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해외운동을 준비하다
동양식품점에서 일하다
이민국에서 망명 신청도 하고 건강도 많이 회복한 나는 갓 이민 와서 아직 정착하지 못한 청년 김일민으로 행세하며 김동건 선생님의 식품점에 나가 일을 거들었다. 나는 청소,식품의 정리와 진열 운반 등의 일을 하면서 가끔 김치도 담그고 계산기도 두들겼다. 그 식품점은 동양식품을 취급했기 때문에 우리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일본,베트남,필리핀,타이,미얀마,인도네시아,폴리네시아인들과 백인,흑인,히스패닉(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인들) 등 온갖 인종과 민족들이 찾아왔다. 덕분에 외국인과는 거의 접촉해 본 경험이 없던 깡 촌놈인 나는 서서히 국제 감각,인종 감각을 익혀갈 수 있었다. 호기심 많은 나는 열심히 그들을 관찰했는데 묘하게도 유색인종인 소수민족들에게 정이 더 끌렸다. 가끔가다 다 큰 여자들이 비키니 차림으로 가게에 들어오곤 했다. 나는 해수욕장에 가본 적도 없고 수영복을 입은 여자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때마다 쩔쩔댔다. 어떤 때는 웅장한 엉덩이를 가진 기형적인 여자들이 들어와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그때부터 비키니 차림의 여자를 ‘기저귀를 찬 여자’ 라고 불렀다. 손님이 없어 한가할 때는 가게 옆의 주차장에 나가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조국을 생각했다. 그러다 가끔 남몰래 울기도 했다. 해외운동에 대한 학습
식품점 일을 돕는 틈틈이 해외운동에 대한 학습도 해나갔다. 식품점에서 돌아오면 창고에 있는 신문 잡지들을 뒤져 해외 동포운동에 관한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정말로 중요하고 고마운 자료들이었다. 나는 이 자료들을 이용해 학습뿐만 아니라 김동건 선생님 부부와 토론도 많이 했다. 모든 것이 새로워 학습은 흥미진진했다. 학습을 하면 할수록 해외운동의 역량이 너무 미약하고 문제가 많다는 걸 깨달았다. 가끔 김진숙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조국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단체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한번은 반핵평화 운동 단체인 Ground Zero(핵무기 폭발시의 피해중심지)를 찾아 갔는데 신부,수녀,교수,학자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시애틀의 핵잠수함 기지 철조망 바로 뒤에 있는 황량한 풀밭에 판잣집 같은 허술한 가건물을 지어놓고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핵잠수 함 기지 철조망을 넘어 들어가는 반핵 시위를 하다 투옥된 회원들의 가족은 사무실 옆의 폐차된 버스 안에서 난민처럼 살고 있었다. 일본인 한 사람과 스리랑카에서 온 스님 한 분도 사무 실 옆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 스님은 풀밭 한쪽에 텐트를 치고 불상을 모셔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헌신적인 활동과 검소한 생활에 큰 감명을 받았다. 사무실 한쪽 자료실에는 각국의 핵 관련 자료가 비치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핵 문제가 가장 심각한 우리 조국의 자료들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그 단체 회원들과 대화를 시작했을 때였다. 독일에서 평화운동을 하는 독일 대학생 한 명이 찾아왔다. 그 학생은 배낭여행으로 평화운동단체 순방을 위해 세계를 일주하고 있었다. 내가 조국의 핵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자 모두들 어이없어 했다. 그 독일 대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코리아의 문자 해득률이 몇 퍼센트나 됩니까?” “5퍼센트만 문맹이다.”
그 학생은 이해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 학생이 잘못 알아들었다고 판단하고 말을 다시 정정 했다.
