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유치장은 임시수용시설이라 식사도 형편없고 생활도 불편했다.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까칠한 꽁보리밥에 배추 잎사귀도 발견하기 힘든 멀건 소금국이 전부인 관식으로는 건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여러 종류의 사식을 사먹을 수는 있었지만 민청학련 구속자들에게는 가족조차 면회가 금지되어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군에 입대할 때 친구들에게 돈 다 털어주었다가 고생한 것처럼, 자유만세를 외치며 택시기사에게 있는 돈 다 털어준 윤한봉은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회고다.
“교도소 안에서 백번은 생각했어, 그 돈을. 후회하고. 얼마나 배고파 블고 춥고 배고파 브렀던지. 돈이 없으니까. 왜그냐믄 민청학련자들은 형이 확정될 때까지 면회도 안 시켜브렀어. 와, 찐빵 사라고 왔다 갔다 해 쌌지, 또 짜장면, 통닭, 햄버거, 아이구 돈이 없으니까. 난닝구하고 빤스만 입고 들어간 거야. 빈혈 걸려갖고 혼나 블고. 거기다가 못 먹어노니까 이제 변비가 생겨가지고…”
두 달 사이에 다들 해골같이 말라 버렸다. 빈혈에 걸리지 않은 학생이 없었다. 원래 깡마른 윤한봉은 말할 것도 없고, 윤강옥은 방에 있는 변기통을 들고 나가 비워야 하는데 들 힘이 없어서 늙은이처럼 후들후들 떨며 오가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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