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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회상2019-01-0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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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회상


부마항쟁의 충격


1979년 10월 중순이었다. 나는 후배를 만나기 위해 여수에 내려가 있었고 그때 부마항쟁이 터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항쟁 발발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정세 인식에 큰 문제가 있다는 걸 충격 속에서 깨달은 나는 부산과 마산의 현장에 꼭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이곳저곳을 돌며 일을 본 후 23일 경 광주로 올라왔다. 그 사이에 광주에서는 사건이 하나 발생 했다. 전남대 여학생 고희숙씨 등이 학원사찰정보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던 본관 건물의 학생 지도 상담실에 방화를 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악랄하게도 이 사건의 확대 조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박정권은 부마항쟁이 타 지역으로 확산될까 봐,특히 광주 지역에 항쟁이 번질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던 터 였다. 즉각 예방조치 차원에서 방화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박병기 등 일부 나이 어린 제적생들과 전남대 운동권 학생 30여 명 을 한꺼번에 연행해 고문을 하며 사건의 확대 조작을 한참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방화 사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또 사건이 그렇게 크게 확대 조작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태평스럽게 내 사무실인 현대문화연구소로 가 부산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형사들이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서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내가 끌려간 곳 은 은밀한 곳도 아닌 유치장 바로 옆 숙직실이었다. 숙직실에 들어서자마자 이미 그곳에서 여러 사람이 물고문을 당했다는 걸 눈치챘다. 놈들은 상부의 특명을 받아 노골적으로 고문을 자행하고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는 1.5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두 개와 높고 튼튼한 의자가 있었다. 두 의자의 등받이 사이에는 팔목만 큼 굵은 몽둥이 하나가 가로 걸쳐져 있었고 그 몽둥이 위에는 지저분하게 젖은 수건 하나가 널어져 있었다. 의자들 옆 바닥 에는 희뿌연 색깔의 물이 반쯤 담긴 플라스틱 물통 하나와 찌그러진 양철 주전자 하나 그리고 물먹은 걸레 두 개가 음산한 기운을 내뿜으며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인상이 험악한 건장 한 체구의 두 놈이 몽둥이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물었다.


“네가 악질 윤한봉이냐? 팬티만 빼고 다 벗어!”


내가 옷 벗는 걸 거부하자 두 놈은 다짜고짜 몽둥이찜질을 하기 시작했다. 한잠을 즐기듯 패던 놈들은 내 옷을 강제로 벗기고 두 다리를 뻗고 앉게 했다. 그리고 내 두 손목을 신문지로 겹겹이 싼 다음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내 상체를 최대한 앞으로 굽히게 하여 수갑 찬 두 팔 사이로 무릎을 세워 넣은 다음,두 오금과 팔오금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 넣었다. 사지가 접혀 져 옴짝달싹 못하는 나를 놈들은 발길질로 밀어 버렸다. 몽둥이의 한쪽 끝이 방바닥을 받치고 있어서 나는 옆으로 완전히 넘어지지도 못하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팔에 번지는 통증을 참느라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놈들은 비스듬히 위를 향하고 있던 몽둥이의 다른 한 끝을 잡고 사정없이 힘을 가해 나를 압박했다.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진땀을 흘렸다. 그런 짓을 몇 번 즐기고 나더니 놈들은 몽둥이를 들어 올려서 나를 두 의자 사이에 매달았다. 대롱대롱 매달린 채 아래로 처져있는 상태에서 그들은 물에 젖은 지저분한 수건으로 내 얼굴을 덮었다. 한 놈이 나에게 말했다.


“이 물에는 특수한 약을 타 놓았다. 마시면 너는 영원히 남자 구실을 못하게 된다. 위장도 엉망이 된다. 마실 테면 실컷 마셔라. 그리고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할 준비가 되면 둘째손가락을 까딱까딱 해라.”


그러고는 주전자 속의 물을 수건 위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나는 숨이 막혀 몸부림을 쳤고 견디다 못해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정신이 점차 몽롱해져 갔다. 나는 그만 고함을 지르며 둘째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놈들은 기다렸단 듯이 그때서야 물 붓기를 멈췄다. 놈들은 수건을 걷어낸 후 나에게 물었다.


“운동권 학생들을 어떻게 배후 조종했냐? 너의 배후는 누구냐? 자금지원을 어떻게 했냐? 너에게 자금지원을 해준 자는 누구누구냐? 징집을 거부하고 도피중인 네 후배 김영종(출판인) 의 피신처가 어디냐?”


