선포하고 2년마다 정기적으로 국제연대위 주최의 국제평화대행진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대회를 마친 대행진단은 예정에 없던 판문점 통과를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통일각에서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판문점 허용을 요구하는 6일간의 단식농성에 들어가 버렸다. 그 단식에는 타민족 형제 10명과 문규현 신부,임수경 학생을 포함한 65명의 행진대원들이 참가하였다. 뉴욕의 청년학교에 남아있던 한 청련 회원들도 6일간의 연대단식에 돌입하였다. 워싱턴 DC에 도착한 미주평화행진단은 한국지원 연락망(KSN)과 뉴욕 기독청년연합 등의 회원들 및 후원 동포들과 합류하여 의사당 앞에서 한반도 전쟁종식을 위한 평화대회를 개최하고 11만여 명의 서명지를 간절한 소망과 함께 미의회에 전달하였다.
판문점과 워싱턴 DC에서 각기 평화대회가 진행되던 7월 27일에 서독과 필리핀,남아프리카,호주 등지에서도 뜻을 함께 하는 타민족 형제들이 연대집회를 개최해 주었고 세계의 유명 언론들도 거의가 다 판문점의 국제평화대회 현장을 열심히 취재, 보도해 주었다. 8월 초가 되자 국제평화대행진을 마친 타민족 형제들과 회원들이 속속 미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땡볕에 그을리고 수척해진 얼굴들이었지만 역사적인 행진을 하고 온 그들의 눈빛은 놀라울 정도로 번쩍였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그들은 미주평화 행진에만 참가한 ‘찬밥’들과 두 곳의 행진에 다 참가 못하고 마당집을 지키거나 모금활동 등의 뒤치다꺼리를 하거나 직장근무를 하고 있던 ‘언밥’들 앞에서 잔인무도하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노태우 일당의 전면적 탄압과 맞싸우고 빌려 쓴 돈을 갚아나가야 하는 힘든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한편 미 국무성은 행진이 다 끝난 뒤에야 국제준비위가 행진 출발 전에 행진 참가 행위가 해외자산 통제조절법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서면질의한 데 대해 “앞으로도 그런 문제가 있을 때 는 꼭 상의해주기 바란다.”는 지극히 외교적인 내용의 답신을 국제준비위의 고문으로 참여했던 미국 연방하원의원 로날드 델럼스씨가 판문점의 국제평화대회에 보낸 다음과 같은 지지 성명서를 소개한다. “본인은 1989년 7월 20일부터 27일까지의 국제평화대행진을 지지하는 이 성명서를 발표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역사적인 모임이 Korea의 자주화와 핵무기 없는 평화적인 통일을 갈망하는 한국인들을 지지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아시다시피 본인은 미 연방 하원의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국제 갈등을 완화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따라서 세계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국의 대화의 통로를 여는 것이 절실한 문제이며,이에 관한 한 북한과 남한은 세계를 지도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으로써 국제 갈등을 해소하려는 것은 핵무기 기술로 인해 이제 무모한 방법이 되어버렸습니다. 본인은 여러분이 북 한과 남한이 평화를 토대로 한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도록 촉구 하려는 용기와 이해를 가졌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본인은 본 행진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一한국전쟁이래 유지되어 온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 一북한과 남한간의 불가침협정 체결 一북한과 남한의 군사력 감축 一남한으로부터의 미군과 핵무기 철수 一미국과 남한의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 중지 지역적인 군사긴장 완화와 공정한 경제발전을 촉구하기 위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비핵화를 위한 캠페인을 벌여나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봅니다. 미 하원에서는 이번 주에 1990년도 군사비 예산문제가 토의와 표결에 부쳐졌습니다. 죽음과 파멸만을 불러들일 새로운 무기가 제외된 건전하고 상식적인 국방예산을 주장하며 본인은 열심히 토의에 참여했습니다. 본인은 평화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계속 몸부림을 쳐야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Korea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행진하고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무조건적인 연대를 보내며, 여러분의 Korea의 평화를 위한,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한 행진에 함께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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