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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밀항2019-01-09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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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밀항 탈출


급히 마산으로 내려가다


1981년 4월 29일 이른 아침이었다. 후배 정용화가 도피처인 서울의 석달언 씨 집으로 나를 불쑥 찾아왔다.


“갑자기 웬일이야?”

“형님,지금 당장 고속버스로 마산으로 내려 가셔야겠습니다.”

“마산?”

“오늘 배를 타야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용화는 마산에 가서 만나야 할 사람들과 만날 시간, 장소를 알려주었다.


“형님 혼자 내려가면 위험하니까 은경이와 동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은경이한테 연락을 취하고, 광주에 들러 볼일 보고 마산으로 가겠습니다.”


용화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 황급히 떠나갔다. 김은경은 당시 내 도피 과정에서 외부와의 연락을 도맡아 해주던 후배였다. 한 시간 후 은경이가 왔다. 그동안 방구석에만 처박혀 지내 얼굴이 해쓱하게 여윈 나는 병원에서 막 퇴원한 환자 행세를 하기로 했다. 은경이는 나의 여동생 행세를 하기로 하고 함께 고속버스로 마산으로 내려갔다.

마산에 도착해 만나기로 한 장소에 정확히 약속 시간에 맞춰 나갔다. 나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삼미사의 무역 화물선 표범호(Leopard호)의 2등 기관사 정찬대와 3등 항해사 최동현,그리고 그 두 사람의 부인들이었다. 그 두 선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밀항시키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었다. 정찬대는 74년 ‘민청 학련사건’ 때 같이 감옥살이를 한 광주일고 후배 정찬용(당시 거창에서 농민운동)의 동생이었고, 최동현은 나의 동지이자 매제인 박형선(건설업)의 고향 후배였다. 한없이 장하고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 위험한 일을 하겠다고 선뜻 나선 찬대와 동현이는 말할 것도 없고, 만약 탄로 나면 남편들이 어떤 고초를 겪게 되고 가정에 어떤 피해가 올 줄 뻔히 알면서도 흔쾌히 찬성한 두 부인의 밝은 얼굴, 특히 임신 5개월째라는 동현이의 부인을 보면서 나는 크게 감동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5·18이 비록 패배했지만 벌써 내일의 큰 승리를 준비하고 있구나.’


성공 확률 5%, 작전 계획을 세우다


광주를 들렀다 온 용화가 마산에 도착하자 우리는 장소를 여관방으로 옮겼다. 여관방에 둘러앉아 과연 표범호를 통한 밀항이 가능한지 또 성공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를 분석했다. 찬대와 동현이의 말에 따르면, 표범호는 3만 5천 톤 급 무역선으로 선장을 포함 27명의 선원이 타는 배였다. 4월 30일 빈 배로 마산을 출발해서 호주 동북지역 어느 항구에서 알루미늄 원광석을 싣고 미국 서북쪽 워싱턴주 밸링햄 항구에 도착해서 짐을 푸고 곧바로 북상하여 캐나다서 해안 밴쿠버에서 다시 밀을 싣고 남미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 후 항해 일정은 아직 모르는데 미국까지 가는데 약 40일이 걸린다고 했다.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위험한 고비는 세 번이었다. 첫 번째는 철조망이 둘러쳐 있고 수위가 지키고 있는 마산항의 외항선 부두로 잠입해 표범호를 탈 때였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호주와 미국영해에 들어가면 그 나라의 세관에서 나와 밀수품이나 마약, 무기 등의 반입을 막기 위해 검사나 수색을 하는데 그 두 차례의 세관검사를 할 때였다. 항해 중이거나 미국이나 캐나다에 상륙할 때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이 세 번의 고비만 무사히 통과하면 밀항은 성공이었다.

찬대와 동현이의 이야기를 듣고 이것저것 헤아려 본 나는 ‘성공 확률5%,그러나 그 5%에 기대를 걸고 결행하자. 미국을 1차 목적지로 캐나다를 2차 목적지로 해서 가자’라고 결정을 내렸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작전 계획을 세웠다.

