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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7-87대선의 절망2019-01-0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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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대선과 절망


87년 4월에 미국 정부로부터 정치 망명 허가를 받으면서 나는 미국 정부가 조국에 개량적 친미정권을 수립하기로 했다는 것을 감지했었다. 그 이후의 6월 항쟁, 6.29 선언,직선제 개헌 등으로 이어지는 조국의 정세 변화와 미국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은 나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미국에서도 뉴욕과 LA 등지에서 조국의 6월 항쟁과 보조를 맞추어 궐기대회와 시위가 개최되었다. 각지의 행사 때마다 상상도 못한 일들이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행사의 주최 측은 그 동안 줄곧 우리들을 친북이니 빨갱이니 하며 중상하던 교회 운동 세력과 DJ 지지 세력들이었다. 그런 행사에는 전두환 일당을 지지하고 우리를 적대시했던 통일교도들과 보수 기독교단 신도들이 적극 참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 문제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일부 미국 정계 인사들까지도 참가하였고,궐기대회 때는 미국 국가까지 장엄하게 울려 퍼져 누가 봐도 미국의 입김이 뒤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때 조국에서 오신 스님 한 분이 우리가 궐기대회장에 들고 나간 ‘미군철수’,‘핵무기 철거’ 피켓을 우격다짐으로 빼앗는 횡포를 부렸다. 더구나 터무니없이 미국 국가를 연주하는 주최 측의 자세에 분노해서 더 이상 우리는 그런 집회와 시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6.29 선언이 나온 이후 동포 인권 운동단체들은 조국의 민주화가 다된 것처럼 희희낙락했다. 그러나 나는 미국의 기만적 계량화 음모를 예의 주시하며 회원들에게 일시적 정세 호전에 낙관하여 방심하거나 동요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장기적 전망을 갖고 운동을 충실하게 해나갈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국에서 대통령직선제를 주 내용으로 하는 개헌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연말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80년 초의 세칭 ‘서울의 봄’ 때처럼 DJ와 YS간에 후보 경쟁이 시작되고 그것이 분열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는 한편,분열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 본 두 사람이기에 비록 경쟁은 하겠지만 자멸적 분열로까지는 안 가리라 생각하며 조국정세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국의 정세는 내가 우려했던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야당의 분열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조국의 운동권마저 ‘비판적 지지’ 운운하는 세력들로 인해 분열의 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나는 분노와 절망으로 몸부림쳤다.


결국 대통령 자리에 눈이 멀어버린 DJ는 자신이 YS보다 더 훌륭한 대통령감이고 당내 경선을 통해서는 자신이 후보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자,YS와 힘을 합쳐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고문으로 자신의 추종자들은 간부나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신민당에서 추종자들을 이끌고 나가 평민당을 만든 후 스스로 후보로 나서버린 것이다.

DJ는 야당을 분열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감정을 이용해 국민들까지 분열시키기 시작했다. 남북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는 것도 이리 괴롭고 서러운데, 지역감정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걱정했다면 DJ는 호남인들에게 지역차별과 지역감정 조장의 원흉이 역대의 독재정권이지 영남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시키고 추악한 지역차별은 참다운 민주정부의 수립을 통해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서 망국적인 지역감정과 갈등을 완화시키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호남 출신인 자신이 집권해야만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호남인들을 현혹하여 민주화운동의 중심세력이던 호남인들을 자신과 자신의 당에 대한 맹목적 지지 세력으로 오도,변질시켜 자신과 당을 제외한 다른 정치인이나 당은 무조건 배척하게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망국적인 지역분열,지역대결을 전제한 ‘4자필승론’까지 내세우며 선거운동을 하기 시작한 DJ의 분열행위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DJ의 분열 행위는 그 어떤 변명을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행위였다. 수많은 조국 동포들이 죽음과 고문과 투옥과 가정불화와 가난을 무릅쓰고 줄기차게 투쟁하여 미국 정부와 전.노 일당으로 하여금 전략적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어 놓았는데,DJ는 그 피와 땀과 눈물로 쟁취한 역사적인 기회를 자신의 야심 충족의 기회로 생각하여, 똘똘 뭉쳐 대결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분열 행위를 함으로써 싸우기도 전에 미국과 전.노 일당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만 것이다.

