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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3-문화운동2019-01-0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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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닦기와 틀잡기 – 문화운동(1)


재미동포들의 운동에는 문화운동이 없었다. 운동 단체들이 주최한 집회나 시위에 나가 보아도 문화운동적 요소는 거의 없었고 노래도 ‘우리 승리하리라와 ‘부름받아 나선 이 몸’,그리고 ‘고향의 봄’만 부르고 있었다.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필요한 민족정서를 일깨우기 위해서,또 운동의 대중화를 위한 선전교육을 위해서,그리고 회원들의 통일 단결을 위한 정서의 통일을 위해서라도 나는 문화운동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문화운동의 경험도 기량도 없으면서 광주에서 문병란 선생님,황석영 형님,김남주 시인으로부터 얻어들은 보잘 것 없는 지식과,광주의 극단 광대를 후원했던 얄팍한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문화운동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민족학교는 설립 직후부터 탈춤강습과 우리노래 보급을 하고 운동가요 테이프와 ‘조국의 노래’라 이름 지은 운동가요집을 만들어 보급 판매하기 시작했다. 또 청년학교는 조국에서 만든 판화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옵셋 인쇄로 수천 장을 만들어 보급 판매하였다. 민족교육봉사원에서는 84년에 한청련 회원 한 명을 광주로 파견하여 사물놀이를 배워오게 한 후 풍물 강습을 시작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각 지역에 한청련이 조직되고 마당집들이 설립되자 문화운동도 서서히 기틀을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운동가요 테이프도 10여 종을 편집 제작하였고,‘조국의 노래’도 몇 차례 개정 증보판을 발간하였으며 상당수 회원들이 탈춤도 추고 사물도 칠 수 있게 되었다.


85년은 미주의 문화운동사에 획기적인 해였다. 방미 중이던 황석영 형님이 뉴욕 한청련의 일부 회원들을 묶어 문화패 ‘비나리’를 만든 후 집중 지도하여 조국의 분단과 5.18, 핵문제 등을 다룬 창작 마당극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을 공연했다. 공연을 본 타민족 형제들과 동포들의 평가가 아주 좋아서 동부 지역 여러 곳에서 초청공연을 하게 되었다.

비나리 활동을 계기로 한청련 회원들의 문화운동 기량은 급속도로 향상되었고 문화운동에 대한 자신감도 부쩍 커졌다. 그렇게 되자 다른 지역 한청련들도 뉴욕의 비나리를 본받아 LA에는 ‘한누리’,시카고는 ‘일과 놀이’,산호세는 ‘새누리’라 이름한 자체 문화패를 다투어 만들어 나갔다. 문화운동 역량이 강화된 각 지역 한청련과 마당집들은 풍물강습,여름철의 문화 강습,대보름 때의 동포 상가 지신밟기 등을 하는 한편 창작극을 공연하고 각종 집회나 시위장에서 사물놀이를 하는 등 활동을 꾸준히 해나갔다.

91년에는 해외한청련이 그동안 축적한 문화운동 역랑을 결집해 ‘해방의 소리’라는 작품을 갖고 50일 동안 유럽과 호주에서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한청련과 한겨레는 또한 독특한 시위문화도 만들어 갔다. 타 민족 형제들과 함께 하는 각 지역의 각종 연합 연대시위 때마다 풍물패를 앞세웠다. 그 뒤를 하얀 고무신과 하얀 농민복에 하얀 머리띠를 두른 회원들이 타민족 형제들에게는 없는 다양한 색깔의 독특한 농기들을 들고 따라가면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한청련과 한겨레의 시위대에 집중되었다. 아무렇게나 입고 피켓과 플래카드만을 들고 아무런 악기도 없이 시위에 참가하는 타민족 형제들은 독특한 우리 시위대의 모습과 모든 잡소리를 제압해버리는 위력적인 풍물 소리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는 모든 시위 때마다 우리 풍물패가 맨 앞에 서게 되었을 뿐 만 아니라 타민족 형제들의 독자적인 집회나 시위 때도 우리 풍물패는 빠지지 않고 초청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한청련과 한겨레는 항상 집회 시위가 끝나면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여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내버려두고 떠나버리는 타민족 형제들에게 모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민족적 색채가 짙고 조직적이고 박력있는 우리 시위대는 미국뿐만 아니라 호주,캐나다에서도 급속도로 유명해져 갔다.


운동의 생활화 – 문화 운동(2)


나는 회원들의 품성개조와 올바른 생활문화 창조를 문화운동의 중요한 몫으로 보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평소의 생각대로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수없이 강조했다.