“문자 해득률은 95퍼센트가 넘는다.” 이렇게 강조해서 바로잡아 주자 그 학생은 충격을 받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나에게 물었다. “문자 해득률이 그렇게 높은 나라에서 왜 심각한 핵 문제를 방치하고 있습니까? 왜 강력한 반핵평화운동이 없습니까?” 나는 이렇게 변명했다.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너무 심각하고 운동역량이 약해서 불확실한 위험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강력한 반핵평화운동이 시작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대답이 옹색하다는 걸 금방 눈치챈 듯했다. 그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내 인생 처음으로 국제연대 운동과 반핵평화운동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 후 나는 시애틀에서 조국의 인권문제를 갖고 활동하고 계시던 김형중 씨를 비롯 여러분들과 만나 사귀었고 워싱턴 주 주립대학에 근무하는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만나 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새로운 나는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 나갔다. L.A로 옮기다 가을이 되자 나는 시애틀을 떠나 LA로 갈 계획을 세웠다. LA는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고 조국과 가장 빈번한 교류와 왕래를 하는 도시였다. 그런 LA를 나의 활동 거점으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또 전 서울 시장이셨던 김상돈 장로님이 날더러 LA에 와서 활동하라며,만약 LA에 오면 자신의 집에서 숙식을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김상돈 장로님은 우연히 시애틀에서 한번 만나 뵌 적이 있는 분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나는 디트로이트의 이학인 선생님과 김용성 박사님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랬더니 두 분께서는 디트로이트로 왔다가 워싱턴 DC를 거쳐 LA로 가라고 하시면서 비행기 표를 보내주셨다. 11월 초순 나는 그동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서 키우던 토끼 한 쌍을 농장을 경영하시는 동포 분에게 맡겼다. 그리고 김동건, 김진숙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정을 가슴 깊이 담고 4개월 동안 머물렀던 시애틀을 떠났다. (80년대 후반에 김진숙 선생님은 목사가 되셔서 빈민선교를 시작하셨고 김동건 선생님은 은퇴하신 후 노인회 활동을 하고 계신다.) 그네를 타본 것 외에는 공중과 인연이 없던 나는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디트로이트로 가서 두 분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 DC로 가서 하비 목사님께 인사 드렸는데 마침 그곳에 와 계시던 문동환 목사님을 찾아뵙고 며칠 신세를 졌다. 하비 목사가 총무로 계시는 북미한국인권위원회 사무실을 인사차 방문했을 때 나는 같은 건물 내에 있는 니카라과,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제3세계 운동과 연대하는 운동단체들의 사무실을 둘러 볼 기회를 가졌다. 그때 내가 발견한 것은 다른 연대단체들 사무실에는 당사국 출신 운동가들이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데 비해 북미한국인권위원회 사무실에는 우리 동포 운동가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미주 운동권 실상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런 만큼 하비 목사님이 더 없이 고마웠고 대단해 보였다. L.A의 김상원 11월 말에 나는 LA에 도착했다. 김상돈 장로님은 부인 김나열 여사와 막내아들 김준형씨와 함께 살고 계셨다. 김 장로님은 4.19 이후 민선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직 중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일당에 의해 투옥되는 등 갖은 박해를 받았다. 그러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시고 이민 또는 유학 나와 있는 자녀들을 찾아 미국으로 나와 사시던 중,72년에 조국에서 유신쿠데타 가 일어나자 팔순 노구를 이끌고 조국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계셨다. 김 장로님과 김나열 여사는 인품이 고결하고 생활이 근면 검소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넓고 진실한 신앙인이었다. 나는 유학을 왔다가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 쉬고 있는 김 장로님의 친척 ‘김상원’ (5.18 때 돌아가신 윤상원 열사를 가슴에 안고 살자는 뜻에서 지은 가명)으로 행세하며 약 1년 동안 그분들 집에서 살았다. 두 분은 나를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셨고 정치나 운동에 관한 토론을 할 때마다 내가 버릇없이 대들어도 항상 너그럽게 받아 주시곤 했다. 나는 그 지역사회에 대한 기초지식과 정보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효과적인 운동을 할 수 있다는 평소의 지론을 갖고 있었다. 김 장로님 댁에 기거하면서 집안일을 거들거나 장로님의 회고록 집필을 돕는 틈틈이,김 장로님이 모아놓은 각종 신문과 잡지,자료들을 뒤져서 해외운동과 동포사회에 대한 학습을 계속했다. 김 장로님의 자료들은 시애틀의 김동건 선생님이 모아놓은 자료보다 몇 배나 많았다.