나를 격분시키고 절망하게 만든 것은 DJ뿐만이 아니었다. 민족민주운동과 선거운동을 혼동하여 이의 분열행위를 방조 지지함으로써 전술적으로는 DJ를 돕고 전략적(결과적)으로는 미국과 전.노 일당을 도와버린 ‘비판적 지지’ 운운하는 일부 운동권 세력도 절망하기에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과감한 투쟁을 전개해 온 그들이,그렇게 치열한 학습과 사상 투쟁을 해온 그들이,그렇게 과학적 사고와 조직적 실천을 강조해 오고,그렇게 통일 단결을 외쳐온 그들이 피어린 투쟁을 통해 쟁취한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전.노 일당을 집중 공격하고 신민당을 적극 지지하여 선거전을 ‘민주 대 반민주’ 대결 구도로 몰아가 미국과 전.노 일당의 음모를 분쇄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이의 적전 분열 행위를 방조,지지했을 뿐만 아니라,한술 더 떠 DJ가 선거전을 ‘민주 대 반민주’ 대결 구도는커녕 반운동적이고 반민족적인 추악한 지역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것까지도 방조 지지하여, 싸우기도 전에 미국과 노태우 일당에게 승리를 안겨주어 버렸으니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비판적 지지 세력들은 미국과 전.노 일당 그리고 그들의 지지 대중들을 어떻게 그렇게 과소평가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대중들의 의식 수준과 자신들의 역량을 과대평가할 수 있었을까? 정말로 그들은 분열해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최악의 경우에도 지켜내야 할 운동의 존엄성과 대의,그리고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내야 할 대중의 신뢰를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또 선거 패배 이후의 운동을 고려도 하지 않은 채 승리가 보장된 최후의 대결인 양 어떻게 그렇게 맹목적으로 DJ를 지지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정말로 DJ에 대한 지지와 YS에 대한 배척이 민주 대분열이 아니고 훌륭한 민주 대연합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정말로 자신들이 DJ와 평민당을 견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정말로 김대중이가 YS 보다 더 많이 탄압받았기 때문에 더 많이 민주화운동을 해왔다고 생각했고 김대중이가 YS보다 더 진보적이고 더 도덕적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대중들은 DJ가 분열해도 노태우나 YS보다 더 많이 지지해줄 것이라고 믿었을까?

나는 미국 현지에서 미국의 CIA 요원들이 대거 조국으로 들어가 DJ와 YS의 분열 조장,분열 유지 공작을 하고 있다는 소식과,심지어 미국의 군 정보기관 최고위급 책임자들까지 조국으로 들어가 공작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또 조국으로부터는 운동권의 분열 심화,지역감정 격화,후보 단일화 불가능 등의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광주운동권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전화를 걸어 호소하기 시작했다.


“후보 단일화를 위한 최후의 열쇠는 광주운동권에 있다. DJ에게 강력한 압력을 넣어 사퇴하게 하라.” 그러나 대답은 한결같았다.

“여러 면에서 YS보다 DJ가 더 낫다. 여기서 그런 짓 했다가는 몰매 맞아 죽는다.”


절망감 때문에 늘어져 있던 나는 회원들에게 말했다.


“노태우가 당선된다. 노태우의 득표 숫자는 YS와 이의 득표 숫자를 합한 것보다 적을 것이다. DJ는 3등 날 것이다. 조국의 운동 세력 대부분이 엄청난 과오를 저질러 앞으로 운동 역량이 급격히 약화될 것이고 대중의 신뢰도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다. 우리들의 짐이 더 무거워졌다. 멀리 보고 묵묵히 일해 나가자.”


