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I의 교묘한 탄압
FBI는 교활한 방법으로 나와 민족학교를 음해했다. 내가 미국에 도착한 후 FBI 요원들을 처음 만난 것은 83년 6월이었다.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나서 기자회견을 통해 신분을 밝힌 지 며 칠 후 미국인 FBI 요원 두 사람이 민족학교로 나를 찾아와서 물었다.
“미국을 좋아하느냐?” “싫다.” “만약 미국에서 망명 허가를 안 해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독일로 가겠다.”
그들과의 두 번째 만남은 87년이었다. 어느 날 난데없이 우리 동포 FBI 요원이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헤어질 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앞으로 민족학교에는 오지 말라. 할 말 있으면 전화를 하라.”
그 얼마 후 그 요원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밖에서 만나 함께 식사를 했는데 몇 달 지나 또 전화해 만나자고 해서 나는 만날 필요가 없다고 거절해 버렸다. 그때부터 FBI의 비열한 중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우리들을 친북이니 과격하다느니 하며 비방하고 다니는 각 지역의 운동단체 사람들은 물론 우리들에게 우호적이거나 협조적인 사람들까지 찾아다니며 이런 따위의 교 활한 질문들을 계속 되풀이 하고 다녔다.
“윤한봉이 북에 갔다 왔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윤한봉이 돈이 어디서 나서 그렇게 돌아다니며 활동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가족전체가 불법체류자인 회원의 집에 신분증도 내보이지 않고 허락도 안 받은 채 들어가 회원 부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윤한봉이라는 사람을 아느냐? 그 사람이 88서울올림픽 때 테러를 한다는 정보가 있어 조사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회원 부모들에게 영주권까지 보여 달라고 해서 온 집안 식구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기도 했다.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는 것,허락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 이민국 소관인 불법체류자의 신분 확인을 하는 것은 전부 불법이다. 뿐만 아니라 회원들의 직장이나 아파트로 찾아다니며 책임자나 관리인에게 회원에 관해 이것저것 캐묻는 등 비열한 짓도 계속했다. 그들은 우리 동포들이 조국에서와 똑같이 정보 사찰기관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FBI가 찾아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거의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들은 나와 한청련,한겨레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단체와 개인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회원,예비회원,후원자들 중에서 약점이 있거나 약한 사람들에 대해서까지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 자신들이 신분과 아름을 밝힐 경우 자신들이 한 불법행위에 대해 우리가 법적 대응을 하리라는 것까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는 만큼 정확하고 적절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예상하고 기대했던 결과는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을 중상모략하고 비방하던 동포운동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나서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윤한봉이가 북에 갔다 왔다더라. 윤한봉과 한청련은 이제 끝났다. FBI가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것을 보니 뭔가 터질 것 이다. 위험하니 가까이 하지 마라.”
일부 후원자들은 우리들과 한동안 거리를 두었으며 불법체류 회원은 가족들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탈퇴하고 일부 회원들은 위축되거나 불안해했다. 나는 격분하고 말았다. 내가 북부조국에 갈 수도 없고 간 적도 없다는 것과 내가 활동비를 어떻게 마련하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고 나나 한청련,한겨레가 얼마나 철저하게 공개 합법 운동의 원칙을 지키고 있는가를 제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교묘하게 해코지를 하고 다니는 그들의 교활함에 나는 치를 떨었다. 나는 간부들과 의논해서 즉각 대책을 세웠다. 한청련은 합법권리 센터 (Center Constitutional Rights) 에 협조를 요청해서 한청련 회원들이 FBI와 문제가 생기면 적극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놓았다. 그리고 그 단체에서 제작한 「만약 수사관이 찾아온다면」이라는 소책자 내용을 모든 회원들이 숙지하고 85 년에 만든 자체 보안지침도 철저히 준수하도록 지시했다. 또 한 시민권 획득 자격이 있는 회원들은 빠른 시일 내에 시민권을 취득하고 불법체류 회원들도 빠른 시일 내에 영주권을 취득하도록 했다. 또 FBI가 만나자고 해도 응하지 말고 찾아와도 집에 못 들어오게 하고 찾아온 요원의 신분을 확인한 후 명함을 꼭 받아놓고 무엇을 물어도 대답을 거부해 버리라는 지시도 했다. 그러한 조치를 취한 후부터 모든 회원들은 FBI 요원들이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고 뭘 물어도 답변을 거부해 버리는 등 당당하게 대응해 나갔다. 자격이 있는 회원은 모두 시민권 신청을 했다. 그 후 일부 회원들이 시민권 취득을 위한 면접시험 때 한청련과 관계된 질문을 받는 어려움을 겪었고 심지어 미군에 입대하여 남부조국에 주둔하고 있던 한 회원의 동생이 현지의 미군 정보기관으로부터 한청련과의 관계에 대해 조사률 받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한청련,한겨레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 후로도 남부조국에 비치된 미국 핵무기 철거를 요청하는 10만 명 서명 운동을 전개하였고,Korea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 행진과 11만 명의 서명용지를 미국 의회에 전달하기 위한 미주 평화행진을 실시했다. 더 나아가 2차에 걸친 ‘평화협정 체결 촉구와 유엔 분리 가입 저지’를 위한 유엔 본부 앞 단식농성까지 결행했다. 한청련은 FBI뿐만 아니라 노태우 일당의 탄압에 대해서도 법적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90년 5월에 워싱턴 DC에 비영리 단체로 등록해 버렸다. 우리가 아는 한 FBI의 교묘한 탄압은 90년 이후부터는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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