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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5-봄날은 간다2019-01-0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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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아내를 맞이하다


95년 4월에 팔순이 넘으신 어머님의 집요한 하소연에 굴복해서 결혼을 했다. 만 47세의 늙은 총각이었던 나는 한청련 회원으로 민족학교 총무로 활동하면서 나를 정성으로 뒷바라지해 주었던, 그리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34세의 신경희 씨에게 국제전화로 청혼해서 결혼한 후 내 생애에서 가장 넓고 좋은 주거공간인 12평짜리 영구 임대아파트에 살림을 꾸렸다. 연구소도 운영하고 있다. 고마운 몇몇 후배들의 도움을 받 아 95년 3월 ‘민족의 위대한 미래상을 마련하고 중장기적인 진로를 제시하며 그 진로를 개척해 나갈 인재와 세력을 양성한다’는 목적을 가진 민족미래연구소를 광주에 설립해서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민족미래연구소의 개소식에는 전국에서 많은 운동권 인사들이 찾아와 축하를 해주었다. 방문하는 사람들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연구소는 언제나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가면 언제든 따뜻한 차를 대접받을 수 있었고, 욕설과 사투리가 뒤섞인 촌놈의 달변을 하염없이 들을 수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민족미래연구소를 열고, 이어 결혼식을 올렸다. 민족미래연구소가 돌아온 윤한봉의 둥지였다면, 이 둥지에 함께 머물 짝이 필요했던가? 아들의 결혼은 팔순 노모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어머니! 어머니의 원대로 결혼을 하겠는데, 내가 어떤 배우자를 데려와도 받아들일 수 있지요?”

 

윤한봉은 곧장 국제전화를 걸었다. 로스앤젤레스의 민족학교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총무 신경희가 전화를 받았다. 윤한봉은 신경희에게 다짜고짜 한국에 들어오라고 했다. 참으로 무뚝뚝한 청혼이었다. 신경희는 생각 좀 해보고 다시 통화하자고 답했다. 일주일 후 윤한봉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생각해 봤어?”

“형님, 나 먹여 살릴 수 있어요?”

 

윤한봉은 태연하게 답했다.

 

“내가 어떻게 먹여 살리나?”

“알았어요. 들어갈게요.”


1995년 4월 17일은 광주의 하늘이 푸르른 날이었다. 광주의 염주체육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전통 혼례가 치러졌다. ‘신랑 신부 맞절’ 축하객들은 모두 싱글벙글 했다. ‘오매, 합수가 장가가는 날도 있네. 오래 살고 볼 일이여!’ 신랑의 나이는 47세, 신부의 나이 34세였다.

신경희는 필라델피아 한청련 출신이다. 식구들의 반대가 거셌다. 한청련 회원이 된 후, 민족학교 상근자로 젊음을 보낸 여성이었다.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

아들이 미국에 있을 때는 얼굴만 보면 소원이 없겠다던 어머니였다. 귀국하니까 장가만 들면 소원이 없겠다던 어머니였다. 이제는 아이만 낳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그것은 부모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라는 소원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아이는 없어도 행복한 부부였다. 윤한봉은 술은 마시지 않지만 노래는 곧잘 불렀다.‘두어라 가자’로 시작되는 《공장의 불빛》이 윤한봉의 애창곡이었다. ‘옛 동산에 올라’와 같은 서정적인 가곡도 좋아했다. 벙어리 여인의 슬픈 이야기인 《백치 아다다》도 좋아했는데, 윤한봉은 이 노래만큼은 아내 신경희에게 불러달라고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배우던 노래는 《봄날은 간다》였다.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이 노래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되는 이 가요는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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