一외항선 부두 잠입은 정문을 통해서 한다. 나는 선원으로 가장한다. 나와 찬대와 동현이는 술 취한 것처럼 어깨동무하고 어칠비칠하면서 얼렁뚱땅 정문을 통과한다. 낮에 배에서 나올 때 찬대와 동현이는 술 한 잔 하러 나간다면서 부두 정문의 수 위에게 양주와 양담배를 선물해 친해 놓았다고 했다.

一부두 정문 수위에게 들켜 못 들어갈 경우에는 내가 “찬대와 동현이의 친구인데 오랫동안 바다를 떠돌 친구들이 어떻게 먹고 자는지 보고 가려고 왔다. 들어가서 술 한 잔 마시고 이야기 좀 하다가 나올 텐데 이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며 싸우는 체 하다가 나온다. 어둠 속에서 잠입 여부를 지켜보고 있는 용화, 은경이와 함께 다시 서울의 도피처로 돌아간다.


다음에는 내가 무사히 잠입해 승선한 후 항해 중 발생 가능성이 있는 위험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 항해 중 발각되면 선장은 안기부, 보안사 또는 경찰에 연락을 취할 것이고 연락받은 전두환 일당은 즉각 호주나 미국의 표범호 도착 예정 항구에 기관원들을 보내 나를 넘겨받아 비밀리에 국내로 끌고 올 것이다. 그런 상황에 대비하자.


一첫째, 호주에 닿기 전 내가 발각되어 구금될 경우에 호주에는 도와줄 사람들이 없으니 호주 항구의 파일럿 스테이션(pilot station —모든 배들이 내항에 들어가기 전에 멈추어 서서 세 관의 검사를 받는 지점. 그곳에서 세관 검사를 마친 배는 그 나라 수로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내항으로 들어가게 됨)에 도착하기 직전 찬대와 동현이가 나를 풀어서 비상용 보트를 함께 타고 상륙하여 호주 정부에 망명 신청을 한다. 항해 중 발각되더라도 찬대와 동현이는 항해에 꼭 필요한 기관사와 항해사이기 때문에 나만 가두고 두 사람은 구금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_둘째, 호주를 무사히 통과하여 미국으로 가는 중에 발각 구금될 경우에는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조국의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사전 연락을 취해 도움을 받는다. 그들은 현지의 삼미사 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 표범호의 입항 일시와 항구를 정확히 파악한 후 요트를 타고 돛대 끝에다 ‘Mr Jo’ 또는 봉선화’라고 쓴 삼각 깃발을 달고서 파일럿스테이션에 나와 기다린다. 세 사람은 탈출하여 바다로 뛰어든 다음 재빨리 요트를 타고 항구로 가 망명 신청을 한다.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이 없으면 무사한 줄 알고 서둘러 내항으로 들어가 한 사람은 성경책을 들고 목사 행세를 하고, 또 한 사람은 신도 행세를 하면서 배에 올라와 나를 인도 받은 후 망명 신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들이 목사 행세를 하기로 한 것은 외항선 이 다른 나라 항구로 들어가면 그 항구 부근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목사들이 배에 올라와 기도를 해준 후 내려가는 일이 많기 때문이었다. 무사히 항해를 마치고 입항한 것을 축하하고 남은 항해를 잘 마치고 귀국하기를 기원하는 선상 기도였다. 미국이나 캐나다 동포운동가들의 도움을 받으려면 출입국 이 자유로운 믿음직한 선교사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런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용화가 광주 WCA 회장이신 조아라 장로님과 무진교회의 강신석 목사님을 찾아뵙고 도움을 요청했다.


一셋째, 호주나 미국 또는 캐나다의 파일럿스테이션에서 세관검사를 받다 들킬 경우,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 자리에서 세관원들에게 직접 정치망명 신청을 해보는 모험을 해본다.


암호를 정하다


우리들은 배가 출항한 후 국내의 동지들이 나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도 정했다.


