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 사위 항쟁이 뭡니까?”
미국과 캐나다,호주 등지에 살고 있는,특히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 청년들은 동질성이 거의 없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 지 25세 전후의 청년들을 예로 들어보겠다. 그들은 비슷한 나이의 청년들이지만 너무나 이질적이고 복잡 다양한 청년들이었다. 5살 이전에 이민 온 청년과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생활도 마치고 직장생활까지 하다 온 청년,이민 온 후 동포사회 속에서 성장하거나 거주한 청년과 타민족 형제 들 사회 속에서 성장하거나 거주한 청년,이민 온 후 현지에서 학교를 다닌 청년과 다니지 않은 청년,이민 온 후 가정에서 기초적인 민족교육과 우리말 교육을 받은 청년과 못 받은 청년,영어 또는 우리말을 잘하는 청년과 잘 못하는 청년과 둘 다 잘 하는 청년,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으로 생각하는 청년과 대한민국(남부조국)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청년,언젠가 조국에 돌아갈 생각을 가진 청년과 현지에서 뼈를 묻을 생각을 가진 청년, 조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잘 아는 청년과 잘 모르는 청년, 조국의 현실에 관심이 있는 청년과 전혀 없는 청년,조국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 아는 청년과 모르는 청년, 유신체제를 겪은 청년과 안 겪은 청년,5.18을 겪은 청년과 안 겪은 청년,백제나 신라 그리고 전봉준 장군과 정약용 선생을 아는 청년과 모르는 청년 등 너무나 이질적이고 복잡 다양한 청년들이었다.
조국과는 달리 혈연,지연,학연 등의 연고가 거의 없고 이민 온 시기가 달라 개인적,사회적, 역사적 경험이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지식의 정도,사고방식,언어 구사능력,정서 등이 천차만별인 청년들,게다가 조국의 청년들에 비해 의식수준이 낮은 청년들을 상대하면서 나는 당혹감도 많이 느꼈고 애로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특수한 사회적 조건 때문에 운동 참여 동기 가 필연적이고 사회적인 조국 동포들과는 달랐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해외 동포들의 운동 참여 동기는 지극히 우연적이고 개인적이다.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 없는 한 조국 동포들의 운동은 지속될 수밖에 없는데 반해 해외 동포들은 개인적 충격이나 감동 같은 운동 참여의 동기가 약화되거나 운동 과정에서 긍지와 보람을 못 느끼고 실망하거나 심한 비판을 받거나 갈등,충돌 등을 겪게 되면 쉽게 운동을 중단하거나 포기해 버린다. 따라서 해외 동포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해외 동포들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과 의식과 동질성과 통일성을 끊임없이 강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개인적, 조직적 차원의 긍지와 보람과 희망을 끊임없이 불어넣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학습과 실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명감을 가지고 부족한 역량을 메우기 위해 청년들의 학습과 실천을 지도해 나갔다.
초기의 학습지도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학습용 도서 자료의 구입이었다. 간신히 구한 학습 자료들을 그때그때 복사하여 썼다. 민족학교 초기인 84년의 경우에는 1년 동안 무려 12만 장의 학습 자료를 복사하기도 했다. 나는 청년들과 만나면 밤을 새워가면서 대화를 나눈 후 학습 참여의사를 밝힌 청년들을 따로 모아 마당집이나 마땅한 가정집에서 정기적으로 민족 사 학습을 함께 해 나갔다. 나는 학습지도에 최선을 다했다. 한자를 못 읽는 청년들을 위해 학습 자료에 나오는 한자마다 우리글로 발음을 써주기도 하고 시간이 없어 학습에 못 나온 청년의 업소로 찾아가 단둘이 앉아 학습을 하기도 했다. 단식 중에도 입에서 단내를 풍겨가며 학습지도를 하고 허리가 아파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는 문짝에 묶여 누운 채 실려 수련회장으로 가기도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 지역 마당집과 한청련은 학습용 도서 자료들을 거의 다 확보하게 되었고 연합교육부에서 세운 역사,경제, 철학, 조직 등의 분야별 학습계획에 따라 타 지역과 경험 을 교환해 가며 많게는 주 1회,적게는 월 1회의 정기적인 자체 학습을 생활화해서 꾸준히 해 나갔다. 각 지역의 학습지도는 의식 있는 유학생 회원들과 동포 청년들 중에서 모범적으로 의식화된 회원들이 주로 맡아서 했다. 특히 유학생 회원들은 조국에서 싸우고 있는 동료 학생들과 친구들에 대한 죄의식 속에서 공부를 하다가 나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학업을 중단해 버린 회원들이었다.
학습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일화가 있었다. 2세나 1.5세 회원들 중의 일부는 우리말이 서투르기 때문에 학습을 매우 힘들어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거나 다른 회원들에게 물어가며 열심히 학습을 해나가 주위를 감동시켰다. 어느 날 부마항쟁에 관해 학습을 하던 때였다. 도중에 임경규라는 2세 회원이 느닷없는 질문을 했다.
“임금님 사위 항쟁이 뭡니까?”
