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마지막 미국 방문 지금 내가 정상인의 호흡에 5분의 1밖에 못해. 긍께 5분의 1가지고 사는 거지. 산소 호흡기로. 그러니까 계단, 육교 같은 데 올라가면 한참 숨을 헐떡거리고 고르고 나서 내려오고. 그러니까 아침에 3층에 있는 연구소 출근하다가 올라가면 바로 열쇠를 못 열어. 한참 숨 고르고 나서 열고. 하다 보니까 저항력이 약해지니까 겨울 되면 감기 나한테 저승사자지.
윤한봉이 삶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무렵이었다. 육교를 건너기 힘들었다. 목포에 칩거하면서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며 삶을 연명했다. 마지막 미국에 건너가 한청련 동료들을 만난 것은 2006년도였다. 이 만남에서 윤한봉이 행한 자기반성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는 세 가지를 반성했다. 첫째, 북의 핵 보유가 사실임을 인정했다. 북한을 평화세력이라고 보았던, 이전의 견해를 정정했다. 둘째, 남침이냐, 북침이냐, 한국전쟁의 발발 책임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도 윤한봉은 기왕의 견해를 정정했다. 최근 입수된 소련 측 자료에 의거해 한국전쟁은 남침이었음을, 부끄럽지만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정정했다. 셋째, 1987년 KAL기 폭파의 주범 김현희에 대해서도 윤한봉은 기왕의 견해를 정정했다. 윤한봉은 오류를 반성할 줄 아는 정직한 실천가였다. 마지막 모임이 있던 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정승진의 회고를 들어보자. 모임이 끝난 다음 제가 차로 모시고 호텔에 모셔다 드렸어요. 그 분이 말하길 ‘이후로 여기 올 수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호텔 앞에 내려드리고 보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어깨가 들썩들썩 하면서 쓰러지는 거요. 그날 밤은 윤한봉이 미국에 머문 마지막 날이었다. 최후의 만찬이었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윤한봉은 쓰러졌다. 강인했던 한 사나이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많은 상념들이 그의 마음을 출렁거리며 스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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