一찬대와 동현이의 부인이 돌아가며 1주일에 한 번씩 남편들에게 전화를 걸어 “별일 없어요?”라고 물으면 내가 안전할 경우 “별일 있으면 내가 어떻게 전화를 받아?’로 답하고 내가 발각되었을 때는 “요즘 배가 좀 아파서 고생하네.”로 답한다. 부인들로부터 남편들이 배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국내의 동지들은 그에 따른 신속한 대책을 세운다. 다음으로 배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배에 올라온 동포운동가들과 서로를 확인하기 위한 암호를 정했다. 그 암호는 용화와 내가 단둘이 앉아 은밀히 정했다.


一성경책을 든 목사와 신도 행세를 하며 배에 올라온 동포운동가는 일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2기사(2등 기관사)를 찾아서 잡담을 하다가 “무슨 꽃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2기사인 찬 대는 “봉선화를 좋아한다. 당신은 무슨 꽃을 좋아하느냐’고 되묻는다. 동포운동가들은 “진달래를 좋아한다.”고 답한다. 확인 암호가 통하면 찬대와 동현이는 나를 그분들에게 인도한다. 인도가 끝나면 찬대는 전화로 국내에 “무사히 물건을 전달했다”고 알린다.

 

 

잠입을 시도하다


작전계획을 세우고 암호도 정한 우리들은 곧바로 첫 번째 관문인 마산 항 외항선 부두 잠입 작전에 들어갔다. 여자들이 급히 시내로 나가 양복 한 벌과 넥타이, 구두 등을 사왔다. 찬대와 동현이가 말한 대로 나를 멋쟁이 국제 신사인 외항선원으로 변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바지 길이를 줄이는 등 한바탕 소동을 피운 후 나는 갑자기 촌놈에서 국제 신사로 변해버렸다.

난생 처음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나는 용화, 은경이와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5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부끄럽지 않도록 조국과 민족을 위해 5월 영령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자고 손을 굳게 잡고 다짐하며 헤어졌다. 서로 눈물을 안 보이려고 애쓰며 헤어졌다.

여관을 나와서 찬대, 동현이가 나와 함께 택시 한 대를 타고 앞서 가고 용화와 은경이가 다른 택시를 타고 뒤따라 왔다. 사방이 어두운 1981년 4월 29일 밤 9시경이었다.

택시는 부두 수위실 10여 미터 전방에 멈춰 섰다. 뒤따라오던 택시는 멀찍이 떨어져 섰다. 우리들은 택시에서 내리면서부터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양복 웃옷을 벗어서 왼팔에 걸치고 오른손에는 양주병 하나를 든 나는, 흐트러진 모습의 찬대와 용현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어칠비칠하면서 혀 꼬부라진 소리로 수위 앞을 지나면서 말했다.


“수위 아저씨! 수고하십니다.”

“우리 한잔 했습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서 정문을 통과해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이번 밀항은 성공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부두는 캄캄했다. 조금 가다가 시내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나오고 있던 선원들을 두 차례 만났다. 나는 선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두 사람의 지시에 따라 숨바꼭질을 하듯 이리저리 창고들 사이로 몸을 숨기며 배로 다가갔다. 주변을 살핀 두 사람의 마지막 수신호를 받고 나는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무사히 철제 계단을 타고 배로 올라간 나는 마침내 내가 35일간 숨어 있을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 공간은 한 평 반 정도 면적의 화장실이었다.


“아,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구나!”


그 화장실은 병실에 딸린 환자용 화장실이었다. 찬대와 동현이의 말을 빌리면 외항선은 장기간 항해를 해야 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의료 시설을 갖추고 의사 한 명도 타게 돼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선주나 회사 측은 돈을 아끼기 위해 의사도 고용 않고 의료시설도 그냥 다섯 평 정도의 공간에 바퀴 달린 환자용 침대 하나와 구급상비약(옥도정기, 멀미약, 반창고 등등)을 넣어둔 약장 두 개를 놓아두는 것으로 눈가림하고 있었다.

또 선원들은 병실을 거의 쓰지 않았다. 병실 침대에 누워 있을 정도의 큰 사고도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작은 상처를 입었을 경우에도 선원들은 그저 약이나 바르고 자기 방에 들어가 쉬기 때문에 그 병실에 딸린 화장실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운 좋게도 병실관리 책임자는 최동현이었고 병실 열쇠는 동현이와 선장만 가지고 있었다.