모두들 어리둥절했다가 그 질문의 배경을 알고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는 ‘부마’가 부산과 마산을 줄여 쓴 말인 줄 모르고 사전을 찾아 ‘임금님 사위’라는 뜻풀이가 나오니까 이해가 안 가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 또 한 번은 내가 빈민들의 굶주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릴 때 이민 온 한 회원이 느닷없는 질문을 해왔다•
“도대체 굶주림이라는 것이 어떤 거예요?” “아니 배고픈 경험 안 해봤어요?” “나는 배가 고프면 그때그때 먹었기 때문에 잘 몰라요.” “......”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말이 서투른 2세들도 점점 우리말을 잘 하게 되었고 의식도 좋아져 대부분이 전문성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훌륭한 운동가로 성장하였다. 그들 중 일부(김난원,한진아,임경규, 이진숙,흥정화 등)는 한청련의 간부나 마당집의 원장,또는 이사가 되어 맹활약을 하게 되었다. 한청련은 조직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히자 예비회원제를 운영했다. 역사 학습을 마친 청년들 중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청년들을 예비회원으로 인정하고 일정한 학습과정을 또 한 차례 밟게 한 후 정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등 가입 절차를 강화했다. 조직생활 수칙을 만들고 회원들을 상대로 조직시험을 보는 등 점차 조직규율을 강화해 나갔다. 또 못된 외부 세력들의 분열,와해공작으로부터 조직을 지키기 위해 보안지침을 만들어 회원들로 하여금 엄수하도록 했다.
나는 동포들의 거주 지역이 너무 분산되어 있고 또 멀리 떨어져 있어 접촉,교류가 어렵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회원들의 통일,단결을 위한 동질성 강화와 일체감 조성을 위해 가능한 한 자주 접촉하고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 무리해서라도 매년 한 차례씩 전체 회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총회를 겸한 대회를 갖도록 했다. 그 대회를 84년부터 88년까지는 매년 8월에 열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8월 대회’라 불렀고 그 이후로는 재정난 때문에 2년에 한번씩 10월에 열었는데 ‘10월 대회’라 불렀다. 지역을 바꾸어 가며 열었던 이 대회는 2박3일 동안 참가자들이 시위도 하고 집중적으로 학습과 토론도 하는 정치집회이자 연합수련회였다. 또 즐겁게 어울려 놀기도 하는 신나는 잔치마당이기도 했다.
대회의 일정은 크게 나누어 백악관,UN본부,영사관 등을 상대로 한 시위와,제3세계 운동 연대,해외운동 발전,조국의 평화와 통일,2세 운동,동포사회 운동 등을 주제로 한 학습과 토론 그리고 대화와 놀이 및 정기총회로 짜여졌다. 참가자들은 한청련 회원들과 예비회원들,연대하는 타민족 형제들과 유럽,일본,호주, 캐나다 등지의 동포 청년 운동가들 그리고 후원자 들이었다. 한청련은 한겨레와 해외한청련이 결성되자 대회를 함께 주최하고 준비해 나갔다. 8월 대회와 10월 대회는 나같이 영어를 잘 못하는 참석자들과,타민족 형제들이나 2세들처럼 우리말을 잘못하는 참석자들을 위해 동시 통역시설을 준비하는 등 철저한 준비와 알찬진행 덕분에 항상 성공적으로 끝났다.
나는 해외 동포 청년들이 올바른 통일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남부조국과 북부조국,그리고 미국을 객관적으로 봐야 하고 남북을 하나로 보는 통일된 조국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올바른 민족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나 자신을 스스로 해외운동 개척,강화를 위해 일정 기간 파견 나온 사람으로 생각하여 내가 귀국하게 되더라도 해외운동이 해외 동포들 스스 로의 힘으로 변함없이 지속될 수 있도록 만들어놔야겠다고 생각하여 가능성이 있는 회원들의 지도력과 조직의 강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지도력과 조직의 강화를 위해서 한청련 초기부터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연합 임원들의 회의인 중앙 위원회와 각 지역 대표위원들의 회의인 대표위원회를 매년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열도록 했다. 그리고 2박 3일 동안 진행되는 대표위원회에서는 희망하는 모든 회원들은 참관할 수 있게 했다. (87년에 한겨레가 결성된 후부터는 한겨레의 대표자회의를 한청련의 대표위원회와 함께 열었기 때문에 회원들은 그 회 의를 ‘합동회의’라 불렀다.)
또한 나는 동포 청년들이 너무 비과학적이고 비조직적인 생활을 하는 데 놀라 사업 활동을 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과학적 사고와 조직적 실천을 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훈련시켜 나갔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의의와 목적을 정확히 인식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후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실천 속에서 모범을 보여 갔다. 한청련의 조직시험 문제에는 남들이 보면 웃을 문제도 출제했다. 그 중 두 가지만 소개해 보겠다.
1. 회원들이 어떤 동포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 함께 가기로 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 정답: 초대자의 이름과 전화번호,주소를 기입한 정확한 약도를 만든다. 마당집과 한청련을 소개할 전단과 자료 그리고 적당한 선물을 준비한다. 타고 갈 자동차를 점검한다.
2. 마당집에 불이 났다.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정답: “불이야!” 하고 외치며 불을 끈다. 불가능할 때는 전화로 소방서에 신고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회원들은 “중요한 서류를 챙겨 밖으로 피한다.’고 했다.)
여하튼 시간이 흐르면서 한청련 회원들은 상당한 수준의 의식을 갖추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동질성,통일성,규율까지 만들어 냈다. 또한 한청련 조직은 제3세계 운동을 포함한 미국 내의 모든 진보적인 운동 세력들 가운데서 유일무이한 청년학생들의 운동조직,가장 맹렬한 사업 활동을 하는 통일성을 갖춘 전국적인 운동조직,회비 납부율이 95%를 웃도는 엄격한 규율의 특이한 활동가 조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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