나는 배후 조종한 적도 없고 자금지원 한 적도 없다. 배후도 없다. 자금지원 역시 받은 적 없고 영종이의 피신처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시 물고문이 시작됐다. 3일 동안 다섯 차례나 그런 물고문을 당했다. 고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세 놈이 달려들었다. 내 눈을 가린 후 바닥에 오징어처럼 납작하게 눕혀놓고 한 놈은 머리와 양팔을 눌러 못 움직이게 하고 다른 한 놈은 양다리를 붙잡아 못 움직이게 했다. 그리 고 또 다른 한 놈은 내 허벅다리 위에 걸터앉아 볼펜 끝으로 나 의 가슴과 배와 옆구리 곳곳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그런가 하면 벽에 기대 세워놓고 명치 부위를 발로 차고 주먹으로 쳤다.

그리고 각종 군대식 기합을 되풀이해가며 즐겼다. 놈들은 새벽이 되면 10월 하순의 차가운 방바닥에 팬티 바람으로 나를 눕혀놓고 자신들은 요를 깔고 양쪽에 누웠다. 나의 양 발목과 양 손목에 각각 수갑의 한쪽을 채우고 나머지 한 쪽씩을 자신들의 발목과 팔목 하나씩에 연결해 채운 다음 이렇게 공갈을 쳤다.


“만일 꼼지락거려 안 그래도 피곤해죽겠는데 우리 단잠을 깨게 만들면 죽여 버릴 테니 그렇게 알아!”


그러고는 놈들은 코를 골며 잠을 잤다. 나는 두 놈 사이에서 사지가 묶인 채 맨바닥에 누워 바닥의 냉기와 온몸의 통증,그리고 그 저주스러운 얼굴의 가려움을 참느라 이를 악문 채 몇 시간씩 얼굴만 씰룩거려야 했다. 버티다 못해 몇 번 몸을 뒤척이면 사정없이 얻어맞았다. 그렇게 고문을 당한 후 나는 왼쪽 팔 전체가 마비되고 온몸이 붓고 등허리까지 이상이 생겼다.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벽에 기대지 않고는 앉아 있지도 못할 정도로 몸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이 고통스러운 고문이 며칠 내로 끝날 것이라 자위하며 나는 적당한 선에서 대답을 하고 버텨나갔다. 밖에서는 나에 대한 연행과 고문에 분노한 동지들이 ‘우리들도 차례차례 당할 것이다. 어차피 당할 것 싸우고나 당하자고 의견을 모아 한판 크게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행 4일째가 되는 10월 27일 아침이었다. 나는 밤새 시달려 녹초가 된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잠깐 밖에 나갔다 돌아 온 놈들이 나에게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수갑도 풀어주고 담배도 권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의 건강을 염려했다.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이러는지 놈들의 이상한 짓거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놈들의 표정을 살폈다. 처음 보는 놈이 들어와 벽에 기대고 앉더니 느닷없이 푸념조로 한마디 했다.


“나라 장래가 걱정된다. 나라 장래가..”


그러면서 놈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밖에서 희미하게 실내 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웅얼거리는 소리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런 속에서도 내가 알아들은 유일한 말은 ‘유고’와 ‘계엄령 선포’ 두 마디였다. 그 순간 나는 생전 처음 발가락 끝에서부터 온몸으로 번져오는 짜릿한 희열 을 느꼈다. 박정희가 죽었구나. 그래서 이 새끼들이 이상한 짓과 이상한 말들을 했구나. 이제 살았다. 고문은 끝났다. 나는 눈을 감고 놈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시치미를 떼고 혼자서 마음껏 희열을 즐겼다.

같은 시간에 이 못난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광주로 올라와 둘째 형님 집에 머무르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박 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에 큰소리를 치시며 마당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계셨다.


“내 자식 살았다,한봉이가 살았다!”


그 후 나는 예상대로 더 이상 고문을 당하지 않고 광주 교도소로 넘어가 있다가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됨에 따라 12월 9일 석방되어 나왔다. 나는 고향집에 내려가 몸을 추스르며 쉬고 있었다. 그 사이 저주스런 12.12쿠데타가 일어났다. 나는 우려했던 방향으로 정세가 변화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박정희 하나 죽었다고 무너질 세력이 아니다. 그 세력은 너무도 강고하다. 일체의 환상을 버리고 의연히 싸워 나가자’고 마음을 다잡고 며칠 후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줄곧 생각했던 의문들,어떻게 부마항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나의 정세인 식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나는 부슬비를 맞으며 시청 주변과 시장,역전 등지를 헤매고 다녔다. 부산 지역 운동가들도 만나보고 일반 시민들과 이야기도 나눠 보았다. 70년대 내내 이 주둥이로 ‘민중’을 이야기하고 다녔고 가끔 답답할 때는 민중이 각성하지 않는다고,주체적으로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고,심지어는 안 따라 온다고 민중을 원망했다.