나는 찬대, 동현이와 의논해서 화장실 문은 항시 안에서 잠가두고 암호를 통해 열기로 했다. 혹시 누가 와서 화장실을 쓰려고 할 때는 문이 고장 난 것으로 하기로 했다.

화장실 바닥은 타일이었고 사면의 벽과 문짝과 천장은 철판으로 꽉 막혀 있었다. 백열등이 하나 달랑 켜져 있을 뿐 창문도 없었다. 한쪽에는 양변기와 세면대가 있고, 문이 있는 벽의 위쪽에는 샤워 꼭지가 붙어 있었다. 천장 한 귀퉁이에는 환기 구멍이 있었으며 바닥 한 구석에는 물통, 빗자루,대걸레 등이 놓여 있었다. 화장실 한쪽은 복도이고 다른 한쪽은 계단이어서 나는 혹시나 소리가 새나갈까 봐 세면할 때도 소리를 죽여야 했다. 변기에 대소변을 보고도 그냥 덮어두었다가 동현이나 찬 대가 병실에 들어오는 때에 맞춰 흘려보내야 했다.

병실 주위 구조를 알아보니 병실은 갑판 위 돌출 부분에 있었다. 그 병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입구 쪽은 복도이고 복도 건너편과 병실의 다른 한쪽은 선실이 줄지어 있었으며 또 다른 한쪽은 계단이고 입구 반대편은 갑판이었다. 입구 건너편 선실은 3등 항해사 최동현의 방이고 병실 바로 옆 선실은 2등기관사정찬대의 방이었다. 양쪽에서 두 사람이 나를 싸고 지켜주는 셈이었다. 화장실 한쪽 벽을 사이에 두고 갑판 쪽에는 열기를 뿜어대는 연통이 있었다.


비상식량을 확보하다


나는 칫솔 하나 차고 화장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수많은 상념들이 휘날리는 눈보라처럼 어지럽게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출항 예정일인 30일 낮에 찬대와 동현이는 은경이가 사준 비상식량과 돈을 가져왔다. 두 주먹 정도씩의 마른 멸치,잣,마른 새우와 식빵 두 봉지,잼 한 통 그리고 치약과 수건이었다. 돈은 들켰을 경우에 대비한 비상금이라며 광주의 동지들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나는 화장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비상식량을 헤아린 후 40일 분으로 나누었다. 하루에 잣 3알,멸치 하 나,마른 새우 하나,식빵 한 조각을 먹기로 했다. 그리고 항해 중 지켜야 할 생활수칙을 정했다.


-철저히 조심한다.

-찬대와 동현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지난날에 대한 반성을 철저히 한다.


드디어 출항하다


오후가 되자 마침내 표범호가 뱃고동을 울렸다. 뱃고동 소리 와 함께 분노와 격정의 파도가 밀려왔다. 나의 머릿속에는 적들의 일그러진 모습과 동지들의 환한 미소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살인마,민족의 반역자들,그들은 수 천 만원의 현상금과 특진을 내걸고 혈안이 되어 나를 찾았지만 나는 그들이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고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난다. 해외탈출을 막기 위해 밀항조직을 일망타진하고 여권 위조단에 철퇴를 가하는 몸부림을 쳤어도 나는 그들의 뒤통수를 치며,교활한 음모의 시나리오에 먹칠을 하며 이렇게 해외로 떠난다. 발을 구르다 책상을 치고, 줄담배를 괴우다 헛웃음을 치고,이를 갈며 씩씩거리다 머리를 쥐어뜯는 그들의 모습…

또 다른 한편에선 나로 인한 불안과 걱정에서 벗어난 동지들과 도와주신 분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슴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두환,노태우야! 네놈들이 그렇게 학살하고 탄압해도 변함없는 동지들의 뒷받침과 그럴수록 더욱 대담해진 대중들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나는 이렇게 떠난다. 내 비록 화물선 변소에 숨어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오르지만,돌아오는 그날까지 내가 얼마나 집요하고 악착같이 싸우는가를!


영해를 벗어나다


저녁이 되자 동현이가 와서 조금 전에 배가 우리나라 영해를 벗어났다고 알려주었다. 아! 내가 조국을 떠나왔구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벽에 기대앉아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었다.