운 좋게도 나는,미주운동권의 원로이신 김 장로님 댁을 인사차 방문하는 다양한 해외운동가들을 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장로님이 LA지역의 각종 운동권 행사나 회의에 나가실 때마다 장로님을 모시고 다니며 곁에서 보고 듣는 기회도 많이 가졌다. 그 때문에 나는 짧은 기간에 해외운동에 관한 기초 지식과 정보를 많이 얻었다. 또 나는 동포사회를 배우기 위해서 결혼식장,장례식장, 교회,코리아타운 등지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동시에 앞으로 운동을 함께할 만한 사람들을 찾기 위해 5개월 동안이나 퀘이커교의 미국 친우봉사회에 나가는 노력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같은 나이의 홍기완을 만났다. 기완이는 70년 초에 어머님을 따라 이민 와서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살고 있었다. 부인과 아들 둘을 두었는데 성격이 괄괄하고 진솔한 의리의 청년이었다. 나는 기완이를 의식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기완이 또한 민주화운동을 하고 계시던 어머니가 당혹할 정도로 급속히 변화되어 82년 후반기부터는 해외 최초의 내 동지가 되었다. 그 외에도 훌륭한 분들을 여럿 만났다. 맑은 인품의 치과 의사이신 최진환 박사, 평생을 민족교육의 밑거름으로 살아오신 정만수 할아버지와 이주영 할머니,암울한 민족 현실을 안고 몸부림치는 작가 전진호 형,맑고 밝은 성악가 이길주 씨,합리적이고 원칙적인 김동근 선생, 항시 성실하고 차분한 이인수 씨,장기려 박사님을 존경하는 조광제 선생… ‘광주 수난자 돕기회’를 만들다 82년 6월에 그러니까 미국에 도착한 지 1년이 되었을 때였다. 나는 그 동안 사귄 분들에게 제안해서 ‘광주수난자돕기회’라는 작은 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그 모임을 통해 모금해서 광주의 유가족과 부상자들에게 생활비와 치료비로 보냈다 5.18 진상을 미주동포사회에 널리 알리는 활동을 하기 위한 소박한 단체였다. 광주수난자돕기회는 모금활동 뿐만 아니라 자료집 발간,5. 18 기념행사 후원 등도 꾸준히 했다. (이 모임은 88년 6월 해체 될 때까지 3만불 이상을 광주로 송금했다.) 박관현의 옥사와 10일 간의 항의 단식 광주수난자돕기회 활동을 하면서 나도 장기적인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최저 임금 이상의 급료를 받는 것과 동포들의 업소에 취직하는 것은 아예 포기했다. 대신 타민족 형제들의 업소에 취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결정한 후 이리저리 알아보았으나 일자리 얻기가 쉽지가 않았다. 한번은 김 장로님의 아들 준형씨의 도움을 받아 노동자의 90퍼센트가 필리핀계 여자들인 장애인용 전화기 조립회사에 가서 인터뷰까지 했으나 실패했다. 내가 한참 취직문제, 생활대책 등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던 10월 어느 날,조국에서 비통한 소식이 날아왔다. 박관현이 옥사했다는 것이었다. 80년 5월 15일경 광주에서 잠깐 만나 각오를 단단히 하자고 격려하며 헤어진 것이 관현이와 나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 관현이는 내가 큰 기대를 걸었던,그래서 유달리 아끼는 후배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관현이의 죽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완이와 둘이서 미국 친우봉사회 사무실을 빌려 10일간의 항의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단 하루도 굶어본 적이 없는 기완이도 의연하게 잘해 주었다. 지역 운동가들도 조금씩 협조를 해주었고 동포언론인들도 조금씩 기사로 다뤄줬다. 그렇게 한참 단식농성을 하고 있을 때 나를 밀항시켜 준 동생 동현이가 L.A 인근 롱비치 항구에 잠시 와 있다고 연락해 왔다. 나는 허기진 몸으로 달려가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돌아왔다. 동현이는 일본을 거쳐 조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며 떠나갔다. 나는 그때 단식을 하며 굳게 다짐했다. 관현이 몫까지 내가 맡아 싸우자고… 미주운동의 역사와 현황 한청련(1984년 1월에 결성한 재미한국청년연합)에서는 일제하의 미주 이민을 1기 이민으로,68년 이후의 이민을 2기 이민으로 구분해서 부른다. 미주운동의 역사를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눈물겨운 1기 이민사회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민족 운동가들은 8.15이후 잠깐 환호했다. 