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들불 야학
-------박스-- “1884년 5월 1일 미국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쟁의를 시 작했다. 8만 명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전개했다. 5월 4일 파업은 전국으로 확산됐고 노동자 30만 명이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 다. 그 곳에서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8명이 폭동죄로 체포되어 5명 이 처형당했다. 오거스트 스파이즈는 법정의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목 을 가져가라. 하지만 불꽃은 들불처럼 타 오르고 있다. 앞에서 뒤에서 사방에서 타 오르고 있다. 누구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 광주민중항쟁의 서사와 윤한봉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당에서 나는 ‘들불 야학’을 빠뜨릴 수 없다. 야학은 학비가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비공인 학교였다. 야학은 일부 헌신적인 대학생들의 자발적인 봉사에 의존해 운영되었다. 박기순이라는 여성 활동가가 있었다. 그녀는 1978년 여름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을 개설했다. 야학의 이름을 ‘들불’이라 했다. 박기순은 예언가는 아니었으나, 이후 한국의 역사는 그녀가 정한 이름 그대로 ‘들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 크리스마스 날 야학 학생들의 잔치를 위해 박기순은 고된 작업을 했다. 온종일 인근 야산에 올라가 솔방울을 주웠다. 피곤에 지친 그녀의 몸은 새어 들어오는 연탄가스를 감지하지 못했다. 여러 강학들이 그녀의 죽음 앞에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마지막 도청을 사수하다 죽은 윤상원과 박용준은 들불야학의 강학이었다. 그때 잡혀 상무대에 끌려가 고문을 받던 중 머리를 벽에 들이받고 정신병자가 된 김영철도 들불야학의 강학이었다. 1980년 5월 16일 횃불시위를 이끌며 사자후를 토했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이후 투옥되어 옥중 단식 투쟁 끝에 유명을 달리한 박관현도 들불야학의 강학이었다. 이후 청년운동단체를 조직하고 이끌며 젊음을 민주화운동에 바친 신영일도 들불야학의 강학이었다. 1994년과 1996년 두 차례나 단원들을 데리고 미국에 건너가 5월 광주를 연극으로 증거한 극단 토박이의 대표 박효선도 들불야학의 강학이었다. 잠시 박기순과 들불 야학에 관한 속이야기를 열어 보겠다. 들불 야학을 제안하고 조직한 이는 박기순이다. 1978년 6월 전남대학교의 교수들이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읽고, 연행되었다. 노준현을 비롯한 전남대 학생들은 교수의 연행에 항의해 시위를 했다. 박기순은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쫒기는 신세가 되었고, 학교를 그만 두었다. 내가 박기순을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12월 어느 날이었다. 1977년 가을과 겨울은 정국이 어수선했던 시기였다. 박기순은 친구 전혜경의 자취방에 놀러왔고, 나는 그 자취방에서 박기순의 걸걸한 음성을 처음 들었다. 전혜경은 오빠 전복길과 함께 신림동 비지구에서 빈민 야학을 하고 있었다. 박기순은 이즈음 친구 혜경이를 통해 수도권의 노동운동 상황과 빈민 야학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박기순을 두 번째 만난 것은 1978년 7월 어느 날이었다. 양림동 소재 어느 한옥 집이었다. 철따라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예쁘고 아담한 집이었다. 그 집의 상아방에서 전혜경의 모친이 기거하고 있었다. 전혜경의 모친이 기거하던 방은 박기순의 도피처였다. 그곳에서 기순은 장차 역사의 들불이 될 야학을 준비했다. 서울 신림동의 겨레터 야학을 운영한 경험이 있던 전복길과 최기혁이 기순의 야학을 도와주었다. 철필로 글을 쓰고 가리방으로 인쇄해 교재를 만들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혜경 씨 모친의 밥을 얻어먹고 다녔는데, 총각이건 처녀건 부엌에 들어가 어머니의 일을 돕는 사람이 없었으나, 기순은 달랐다. 어머니보다 먼저 부엌에 들어가 어머니 보다 먼저 밥상을 차려 나오는 아가씨가 기순이었다. 내가 박기순을 마지막 만난 것은 1979년 7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7월 20일 김해교도소에서 출소하자마자 기순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기순은 망월동의 공동묘지에 누워 있었다. 함께 간 분들은 윤상원과 박관현이었다. 기순을 땅에 묻던 날 밤 상원은 눈물로 얼룩진 일기장을 남겼다고 한다.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고 있는가? 두 볼에 흐르는 장밋빛 서럽디 서럽도록 아름답고” 윤상원의 가슴엔 박기순을 향한 연모의 정이 싹트고 있었다. 다시 전혜경으로부터 기순의 추억을 들어보자. 대학 시절에 만났던 기순은 말 그대로 소탈하고, 정의심 많고, 순수하고, 따뜻한 여자였습니다. 누구라도 살면서 그런 사람 만나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순이는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어요. 어머니가 한 번 오셨는데 어머니를 보고 아이처럼 좋아하더군요. 기순이의 맑은 성품은 어머님에 의해 형성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윤상원과 박기순의 만남에 대해 알아 보자. 박효선이 남긴 희곡 《시민군 윤상원》은 이렇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전한다. 박기순 : 안녕하세요. 박기순입니다. 우리 야학에선 교사라는 말을 쓰지 않고 강학이라는 말을 씁니다. 강학! 말 그대로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뜻이죠. 오늘 새로 오신 강학 분들을 환영하면서 먼저 각자 인사소개를 하도록 하죠. 나이순으로 할까요? (상원을 보며) 선배님부터 하시죠. 