왜놈들에 윤간당해 대들보에 목매달고

되놈에게 강간당해 혀 깨물고 자결하고

양놈에게 능욕당해 우물 속에 뛰어들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세 끼 굶은 새끼들 위해 옥수수 하나 훔쳐오다

머리채 휘둘러서 밭고랑에 처박힌 채

새끼들 울며불며 재 넘어 올 때까지 오열하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앓아 누운 지아비의 눈치 보며 빠져나와

이집 저집 구걸하다 개에 물려 절뚝인 채

보리쌀 한 되에 옷을 벗고 이 악물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병든 새끼 등에 업고 허겁지겁 길 건너다

“출정 길에 재수 없다.” 단칼에 두 토막 나

길바닥에 나뒹굴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환곡 제때 못 갚았다 곤장 맞아 지아비 잃고

단돈 열 냥 못 갚아서 다 큰 딸년 빼앗기고

나졸 보면 혼겁하고 양반 보면 치를 떨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귀머거리,봉사,벙어리,3년 죽은 듯이 참고 살고

시앗 보는 지아비도 하늘처럼 섬겼건만

아닌 밤중 소박맞고 친정집에 찾아갔다

출가외인 호통 아래 문전에서 되쫓기어

밤새도록 달을 보며 골목 안을 서성이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손톱 끝은 바늘로 허벅지는 송곳으로

젊음 홀로 보내시며 피눈물로 키운 딸년

찬물 놓고 여의던 날 거울 앞에 앉으신 채

주름살 헤이시며 눈물짓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삼월이 춘자 명월이 하야꼬

세월 따라 이름 바꿔 떠돌면서 사시다가

순이를 낳고부터 함평댁이 되었는데

딸년마저 이름 바꿔 에레나가 되었다며

보내온 돈 움켜쥐고 통곡하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빨래,베틀,디딜방아 날 가는 줄 모르다가

문고리 잡고 몸을 풀고 미역국 생각도 못해본 채

허둥지둥 호미 들고 뒷밭으로 나가셔서

이 고랑에 젖 한 방울 저 두둑에 눈물 방울

다듬이질 밤이 깊어 팔만 남고 잠이 들고

바느질 시작하니 손만 남고 잠이 들어

잠결에 찔린 손끝 피 맺기 전 첫닭 울자

갓난 새끼 부여안고 흐느끼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친정아비 갑오년에 죽창 들다 맞아죽고

시아비는 의병 나가 머리카락만 돌아오고

지아비는 항일투쟁 만주벌의 귀신 되고

큰아들은 징용으로 외동딸은 정신대로

작은 아들 6.25에 큰 손자는 4.19에

어머니!

뜬눈으로 밤새우고 애태우며 찾아갔다

하나 남은 막내 손자 이를 갈며 키운 손자

민주 통일 부르짖다 칼에 찔려 즉사하자

굽은 허리 곧추 펴고 고함치며 달려들다

앙상한 팔 휘두르며 악을 쓰며 달려들다

흰 고무신 흰옷인데 흰 머리만 흰 머리만…


어머니!

부릅뜬 두 눈에 백년 한 남기고 가

무등산 젊은 원혼들의 피투성이 등에 업혀

백두 한라 넘나들며 울부짖는 어머님을

어떻게 제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꼭 돌아오겠습니다.

꼭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5월 영령들이시여!

이 못난 도망자를 용서하여 주시고

이 못난 놈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또 열심히 활동해서 살아남은 죄, 도망친 죄를 씻고

떳떳이 돌아올 수 있도록

보호하여 주시고 격려하여 주옵소서.


동지들이여!

이 못난 도망자를 용서하소서.

용서받을 만한 실적을 남기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소서.


저를 아끼고 보호해 주시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이여!

그 애정,그 정성 가슴에 깊이 새기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다시 뵈올 그날까지 내내 평안하소서.

진달래 산천아! 무등산아!


조국의 영해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밀어닥쳤던 슬픔과 회한과 분노의 파도가 가라앉자 나의 생각은 어느덧 79년 10월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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