하지만 나는 깨달았다. 어리석게도 우금치 마루에서 죽창을 들고 뛰어다녔던 영웅적인 민중,노동자,농민과 같은 과거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민중만을 생각했지,압제와 수탈 속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면서 조용히 그리고 남모르게 현실에 대한 분노와 변화에 대한 갈망을 키워갔던 평범한 생활 속에서 민중,생활 현장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오늘의 다양한 대중은 구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민중들보다 앞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 서 있었다는 것,지도부 없는 자연발생적인 항쟁은 적들의 강력한 물리력 앞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항쟁을 예감하다


마산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광주로 돌아 왔다. 부산에서의 깨달음을 토대로 지역사회 대중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기 위해 전남과 광주 곳곳을 헤매고 다니며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가면서 나는 예전과 다른 대중들의 눈빛과 가슴을 느끼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금방 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은 변화에 대한 강렬한 갈망,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부마항쟁의 충격을 받은 전남과 광주의 대중들은 부산,마산 지역 대중들에게 마치 선수를 뺏기기나 한 것처럼 때를 기다리며 열망과 분노를 키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느낌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생각하여 또 돌아다녀 보고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서 점차 나의 예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12. 12 쿠데타를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은,일부 대권욕에 눈이 먼 정치인들의 환상이나 희망과는 정반대로 확고한 군사정권 수립을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들이 민주화의 열망과 전두환 일당에 대한 분노를 키워가고 있으니 충돌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운동권은 역량이 취약하고 조직도 허술하여 대중을 지도할 수가 없다. 조직되지 않은 대중,지도되지 않은 대중과 엄청난 정보력과 물리력을 장악한 조직된 군부가 충돌할 경우 대중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하다… 현재의 상태대로라면 광주 전남지역 운동권도 부마항쟁처럼 아무런 역할도 못해내고 지리멸렬하게 될 것이다. 부마항쟁의 확대판이 될 것이다. 광주에 피가 흐르게 된다. 큰일 났다. 대책을 세우자’


최선을 다해 대비하자


항쟁을 예감한 나는 대책을 세우기 위해 많은 궁리를 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를 해도 별다른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찾은 대책이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다. 운동역량 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것뿐이었다. 틈만 나면 주위 사람들에게 정세를 낙관하지 말라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두환 일당은 I2.12쿠데타로 이미 권력을 장악했다. 다만 확고하게 장악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들의 운동조건은 전보다 좋아졌다. 그렇다고 ‘서울의 봄’ 운운하며 낙관해서는 안 된다. 봄은 어떤 입장에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상춘객의 입장에서 보면 봄도 즐거운 계절이다. 그러나 농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봄은 갈고 씨 뿌리는 노동의 계절이다. 우리들은 농민의 입장에서 ‘서울의 봄’을 봐야한다. 낙관하지 말고 열심히 갈고 씨를 뿌리자.”


당국이 해직 교수들과 제적 학생들에게 복직, 복적을 허용했을 때 제적생들에게 이야기했다.


“해고된 노동자 언론인에게 복직 허용이 안 되었는데 교수,학생들만 학교로 돌아가 버리면 그동안 어렵게 쌓아 온 그들과의 신뢰가 무너지고 그동안 어렵게 기초를 닦아 놓은 사회운동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게 된다. 또 우리들이 복적을 받아들이면 포기했던 체제 내 기득권을 되찾아 안주할 가능성이 있다. 역할 분담 차원에서 일부는 학원으로 돌아가 학생운동을 강화하고 일부는 밖에 남아 사회운동을 계속해 나가야한다. 깊이 생각해서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그때 광주에서는 의논을 거쳐 대부분 학교로 돌아가고 나를 포함한 5명은 밖에 남았다.)

그러는 한편 나는 몇몇 동지들과 힘을 모아 79년 초에 설립한 현대문화연구소를 거점 삼아 타 지역 운동권과의 정보 교환,광주 전남지역 부문 운동간의 협조 강화,학생 운동 지원,극회 광대의 문화운동 지원, 내가 회장을 맡은 전남민주청년협의회 (이하 전남민청협)의 강화,전남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하 전남국민연합)의 결성 작업 등 부지런히 일을 해나갔다. 만약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도부의 기능을 할 조직으로는 전남국민연합을,주도적 역할을 할 조직으로는 전남 민청협을,주동적 역할을 할 세력으로는 학생들을 상정하고 일을 추진해 나갔다.