그러나 미군정,분단,전쟁 등으로 이어진 조국정세의 변화에 절망한데다 권력을 장악한 이승만이 미국에 있을 때 자신을 비판했었다는 이유로 입국금지 등의 보복성 탄압까지 자행하자 민족운동가들은 민족 허무주의에 빠져 운동에서 손을 뗐고 자녀들에 대한 민족교육도 중단해 버렸다. 그래도 일부 운동가들에 의해 가늘게나마 명맥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메카시 선풍으로 인해 그것도 완전히 끊겨버렸다. 맥이 끊겨 버린 1기 이민사회의 운동은 2기 이민사회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 계기는 7.4 남북공동성명의 발표와 1972년 10월의 박정희의 유신쿠데타였다. 유신쿠데타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DJ는 73년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아서 ‘한국민주 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 미주본부’ (한민통 미주본부)를 결성했다. 한민통 미주본부는 그후 DJ가 일본으로 가서 일본의 한민통 결성 작업을 하다 박정희에 의해 납치되자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 후 미주운동권은 진보적이고 민족적인 세력과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세력으로 분열되어 다투다가,진보적이고 민족적인 세력은 77년에 ‘미주 민주국민연합’(미주민련)을 결성하고,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세력은 78년에 ‘민주주의 국민 연합 북미본부’(국민연합)를 결성함에 따라 조직적으로 완전히 양분되고 말았다. 미주민련 계열은 진보적이고 민족적인 성향 때문에 민주,자주,통일을 동시에 추구했고,국민연합 계열은 친미,반공성향 때문에 민주에 초점을 맞추었다. 내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국민연합 계열은 미주민련을 ‘선통일 후민주’ 세력으로,자신들을 ‘선민주 후통일’ 세력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80년 5.18 민중항쟁의 충격은 미주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5.18로 인해 심하게 좌절했던 미주민련과 국민연합 계열의 일부 인사들이 통일을 전면에 내세우고 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미주민련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인사들만 남아 침체에 빠졌고 국민연합은 반공 친미 성향이 강한 인사들만 남아 위축되었다. 5.18 이후 침체, 위축되어 있던 미주운동권은 조국의 운동이 서서히 활기를 되찾아가기 시작하자 그에 자극을 받아 효과적인 운동 강화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역량의 한계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보수적인 국민연합과 한민통 미주본부는 문동환 목사님의 노력 덕분에 82년 8월에 ‘한국 민주회복·통일촉진 국민연합(민통연합)으로 통합하여 조직을 정비했다. 대부분이 지식인인 통일운동가들은 유럽,일본지역 통일운동가들과 함께 통일 심포지엄 개최,북과의 대화 등의 학술토론식 통일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나 미주민련은 조직정비도 못한 채 거의 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다. 10년밖에 안된 미주운동이었기에 문제 또한 많았다. 82년 당시 재미동포인구가 60만 명밖에 안되었다는 점과 재미동포들은 광대한 미국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는 점,그리고 당시 조국의 운동 현황과 수준을 염두에 두고 살펴볼 때 미주운동의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았다. 조국운동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었다. 조국운동을 거의 서울 중심,기독교계 중심의 운동으로 알고 있었고 지역운동이나 노동,농민,문화운동 등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국운동을 아직도 친미반공에서 못 벗어난 민주화운동 수준,심지어 일부에서는 인권운동 수준으로 알고 있었다. 조국운동과 거의 연관이 없었다. 조국운동과 해외운동의 관계에 대한 이론도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고 어떠한 조직적 연대도 없었다. 가끔 조국에서 성명서를 발표할 때 해외운동권 대표 자격으로 일부 원로들이 이름을 올리는 정도의 관계만 유지하고 있었다. 