윤상원 : (일어서서) 방년 29세 윤상원이올시다. 지금 현재 광천동에 있는 한남플라스틱 공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신영일 : 어떻게 우리 들불야학에 들어오시게 됐습니까? 윤상원 : 에, 그것은……. (손가락으로 기순 쪽을 가리키며) 무엇보다도 여기 계신 박기순 양이 그냥 얼마나 끈덕지게 결사적으로 저에게 설득공세를 퍼붓던지, 제가 그만 나가 떨어졌습니다. (모두들 야단이다. 상원, 더욱 흥을 내어) 박기순 양이 저에게 온몸으로 헤딩을 해부렀습니다. (폭소) 오늘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기쁘고 반갑습니다. (모두 박수) 1980년 5월 26일 도청 앞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입니다.’라고 윤상원은 밝혔다.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간 광주 시민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선 자신도 그들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윤상원은 죽음의 굿판을 선동하는 그런 무책임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어린 고등학생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돌아가 역사의 진실을 증언하라.”고 말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윤상원은 배속을 뚫고 들어오는 총탄에 목숨을 놓았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되는 ‘님을 위한 행진곡’은 꽃봉오리도 피우지 못하고 먼저 간 먼저 간 박기순과 그녀를 연모한 청년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이다. 네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미쳤고, 한 사람은 살아남았다. 죽은 사람은 윤상원, 박용준이고, 미친 사람은 김영철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가 박효선이었다. 자수를 하고 일상으로 돌아온 효선이 자주 들렀던 곳은 영철의 집이었다.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삶을 이고 가 는 영철을 보는 효선의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일기는 기록한다. ‘나는 가슴 이 터질 것만 같다. 살아 있는 자가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있을까?’ 윤상원은 항쟁지도부의 대변인을 맡았고, 박효선은 홍보부장을 맡았다. 그런데... 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그 야심한 밤 숨막힐 듯한 정적 속에 총을 든 채로 도청부근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고불고불한 골목길을 달 그림자 속에 몸을 감추며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갔을 때부터 총소리는 점점 시내외곽에서 중심가 쪽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도청이 가까운 우리 집 지붕 위로 총탄이 나르고 튀기는 소리가 새벽녘까지 이어졌다.난 골방 속에 숨어서 총소리가 멈출 때까지 오들오들 떨며 앉아 있었다. 총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한 여인의 처절한 가두방송 목소리가 온 광주시가지를 울리고 있었다. '광주 시민여러분! 지금 계엄군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도청 앞으로 나와 광주를 지킵시다…' 그날 밤 상원형도 죽었고 용준이도 YMCA에서 M16에 맞아 죽었다. 고아였던 용준이는 그렇게 고아로 죽어갔다. 난 어쩌면 살인자다.” 1980년 오월 이후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은 ‘그날 함께 있지 못한 자책’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자책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혹독하게 겪은 이가 바로 박효선이었다. 1년 7개월 동안 잠행을 하고, 자수를 했으나, 새로운 삶은 쉽지 않았다. 1982년은 말 그대로 ‘어두운 죽음의 시대’였다. 칠흑처럼 어두운 길, 박효선은 미로를 더듬었다. 박효선은 그 시절의 절망을 이렇게 적었다. 새해다. 나는 거리고 산길이고 아무데나 마구 걷고 싶다. 바람과 먼지에 뒤범벅이 되어 낡아 해진 어느 골목 귀퉁머리에서 픽 쓰러져버리고 싶다. 나는 숨고 싶다. 간밤에 나는 바람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알 수 없다.” 1979년 12월 크리스마스 날 연탄가스로 먼저 간 박기순을 포함한 이들 7인의 열사를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 역시 윤한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2001년도의 일이다. 그 다음 귀국해가지고 5‧18재단 만드는 것까지 엄청나게 욕 먹었지. 아마 나처럼 욕 많이 먹은 사람 없을 거야. 5월 관련단체들이 많잖아.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 같은 놈을 죽이고 싶었을 거야. 하여튼 5‧18 기념재단 만들면서 욕 무지하게 먹었어. 들불열사 기념사업 추모비 5‧18 자유공원에 세웠는데 봤죠? 대한민국에서 제일 멋진 거여 그게. 내 평가가 아니라 타 지역 사람들이 와서 그렇게 말해주더라고. 내가 초대 이사장 맡았는데, 들불상 제정해 가지고 일 년에 천만원씩 상 주는데, 우리나라에서 운동 관련 상으로는 제일 큰 거여. 천만 원짜리라. 윤한봉은 뜻있는 이들과 힘을 합쳐 1년여의 홍보와 모금활동을 통해서 들불 추모비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우면서 의미가 깊은 추모비’라는 칭송을 듣는 조형물로, 붉은 타일 벽에 일곱 열사의 얼굴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새겼다. 윤한봉은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활동가에게 주는 ‘들불상’을 제정했다. 윤한봉은 이 일에 생애 마지막 열정을 쏟아 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