이미 서울에서 결성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의장: 윤보선, 김대중,함석헌)의 지부 조직인 전남국민연합의 결성작업은 전남민청협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면서 사무국장으로 내정된 고 윤상원 열사와 함께 했다. 하지만 운동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반발해 신민당 당원들은 배제하고 광주 전남지역 각계 원로들과 각 부문,각 단체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청장년들을 중심으로 추진해 나갔다. 전남 민청협은 정상용,이양현,박효선 등 투옥 경력이 없는 청년들을 영입하여 조직을 확대 강화해 나갔다. 학생운동은 전남대와 조선대로 들어간 김상윤,김운기 등의 복적생들과 재학생 대표들이 힘을 합해 학생들의 의식화, 조직화 사업을 정력적으로 추진하여 그 역량이 나날이 성장 발전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직접 간여하지 않고 뒤에서 간접 지원만 했다.

그와 같은 활동을 해 나가면서도 나는 예견되는 항쟁을 지도해 낼 역량이 절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하고 초조했다. 더구나 서울을 포함한 모든 지역이 광주 전남지역과는 판이한 분위기와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나의 불안과 초조는 더욱 컸다.


모두 내 말을 웃어 넘기다


4월 10일경이었다. 인천의 박귀현씨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전북의 최인규, 대구의 백현국,서울의 문국주,조성우,이석표, 이명준씨 등과 함께 각 지역 동향파악과 정세분석 그리고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4.19 혁명 20주년을 앞두고 계엄해제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고 싸우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너무도 안이한 정세판단을 하고 있는 것에 속이 터진 나는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먼저 광주전남지역의 분위기를 전하고 나서 말했다.


“군부는 절대로 안 물러선다. 또 한 번 쿠데타를 일으킨다. 광주가 터진다. 전두환 일당은 유혈 진압을 할 것이다. 광주가 피바다가 된다. 대책을 논의해 보자.”


그러자 모두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딴 나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엉뚱한 소리하지 마라.”

“쓸데없는 소리해서 분위기 깬다.”


다급해진 나는 하소연을 했다. “조언을 주라. 어떻게 하면 좋으냐,막을 수도 없고 끌어갈 수도 없다. 역량이 너무 약하다.” 대구의 백현국 씨에게도 호소를 했다.


“광주 전남에서만 터지면 대구에서라도 호응을 달라.”


그러나 다들 감이 안 잡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자나 깨나 내 머리 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광주에서도 개인적으로 몇 사람에게 이야기했으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월 5일이 되어 그동안 매년 가져왔던 민주가족야유회를 광주호 부근 식영정에서 가졌다. 전남민청협과 송백회 (정치범 후원을 목적으로 한 여성단체)의 회원 및 가족들 30여 명이 모인 그 자리에서 나는 또 호소했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세운다. 그러면 광주가 폭발한다. 광주가 피바다가 된다. 약 2천 명 정도가 학살당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대책을 논의해 보자.”


그러나 또 핀잔과 원망만 듣고 말았다.


“쓸데없는 소리한다.”

“야유회 나와서까지 피바다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 망친다.”

내 말은 봄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고독했다. 그리고 슬펐다. 그날 나는 못 먹는 술을 꽤 많이 마셨다.


혼자서 준비해 나가다


아무도 나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결국 나는 혼자서 궁리하고 준비해 나갔다. 나는 다시 한 번 면밀하게 정세분석을 했다. 그리고 몇 차례 검토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5월 25일을 전후해서 전두환 일당은 권력의 완전한 장악을 위해 12·12보다 더 강력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로 광주전남지역에서 자연발생적인 대규모 항쟁이 발발할 것이다. 그 항쟁은 엄청난 피를 흘리고 실패로 끝날 것이다.”


나는 항쟁을 막을 방도도 연구해 보았다. 그러나 결론은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실패할 항쟁인 만큼 피해는 최소화하되 정치적 성과는 극대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약한 지도역량이라도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고 결론짓고,주위와 상의해 전남국민연합의 결성 날짜를 5월 22일로 잡고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는 한편 박화강 기자님을 통해 당시로서는 굉장히 상세한 1만 5천분의 1의 광주시가지 축척지도를 구해 항쟁발발 시에 대비한 작전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때 발표할 대(對) 국제사회,대 국민 성명서 등의 골격을 구상해 나갔다.

지속적인 학내투쟁을 통해 역량을 축적해 온 학생들이 마침내 계엄해제 등의 정치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계속된 가두시위와 도청 앞 집회 때 보여준 학생들의 열기,그리고 시민들의 호응은 정세 전망에 대한 나의 확신을 한층 강화시켜 주었다. 나는 신변정리를 시작했다. 현대문화연구소와 전남 민청협 관련 서류들을 안전하게 처리하고 내 사진과 편지들도 모조리 없애 버렸다. 목욕을 하고 속옷도 새 것으로 갈아입은 나는 잠을 매일 옮겨 다니며 잤다.