명망가 중심의 운동이었고 운동의 고령화가 심각한 지경에 와 있었다. 미주에서 가장 운동이 활발한 지역이라는 LA에서도 40대는 잔심부름을 하고 있었고 70대 고령의 할아버지들이 직접 행사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거나 모금을 하러 다니셨다. 조직적이지 못했다. 통일성과 규율을 가진 단체도 없었고 독립된 자체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단체도 없었다. 상근 활동가가 한 명이라도 있는 단체도 없었고 지역 조직들에 토대한 통일성 있는 전국조직도 없었다. 대중성이 없었다. 대중과 접촉할 창구나 공간도 없었고 대중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사업 활동도 없었으며 동포 대중들의 권익을 옹호 신장하는 사업 활동도 없었다. 국제연대운동이 없었다. 가끔 행사에 국제적으로 유명한 타민족 형제나 조국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타민족 형제를 초청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밖에도 고유성, 독자성,특수성은 거론도 되지 않고 있었다. 문화운동 등의 부문운동도 없었음은 물론, 학습도 거의 없었으며 청년들과 2세들의 참여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만성 적재정난과 단체들의 중복난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허장성세는 심했다. 나는 직접적 탄압은 받고 있지 않았지만 대사관,영사관의 온갖 중상모략과 분열공작 속에서,인종차별이 심한 낯선 이역 땅에서,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에서,대다수 동포들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해온 미주동포들의 운동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도 많은 문제점들 때문에 분노도 했고 개탄도 했다. 망명 사실이 탄로나다 10일간의 단식농성을 마치고 체력을 회복한 후 나는 장기적인 해외운동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본격적인 궁리를 시작했다. 그러던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동현이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일본 부근을 항해중입니다. 국내에서 사건이 터졌으니 밖에 나다니지 말고 신변안전에 신경 쓰십시오. 자세한 것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뭐라고?” 나는 깜짝 놀랐다. 무슨 사건이 터졌기에 이곳에 있는 나까지 신변안전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궁금증 때문에 속을 태우며 다음 소식을 기다렸다. I2월 초에 마침내 광주에서 소식이 왔다. 소식을 정리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82년 10월에 전북 군산에서 이광웅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명의 교사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전두환 정권을 비난하고 북을 찬양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고문 수사를 하던 경찰은 이광웅 선생이 도피 중이던 나를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흥분했다. 수사는 갑자기 나를 체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의 도피처 한 곳이 드러나자 연이어 매듭이 풀리며 나에게 도피처를 주선했거나 제공해주신 분들,그리고 도와주셨던 분들 중 20여 명이줄줄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나를 잡기 위해 경찰은 정용화,최권행,김은경, 홍희윤씨 (소설가)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젖먹이 외조카 지웅이를 업은 여동생 경자와 남동생 영배까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가 두들겨 팼다. 동생 경자와 최권행은 전두환 일당이 악랄한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감지하고 전율했다. 전두환 일당이 ‘윤한봉은 5.18 이후 월북해서 밀봉교육을 받고 내려와 지하에서 암약중 체포되었다는 각본을 만들어놓고 그 각본에 따라 국내 운동권,그중에서도 광주 전남지역 운동권을 나와 연결시켜 때려잡을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나를 체포하기 위해 발악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안되겠다 싶은 동생 경자는 이렇게 말해 버렸다. “우리 오빠는 미국에 망명했어요.” 