“운동은 대중 함께 잘못된 문화와 체제와 법과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 투쟁함과 동시에 자신과 대중을 교육시키며 , 지향하는 새로운 문화와 체제와 법과 제도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자신과 대중으로 변화시키는 활동이다. 운동가나 운동조직들 이 대중의 신뢰를 받지 못하면 투쟁도 교육도 성공할 수 없다. 대중의 신뢰는 선전선동이나 이론 교육만으로는 얻을 수 없고 실천교육(솔선수범)을 제대로 해야만 얻을 수 있다. 실천교육은 주로 대중들이 보고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구체적 생활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운동가들은 조직생활은 물론이고 가정생활,직장생활,사회생활 그 자체가 운동이라는 것과 대중들은 항시 운동가들의 생활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운동의 생활화를 이뤄야 한다.”

 

 

나는 ‘자신이 향하는 새로운 사회에 부적합한 자신의 품성과 생활 자세를 고치지 못한 운동가와 생활 속에서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운동가는 대중은커녕 어린이들 교육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대중의 신뢰는커녕 동지들과 자기 자녀들의 신뢰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혹독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또한 ‘모든 운동조직들은 개개 조직 특유의 문화와 기풍과 분위기가 있는데 대중들은 운동 조직들의 주의 주장보다 그것들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조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통일,단결을 위해서는 사상 의식의 통일도 중요하지만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인식의 통일과 좀 더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견해의 통일 그리고 사상 의식과 인식과 견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정서의 통일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되풀이 해 강조했다. 내가 정서의 통일이 중요하다고 특별히 강조한 이유 중의 하나는 조국 동포들과 달리 해외 동포들은 여러 면에서 동질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나의 노력과 실천에 영향을 받았는지 각 지역 마 당집과 한청련,한겨레 회원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남다른 생활문화를 만들어 갔다. 자유주의,개인주의,이기주의 대신 공동체적인 절제와 헌신,희생과 상부상조의 기풍이 자리 잡게 되었다. 사치,허영,낭비,나태,위선 대신 검소,근면,성실, 진실의 기풍이 자리 잡아 삔들바우들은 기를 못 펴고 돌쇠와 곰바우들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


여성 간부들의 비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남성 우월주의 작태에 대한 비판을 일상화했다. 설거지는 무조건 남성 회원들이 하고 자녀가 있는 여성 회원들에 대해 특별한 배려를 했다. 밤에 여성 회원들이 떠날 때는 무사히 차가 출발할 때까지 남성 회원들이 나가서 지켜보아 주는 일도 생활화 했다. 그 결과 여성들의 참여가 많아져 급기야 여성 회원 수가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기혼 여성 회원들은 그동안 미국 여성들처럼 무비판적으로 써왔던 남편의 성을 버리고 자신의 성을 되찾아 쓰기 시작했다. 또 손님들에게 정중히 대하고 어르신들을 깍듯이 모셔 어르신들이 떠날 때는 문 밖까지 나가서 인사하고 장애자들을 정성으로 대하고 흑인 형제들을 비롯한 타민족 형제들을 존중했다. 무절제한 음주를 금하고 주위 환경을 항상 깨끗이 청소 정돈하고,남의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는 청소와 설거지를 다 해준 후 빈 깡통을 모아서 가지고 돌아왔다. 결혼식은 개량형 전통혼례식으로 하는 등의 생활문화를 만들어 갔다.

각 지역 마당집과 한청련,한겨레는 자신의 이름과 자녀들의 이름을 ‘죤’,‘메리’와 같은 강아지 이름으로 쓰는 회원들에게는 우리 이름을 쓰도록 하고,우리말이 서투른 회원들까지도 타민족 형제들을 상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우리말만 쓰도록 했다. 그동안 무비판적으로 써오던 명칭과 용어들을 하나 둘 검토하여 멸시와 조소의 뜻이 담긴 교포를 ‘동포’로,침략 백인들이 붙인 인디언을 ‘원주민’으로,한심한 동포들이 멸시와 천대의 뜻으로 쓰는 깜둥이,연탄, 깜씨, 니그로,흑인을 ‘흑인 형제’ 또는 ‘아프리칸 어메리컨’으로,다양한 타민족들을 통칭할 때는 ‘타민족 형제’로 바꿔 쓰고,해외동포는 조국을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뜻에서 분단용어인 ‘남한-남조선’, ‘북한-북조선’을 ‘남부조국’,‘북부조국’으로,‘한국어-한글’은 ‘우리말, 우리글’로,센터를 ‘마당집’으로 바꿔 쓰는 등 언어문화에도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우리들이 남다른 생활문화를 만들어 가자 그것을 좋게 본 회원들의 가족들과 친지들 그리고 일반 동포들의 우리들에 대한 신뢰는 점차 높아져 갔다. 그리고 바꾼 명칭과 용어들 을 회원들이 자연스럽게 쓰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다. 회원들은 서로 지적하고 핀잔을 주고받으며 함께 노력해서 새로 바꾼 명칭과 용어들을 자연스럽게 쓰게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손님들이나 일반 동포들과 대화할 때 느꼈던 초기의 어색함도 잘 극복해 나갔다. 손님으로 온 조국의 일부 운동가들은 ‘깜둥이’라는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쓰고 우리 회원들보다 영어 단어를 더 많이 써서 나를 아주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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