호소에 반응이 나타나다


15일 저녁에 선배 한 분이 아기 첫돌이라며 집으로 초대해서 8명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다시 한 번 호소했다.


“터진다. 대책을 세우자!”


놀랍게도 진지한 반응을 보였다. 4월부터 수차례 되풀이해서 호소했건만 처음으로 진지한 반응이 나타나자 나는 흥분했다. 나는 애써 흥분을 감추고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임시국회에서 계엄해제 결의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아주 높다. 전두환 일당은 결의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통과가 돼버리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해 버릴 것이다. 나는 그 시기를 21일에서 25일 사이로 본다. 항쟁은 막을 수 없다. 그리고 항쟁은 실패한다. 피해는 줄이되 최대한의 정치적 성과를 남겨야한다. 부마항쟁처럼 흐지부지 끝나서는 안 된다. 상징적으로 도청을 점거해야한다. 강고한 지도,주도 역량을 갖추기에는 우리가 너무 약하고 또 시간이 없다. 각자가 최선을 다해서 자기 몫을 하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신변을 정리해야한다. 비장한 각오가 필요하다. 다시 만나자.”


내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동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그 자리에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윤상원(도청항쟁 지도부 대변인.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사망)

박용준(시민군.5월27일 새벽 YMCA에서 사망)

김영철(도청항쟁 지도부 기획실장.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체포됨.고문 후 유증으로 지금까지 정신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음),

정상용(도청 항쟁지도부 외무위원장,현재 정치인),

윤강옥(도청 항쟁지도부 기획위원,현재 정치인),

이양현(도청 항쟁지도부 기획위원,현재사업가),

정용화(현대문화연구소 총무,현재 언론인).


기습을 당하다


5월 17일 밤 전두환 일당은 기습적인 일제 검거를 벌였다. 그들은 광주에서 검거 대상을 투옥 경력이 있는 청년들과 학생운동 지도부로 한정했다. 투옥 경력이 없던 윤상원,박용준, 김영철,정상용, 이양현은 검거를 면했고 투옥 경력이 있던 윤강옥은 그날 밤에 집에서 자지 않았기 때문에 검거를 면했다. 나와 정용화는 카톨릭 농민회 간부 최성호씨와 함께 문병란 선생님 댁으로 잠자러 갔었다. 최성호씨는 모레 19일 날 광주에서 계획된 대규모 농민시위 준비 차 광주에 올라왔었다. 밤 11시가 지나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는 TV 자막 뉴스를 보고 깜짝 놀라 당황하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왔다.


“김상윤이가 잡혀갔다.”

“박형선이가 잡혀갔다.”

“혈안이 되어 찾고 있으니 조심하라…”


그들은 나의 예상을 비웃으며 임시국회 개회 전에 쿠데타를 일으켜 버린 것이었다. 경악과 함께 절망감이 엄습했다. 그들의 기습이 이렇게 빨리 올 줄 예견 못한 내가 한없이 밉고 또 부끄러웠다. 비상대책은커녕 비상연락망도 갖추지 못했는데 이 일을 어찌할까. 운동에서 거의 손을 떼고 사업에 전념하고 있는 형선이마저 잡혀갔다면 전남 민청협 회원 모두 잡혀갔다고 봐야 한다. 학생회 간부들도 모조리 당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검거선풍이 불어 전국의 모든 운동조직이 와해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 긴급사태에 누구와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가….


비겁하게 피신하다


무력감,절망감 속에서 무리 대책을 궁리해 봐도 막막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용화와 나는 새벽에 용화 친구 집으로 옮겨 가 이곳저곳 연락을 해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나는 예상했던 대로 예비검속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방송을 통해 확인하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나는 훗날을 도모하기로 하고 19일 아침에 용화와 함께 광주를 빠져나왔다. 나주에서 용화와 헤어진 후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서울로 가던 나는 상황을 잘 모르니 대전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고 서울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고 대전에서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철저하게 검문검색을 하고 있었다. 서울은 더 심할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서울행을 포기하고 다시 광주로 되돌아와 그날 밤 농대 후배 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20일 밤부터 21일 새벽까지 나는 무기 삼아 연장 하나 들고 시위대에 합류하여 뛰어다녔다.

운동권 사람 한 명이라도 만나게 되길 간절히 빌며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러나 아무도 만나질 못했다. 무력감 속에서 혹시나 하고 여동생 경자 집을 찾아 갔다. 나를 본 경자가 사색이 되었다.