그리고 또 이렇게 제안했다.


“후보 단일화가 안돼서 실패가 확실하니 독자 후보라도 지원해서 운동의 대의를 선전하고 후보 단일화를 위한 최후의 압력을 넣도록 하자.”


나의 제안에 따라 회원들은 독자 후보 진영에 후원금을 보내고 격려의 전화를 아낌없이 해줬다. 선거를 10여 일 앞둔 어느 날 연대운동을 하던 타민족 형제 운동가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분열되어 있다가도 뭉쳐야 할 때인데 너희들은 뭉쳐 있다가 분열해서 싸우냐? 분열해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너희 나라 대중들의 의식 수준이 높고 운동 세력의 힘이 강하냐?”

“괴롭다. 더 이상 묻지 말라. 나도 이해 못하고 있다.”


선거가 끝나고 개표 결과가 나왔다. 예측한 대로였다. 개표가 끝나자마자 유럽의 모 운동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국제사회에 컴퓨터 부정선거를 폭로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나는 정말로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비열한 놈들! 컴퓨터가 개표하고 컴퓨터가 검표하나? 컴퓨터만 계산할 줄 알고 사람은 계산을 못하나? 개표 종사원들,참관인들,지구당이나 중앙당 직원들은 덧셈 뺄셈도 못하고 각 후보 득표 숫자도 파악 못하는 머저리들인가? 나쁜 놈들! 분열해서 져놓고 애먼 컴퓨터 핑계를 대다니..”


87년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내가 운동에 참여한 이후 가장 큰 절망감을 맛보게 해준 87년은 그렇게 가버렸던 것이다.


‘미주 한겨레신문’ 발간 시도와 실패


88년이 되어 나는 회원들과 함께 또 하나의 일을 시작했다. 동포들을 의식화하고 동포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언론 매체가 꼭 필요한데 자체 역량으로는 주간지 발행도 불가능한 실정이어서 우리들은 신문 노래만 부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조국의 한겨레신문사에서 미주지역 지사를 맡아서 해 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발 벗고 나섰다. 조국의 한겨레 신 문에 미주 현지판을 붙여 보급하자. 현지판은 역량에 맞게 처음에는 주 1회부터 시작하여 점차 발행 횟수를 늘려가자. 조국에서처럼 뜻있는 동포들과 함께 주식회사를 만들어 발간해 보자. 우리들은 그렇게 결정하고 난 다음 각 지역 동포사회를 누비고 다녔다.

동포들을 설득해 조국에서 해직된 언론인들을 포함한 9백 7십 명을 모아 ‘미주 한겨레신문 발간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고 장단기 사업계획서를 작성한 후 조국의 한겨레신문사에 제출했다. 그러나 89년이 되어도 한겨레신문사에서는 어떠한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리다 지친 우리들은 모든 것을 백지화해 버리고 말았다.

우리들은 노 정권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한겨레신문사에서 우리를 얼마나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고려하지 않고,또 한겨레신문사의 내부 사정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의욕만 앞세우고 일을 추진했다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방미 규탄시위


미국에 있는 동안에 5.18 학살 원흉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몇 차례씩 다녀갔다. 그들이 올 때마다 대사관과 영사관은 바퀴벌레가 권력을 잡아도 아부하고 지지할 것이 뻔한 동포사회 유지란 작자들과 한심한 일부동포들을 동원해 그들로 하여금 공항 화물터미널에서 환영의 박수를 치게 했다. 그리고 조국의 언론들은 그때마다 그들의 환영이 미주 동포 전체의 환영이나 된 것처럼 크게 보도하곤 했다.

한청련,한겨레는 전.노가 올 때마다 도착하는 공항과 숙소 겸 리셉션 장소로 쓰는 호텔,그리고 연설하는 대학 등을 악착같이 쫓아다니며 규탄시위를 했다. 물론 다른 운동단체 사람들과 일부 동포들이 함께 하기는 했으나 언제나 그들은 소수였다. 조국의 언론들은 우리들의 시위 사실을 아예 안 다루거나 다루어 보았자 겨우 몇 줄을 할애하는 정도에 그치곤 했다.


