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한국청년연합의 결성
나는 83년 10월부터 미주 청년운동조직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했다. 83년 I2월 30일,2박 3일 동안 샌프란시스코의 한 노조건물에서 서부지역청년대회를 열었다. 그 대회에는 민족학교 활동을 통해 의식화된 LA 지역 청년들과,내가 시애틀에 있을 때 사귄 후 계속해서 연락을 취해왔던 시애틀 지역 청년들,비행기 값이 없어 주위의 도움으로 7〜8 차례 자동차로 올라 다니며 대화해서 뜻을 함께하게 된 샌프란시스코 지역 청년들,그리고 민족학교를 방문했던 뉴욕과 시카고 지역의 몇몇 청년들이 참가했다.
대회에서는 조국 정세,재미동포사회의 현황,해외운동의 현황,미주청년운동의 필요성 등에 관한 분석과 토론을 집중적으로 했다. 대회 마지막 날인 84년 1월 1일에는 참가자들이 뜻을 하나로 모아 ‘재미한청련’(재미한국청년연합)을 결성했다. 마침내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 평화를 위해 일하고 동포사회를 위해 일할 해외동포 청년운동조직이 출현한 것이다. 미주 최초의 청년운동체가 결성됨으로써 해외운동사,미주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긋게 된 것이다. 참가자들은 재미한청련 결성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미국 각 지역에 한청련을 조직한다. 매년 8월에 대회를 연다. 각 지역 한청련은 LA의 민족학교와 같은 마당집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결의했다. 나는 광주수난자돕기회 결성과 민족학교 설립에 이어 재미한청련을 결성함으로써 미국에 온 후 2년 반만에 본격적인 해외청년운동의 첫 발을 내딛었다. 감개무량했다. ‘오월 영령들이여,조국의 동지들이여! 이 못난 놈이 온갖 어려움을 뚫고 마침내 미국에 청년운동조직을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계속 힘을 주소서.’ 재미한청련을 결성한 후 나는 각 지역 한청련 조직 및 마당 집 설립 활동에 들어갔다. 활동자금이 없던 당시의 상황에서 나는 우선 먹여주고 재워줄 사람이 있는 곳부터 찾아가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만나 밤을 새워 설득하고 호소하여 호의적 반응을 보이는 청년들과 함께 학습을 시작했다. 일정 기간의 학습을 끝낸 청년들 중 의식화가 되었다고 판단되는 청년들로 하여금 그 지역 한청련을 결성하게 하였다.
나는 조국과 민족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청년들에게는 조국의 현실과 운동 현황,그리고 조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소상하게 설명해서 민족의식과 조국애를 일깨워 주고,미국 사회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떳떳이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조국의 민주 자주 통일 평화를 위해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조국과 민족에 대한 관심도 있고 운동에 대한 관심도 있으나 조국을 버리고 이민 온 데 대한 죄책감과 낮은 의식, 그리고 부족한 운동경험에 기인한 열등감과 자괴감 때문에 머뭇거리는 청년들에게는 이민현상을 개인적 차원에서 민족적 차원으로 끌어 올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설명하고 또 낮은 의식과 부족한 운동경험은 더 열심히 학습하고 실천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해외운동을 매도 안 맞고 감옥에도 안 가며 하는 운동이라고 우습게 보거나,해외운동을 조국운동의 종속적, 위성적 주변적 운동으로,심지어 조국운동에 대한 응원 정도로 인식해서 그 주체성,창조성,고유성,독자성에 대해 회의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매 맞고 감옥에 가는 것이 훌륭한 운동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과,헌신적으로 땀 흘리며 하는 운동이 더 중요 하다는 것,그리고 해외운동도 조국운동과 똑같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해외운동은 조국의 민주 자주 통일 평화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민족민주운동의 특수한 지역운동이라는 것,따라서 해외운동은 독자성을 가지고 특수성과 전문성을 키워가야 한다는 것,그리고 해외운동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에서 하기 때문에 물적 인적 (기능적)으로 조국운동에 대한 지원도 해야 하고 조국운동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국제외교 연대운동도 해야 하는 등의 특별한 역할도 있다는 것을 열심히 인식시켜 나갔다. 유학생들에게는 더 직접적으로, 조국에서는 동료 청년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공부만 하고 있느냐고 힐난하며 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나는 여러 사람들의 헌신적 도움 덕분으로,일부 못된 운동가들과 영사관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86년 8월까지 서부의 시애틀과 LA 지역, 중부의 시카고,덴버,달라스 지역 그리고 동부의 뉴잉글랜드, 뉴욕,필라델피아,위싱턴 DC 지역의 한청련을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뉴잉글랜드,달라스,덴버 지역 한청련은 80년대 말에 조직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해체시켰다. 미국의 중남미 개입 규탄시위장의 충격
83년 말이었다. 니카라과,엘살바도르의 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의 중남미 개입 규탄 시위가 있었다. 그 시위에 나는 민족학교 청년들과 함께 참가했다. 비가 내리는 겨울이었지만 수천 명이 참가했다. 행진을 마치고 공원에 모여서 성토대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모여 서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하도 여러 사람들이 촬영하기에 그들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많이 촬영하느냐?”
그러자 그들 중 한 사람이 대답했다.
“코리언들이 우리들과 같은 구호를 가지고 시위에 참가한 것 이 이번이 처음이라 신기해서 그렇다.” 우리들 중 한 친구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너희들과 다른 구호를 가지고 참가한 코리언이 있느냐?” “그렇다. 이리 따라와 봐라.”
우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사람을 따라갔다. 앞장섰던 그 히스패닉 형제가 웃으며 손으로 가리킨 곳을 본 순간 나는 경악했다. 충격을 받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공원 밖 한쪽 도로변에 4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다음과 같은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서있었다.
“공산주의보다는 전쟁을!” “빨갱이들은 지옥으로!”
그들 중의 소수는 백인 형제들이고 다수는 우리 동포들이었다. 통일교도들이 반대시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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