“오빠,이 난리 속에도 오빠를 잡으려고 보안사 놈들과 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고 있는데 왜 여길 온 거야? 싸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 지금 당장 몸을 피해! 빨리 광주를 떠나라고요!”


경자는 기를 쓰며 나를 들볶았다. 광장이 형님까지 찾아와 강력하게 도피를 권유했다. 나는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21일 아침 다시 광주를 빠져나왔다. 참담한 심경으로 나주 시내를 서성거리며 내 자신을 욕하고 꾸짖었다.


‘그래 네가 예견했던 대로 상황은 전개되고 있다. 항쟁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너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 너는 주위 사람들에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 몫을 다 해야 한다고,부마항쟁 때처럼 방관자,낙오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지리멸렬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강조해 놓고 막상 예견했던 상황이 오니까 허둥대다 도망이나 쳐? 비겁한 놈! 아무리 운동권이 박살나고 동지들이 체포되어 너밖에 안 남았다 하더라도 너 혼자서라도 최선을 다해 네 몫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죽기를 각오하고 목욕까지 하고 속옷도 갈아입은 놈이 도망쳐 나와 어슬렁거려?’

나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래 잘못했다. 다시 광주로 들어가 싸우다 죽자. 마음을 그렇게 정하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나는 광주에서 차량을 타고 내려온 시민들이 나주 경찰서의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아! 드디어 무장 항쟁으로 발전하는구나.’


나는 서둘러 복면을 할 보자기를 산 후 시민군의 차를 타기 위해 걸어가다가 우연히 길에서 전남 민청협 회원 김남표를 만났다. 남표는 몸을 피해 목포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남표와 나는 소식을 나눈 후 자동차로 가면 위험하니 걸어서 광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적들은 남평에서 헬리콥터로 병력을 수송해서 도로 요충지를 장악하고서 광주로 가는 길목에 봉쇄망을 쳐놓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화순과 영암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강진의 김용근 선생님 댁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정용화를 만났다. 용화는 공수부대 출신이었다. 우리는 용화를 믿고 다시 한번 광주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시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나는 3일 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무력감과 절망감 속에서 몸부림쳤다.

27일 도청 함락 소식을 들었다. 용화와 남표랑 헤어진 후 나는 여덟 번의 검문을 피해 순천으로 갔다. 거기서 열차를 타고 은신처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회한의 서울 도피 생활


나는 이철용(작가. 현 정치인) 형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서울에 있던 최권행, 김은경 등의 후배들이 내가 안 죽었으면 서울로 올라오리라 예상하고서 이미 도피처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나는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11개월 동안 주위의 도움으로 화가 홍정경씨의 부모님 댁,소설가 윤정모씨 댁,오송회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고문 투옥되고 출소 후 암으로 돌아가신 시인 이광웅 선생님의 매제 신옥재 씨 댁,성염 교수 댁 등 일곱 군데를 옮겨 다니며 도피생활을 했다.

11개월간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괴로워 몸부림을 쳤다. 5월 영령들과 고문당하고 투옥되신 분들과 중상을 입고 병상에 누워 계시거나 불구가 되신 분들에 대한 죄책감… 제 몫을 다 하자고 한 목숨 바치자고 앞장서 떠들었던 놈이 제 몫도 못하고 죽지도 않은 채 도망 나와 숨어있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정세전망을 잘못해서 제대로 대책을 못 세우고 기습을 당하고 만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그리고 악화일로에 있는 정세에 대한 절망감…

이 모든 것 때문에 나는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처박고 수없이 울었다. 그러면서도 어떠한 경우에도 적들에게 체포당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체포당해 적들의 고문을 받고 조작극의 주인공이 되어 위대한 항쟁의 명예를 더럽히고 5월 영령들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투옥되신 분들과 도피를 도와주신 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그나마 남아있는 운동 역량을 지키기 위해서,그리고 적들을 이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차하면 몇 놈이라도 죽이고 자살해 버릴 결심을 했다.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 면도칼과 날카로운 과도를 구해 항상 몸에 지나고 있었다. 잘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목욕을 할 때도 입에다 물고 목욕을 했다. 누워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서 있을 때나 밥 먹고 있을 때나,변기에 앉아 있거나 목욕을 하고 있을 때나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적들이 들이닥쳤을 경우를 상정해서 날쌔게 칼을 빼들고 휘두른 다음,정확히 나의 경동맥을 자르거나 심장을 찌를 수 있도록 칼을 쓰는 연습을 했다. 왼손도 익숙해질 때까지 수없이 되풀이했다.