전두환이 시애틀에 왔을 때,돈이 없어 비행기로 못 가는 샌 프란시스코와 LA 회원들이 18시간과 24시간을 자동차로 달려가 시애틀 회원들과 합류해서 규탄시위를 했던 것처럼,전.노가 LA나 샌프란시스코,시애틀로 오면 서부지역 회원들이 집결해서 시위를 하고 워싱턴 DC나 뉴욕으로 오면 동부자역 회원들이 집결해 시위를 하곤 했다. 한번은 사정을 잘 모르는 수행 기자들이,가는 곳마다 똑같은 복장을 하고 똑같은 구호를 외치고 똑같이 풍물을 치며 시위하는 우리 시위대를 보고는 자신들처럼 계속 비행기를 타고 쫓아다니는 같은 시위대로 착착하고 “그 사람들 기동력 한번 끝내준다.”고 말해 웃은 적도 있었다.


나는 전두환이 LA에 왔을 때 규탄 시위를 하면서 묘한 경험을 한번 했다. 우리는 그때 흡혈귀 모습을 한 전두환 인형을 만들어 군복을 입히고 군화를 신긴 후 목에 밧줄을 걸고 끌고 다니며 시위를 했었다. LA공항 화물터미널 앞 인도에서 전두환의 도착을 기다리며 시위를 할 때 우리들은 그 두환이 인형을 길바닥에 눕혀 놓고 오갈 때마다 사정없이 짓밟으며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위에 참가한 타민족 형제들도 웃으면서 그 인형을 짓밟았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더 이상 밟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부탁해 놓고 나서 나의 묘한 감정에 놀라 많은 생각을 했다. 제기랄! 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이구나. 두환이도 내 민족이라고…


5.18 기념행사 개최


나는 해외동포들이 5.18 정신을 올바르게 기념, 계승하고 전.노 일당의 학살만행을 두고두고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알찬 5.18 기념행사를 해마다 꾸준히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 지역 한청련,한겨레는 지역적 조건에 따라 단독 또는 공동으로 개최하거나,LA에서처럼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함께 ‘5월제 추진위원회’ 라는 상설기구를 만들어 개최해 나갔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는 다른 운동단체들의 5.18에 대한 관심이 식어감에 따라 LA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한청련,한겨레가 일반 동포 단체들의 후원 하에 단독으로 기념행사를 개최해 나가게 되었다. 행사 내용도 초기에는 강연을 중심으로 했다. 그러나 동포들의 참여도가 떨어지기 시작한 80년대 말부터는 조국의 영화운동 단체들이 제작한 영화필름을 구해 상영하는 등 문화행사 중심으로 바꾸어 나갔다.


한청련,한겨레와 5월제 추진위원회는 조국의 문화운동 단체들과 김용태(민예총 사무총장) 형님의 적극적 협조 덕분에 노 정권의 감시망을 뚫고 제때에 필름을 입수하여 89년 5.18 기념행사 때는 ‘오 꿈의 나라’,90년에는 ‘파업전야,91년에는 ‘어머니,당신의 아들’,92년에는 ‘닫힌 교문을 열며’ 등을 기념식에 이어 상영하는 등 꾸준히 5.18 기념행사를 개최해 나갔다. 내가 귀국한 뒤로도 한청련,한겨레,5월제 추진위원회는 94년에는 광주의 극단 토박이를 초청하여 미주 전역에서 연극 ‘모란꽃’을 공연하고 95년에는 광주의 가수 박문옥,오창규씨를 초청하여 각 지역에서 노래공연을 하고 96년에도 극단 토박이를 초청하여 연극 ‘금희의 오월’을 순회공연 하는 등 지금도 계속해서 5.18 기념행사를 충실하게 개최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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