그러자 경찰들은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라. 우릴 뭘로 보는 거야?” 대한민국 경찰을 우습게 본다며 호통까지 쳤다. 그래서 경자가 다시 말했다. “조아라 장로님이 미국 가셨을 때 오빠를 만나고 왔어요.” 그 말을 듣고서야 그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얼굴색이 달라지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82년 4월경에 미국을 방문하신 조 장로님을 LA에서 잠깐 뵌 적이 있었다. 반신반의한 그들은 허겁지겁 조아라 장로님,강신석 목사님,정찬대,최동현 등을 차례로 연행하여 닦달하기 시작했다. 강신석 목사님이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보좌관이 와서 나의 신분을 확인해 갔다는 사실까지 밝히자 그들은 망연자실했다. 아연실색한 내무장관 노태우가 전두환을 찾아 청와대로 뛰어가는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결국 전두환 일당은 연행되었던 모든 분들에게 “윤한봉이가 밀항 탈출하여 미국에 정치 망명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절대 비밀로 한다.”는 각서를 받아내고 일제히 석방시키고 말았다. 동현이와 찬대는 그때 선원수첩을 빼앗겨 더 이상 배를 탈 수 없게 되었다. 적들은 내 문제가 미국과의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피해야 했고 또 자신들의 낭패를 숨겨야 했기 때문에 사건을 백지화시켰던 것이다. 당시 적들의 낭패감이 얼마나 컸던지 경찰 고위 책임자 한 사람이 나의 밀항 탈출 사실이 최종 확인되자 “대한민국 경찰 최초, 최대의 실수!”라고 책상을 치며 소리쳤다고 하니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엉뚱하게 사건이 풀린 바람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도피와 밀항을 도와주신 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그동안 계속 신분을 숨기고 가명을 쓰는 생활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머리와 발목을 잡고 있던 큰 걱정거리 하나가 해결이 되었다. 나도 이제 내 신분,내 이름을 당당하게 밝히고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적들은 나를 못 잡게 되자 분풀이라도 하듯 이광웅 선생님을 비롯한 연행자들에게 엄청난 고문을 가해 사건을 조작한 후 I2월 초순에 이렇게 수사를 발표했다. “이광웅 등 9명이 윤한봉으로부터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교사 받아 이적단체인 ‘오송회’를 결성,암약 중에 일망타진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분노로 치를 떨었다. 80년 겨울이었다. 나는 이광웅 선생님의 매제인 서울의 신옥재 씨 집에서 약 3개월간 숨어 지냈다. 군산 제일고의 국어교사이며 시인인 이광웅 선생님을 나는 그 집에서 처음 만났다. 방학을 이용해서 누이동생 부부를 찾아오셨던 것이다. 이광웅 선생님은 꽃잎 위의 이슬 같은 맑은 영혼을 지닌 분이셨다. 대화를 하면서 선생님은 광주학살의 충격으로 전두환 일당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선생님께 몇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분노만 하고 계실 것이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본격적인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들과 학생들의 의식화,조직화가 필요합니다. 효과적인 운동을 위해서는 군산에서의 고립된 운동보다는 전주지역 운동권과 연결해서 해야 합니다. 전주의 문정현 신부님을 소개할 테니 꼭 한번 찾아가 보시죠.” 그 얼마 후 몇 분의 교사,친지들과 함께 이 선생님이 다시 찾아오셨기에 나는 처음 보는 분들 앞에서 함부로 이야기 할 수가 없어서 조심스럽게 민주화운동 일반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어떻고 폭력 혁명이 어떻고 이적단체가 어떻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후에 이광웅 선생님은 옥고를 치르고 나오신 후 전교조 활동을 하시다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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