내 인생에 처음인 도피생활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생활수칙을 정해 실천해 나갔다. 철저히 조심하고, 숨겨주신 분들에게 불편과 부담을 주지 않고,숨겨주신 분들을 의식화하고,지난 날을 철저히 반성하고,장기적 전망을 갖고 나 자신을 갈고 닦자는 내용이었다. (그 엄혹했던 시절 고통을 각오하고 나를 숨겨주고 보호해 주신 신옥재씨,윤정모씨,성염 교수님,윤한택씨,김학수씨,석달언씨 그리고 도피자금을 지원해 주신 정양모 신부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가증스러운 적들의 조작


5월 27일 이후 나는 즉각 현상수배가 되었다. 수천만 원의 상금과, 1계급 특진이 걸린 수배였다. 광주로부터 전해오는 소식에 의하면 적들은 나를 폭동의 수괴로 만들려고 했으나 나를 못 잡자 대신 전남대 복적생 중 최연장자인 정동년 씨를 수괴로 만들고,5.18 항쟁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DJ를 제거하기 위해 5.18 항쟁을 DJ의 배후조종으로 일어난 폭동으로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분노로 치를 떨고 있을 때 적들의 5‘18 수사 발표가 나왔다. 나와 관계된 부분만 살펴보면 이로부터 500만 원을 받은 정동년 씨에게 내가 200만원을 받아 조선대의 학생운동에 썼다는 것이었고 나에 대한 수배 사유는 내란 주요임무 종사와 계엄포고령 위반이었다.


독일 망명을 시도하다


8월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심신의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나는 중장기 대책을 세우기 위해 궁리를 했으나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던 8월 하순 어느 날이었다. 광주에 있던 성찬성 형(번역가)으로부터 상상도 못할 연락이 왔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주한 독일대사관을 통해 정치망명을 시도하자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뜻있는 몇 분이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독일 대사관의 고위 외교관에게 나의 독일 망명을 위한 협조를 요청해서 응낙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 이야기가 됐으니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 날인 8월 26일 낮 12시 30분에 독일대사관으로 들어가라는 내용이었다. 망명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은 이런 것이었다.


“12시30분. 빨간색 스포츠카를 타고 온 독일인 남녀와 건물입구에서 만나 서로 암호를 교환한다. 그들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탄다. 7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대사관 로비다. 대사관 철창문 안에는 무장한 독일무관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경비경찰이 자리에 없으면 독일인의 안내를 받아 바로 대사관 안으로 들어간다. 만약 경찰이 있으면 적당히 시간을 끌며 검문에 응하는 체하다가 독일무관이 철창문을 열면 후다닥 대사관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대사관에 들어가면 독일전역에 방송할 준비를 마친 채 대기하고 있는 독일 특파원들과 인터뷰를 한다. 망명 신청사실이 독일 전역에 방송되는 순간부터 나의 망명문제는 한독간 외교문제가 되고 관례에 따라 빠르면 3개월 늦으면 1년 정도 정부간 교섭을 거쳐 타결된다. 따라서 나는 교섭이 타결되어 합법적 출국을 할 때까지 독일대사관에서 머물러야 한다. 신변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심사숙고한 후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당시 서울에서 불안정한 도피생활을 하고 있던 박효선(5.18 당시 도청 항쟁지도부 홍보부장,극단 토박이 대표) 에게 급히 연락하여 함께 망명하기로 약속했다.

1980년 8월 26일,우리는 약속 시간에 맞추어 독일 대사관으로 향했다. 그 시간은 전두환의 취임식장에 모든 정보사찰 기관의 신경이 쏠려있는 시간대였다. 대사관 경비경찰도 점심 먹으러 자리를 뜰 가능성이 높은 시간이었다. 망명시도 소식을 들은 이철용 형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동자 10여 명을 대사관 주변에 배치해 주었다.

우리는 잔뜩 긴장한 채 택시에서 내려 독일대사관이 세 들어 있는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비슷한 시간에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빌딩 뒤쪽의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외국인 남녀가 내렸다. 우리를 안내하기로 되어있는 독일인 남녀가 분명했다. 우리는 서로 암호를 교환한 후 그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 대사관으로 올라갔다. 경비경찰은 자리에 없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안내자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약속된 고위 외교관과 기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몹시 당황했다. 안내자들은 기다리자고 했으나 약속에 차질이 생기자 불안해진 우리는 그냥 나오려고 했다. 안내자들은 오늘은 자기들 집에 가서 자고 내일 다시 오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거절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얼른 내려와 버렸다. 등과 목줄기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도피처로 돌아온 지 두세 시간이 지나 다시 찬성이 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외교관과 기자들이 취임 식장에서 돌아오다가 교통 체증 때문에 10분 늦게 도착했다면서 내일 같은 시간에 다시 들어가라는 내용이었다. 효선이는 마음이 변해 안 가겠다고 버텼다. 효선이가 그러자 나도 마음이 바뀌어 안 가기로 결심했다. 나의 독일 망명은 그렇게 해서 무산되었다.


광주 운동권의 걱정


가을이 되자 광주에서는 군사재판을 받은 구속자 일부가 석방되어 나왔다. 그리고 광주에서 다시 소식이 왔다. 온통 슬프고 절망적인 소식들이었다. 그중 나 때문에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를 괴롭게 했다.


“적들이 혈안이 되어 합수(나의 별명)를 찾고 있다. 놈들은 합수를 잡으면 고문 조작을 통해 남아있는 광주 전남 운동역량을 뿌리째 뽑아버릴 음모를 꾸미고 있다. 만약 합수가 붙잡히면 옥중에 있는 분들도 또 한 차례 당하게 된다. 일부에서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합수 자살용 청산가라를 보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광주의 운동을 지키기 위해 절대로 잡혀서는 안 된다. 합수는 잡히면 죽는다. 철저히 은신하라. 훗날을 대비해야 한다. 건강에 유의하라.”


타 지역에서 파견 나온 어떤 군 검찰관은 “지금 구속된 사람들은 절대 사형 안 당한다. 다만 윤한봉이는 잡히면 죽는다. 완전히 죽여 버릴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정보를 슬며시 흘려주었다고 했다. 1심에서 석방된 작은 형님으로부터 온 소식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형님이 석방 절차를 밟고 있을 때 이름 모르는 검찰관 한 사람이 한쪽으로 불러 비슷한 내용을 귀띔해주더라는 것이었다. 광주 운동권은 나의 신변 안전에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운 이유는 또 하나가 있었다. 소위 ‘자유노트 사건’ 때문이었다.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 한 명이 5월 15일의 8인 모임에서 내가 했던 이야기를 어디서 듣고 다른 간부들에게 전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일부 간부들이 “선배님들과 행동을 같이 해야 한다. 전두환 일당이 쿠데타를 일으키면 우리도 무장해서라도 항쟁을 해야 한다. 구체적인 항쟁 전략을 세우자’고 결정한 다음,그 결정에 따라 기획부장 송선태가 자유노트라고 알려진 항쟁 계획서를 작성했었다. 그 노트는 5.18 이후 엉뚱한 경로를 통해 적들에게 압수되었고 광주 운동권은 또 한 차례 불안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뒤늦게 잡힌 송선태는 단호하게 자기 혼자만의 구상이었다고 버텼다. 마침 수사가 일단락 된 뒤였기 때문에 자유노트 사건은 유야무야 처리되었다. 그렇지만 항쟁을 예견하고 대책을 이야기하고 다니던 내가 잡히면,전두환 일당은 고문을 통 해 나와 8인 모임,자유노트,전남대 총학생회, 전남민청협,도청 항쟁지도부 등을 교묘히 엮어 5.18을 왜곡하고 영령들을 욕되게 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불안했던 것이다.


망명 결심과 준비


광주로부터 온 소식을 듣고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해외로 나가 망명 투쟁을 하자. 아무런 활동도 못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신세만 지고 여러 사람을 불안에 빠트리고 광주운동권에 걱정만 끼치는 이 따위 기약 없는 도피생활을 언제까지 무작정 계속할 것인가… 좋다. 나가자.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를 찾아온 최권행에게 이야기했더니 최권행도 흔쾌히 찬성했다. 힘을 얻은 나는 그때부터 망명에 대한 기초지식을 얻기 위해 국제법에 관한 책과 국제정치 음모와 첩보전을 다룬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소설 쟈칼의 날,전쟁터의 개들,악마의 선택을 구해 읽는 등 탈출하는 데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에서 나온 정용화가 광주에서 올라왔다. 용화에게도 내 결심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용화가 이렇게 대답했다.


“형님이 속상해 할까봐 차마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실은 광주에서도 형님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연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탈출 방법은 서울과 광주 양쪽에서 찾아보기로 합의했다. 나는 이리저리 탈출 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밀항 조직과 여권 위조 조직들이 전두환 일당에 의해 깨지거나 장악되어 버렸고,가끔 돼지몰이 (밀항사업)를 하던 원양어선들까지도 심한 감시를 받아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는 비관적인 소식만 계속 들려왔다. 나는 상식적인 방법으로 탈출하는 것은 아예 포기를 하고 어처구니없게도 기구(풍선)를 이용한 탈출 방법까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나에게 꿈에도 생각지 못한 탈출의 길이 열렸다. 무역선을 이용해 북미대륙까지 가는 길이 갑작스럽게 열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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