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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2-귀국2019-01-0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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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귀국

 

윤한봉의 귀국 문제는 김영삼의 당선으로 더욱 현실화되고 있었다.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1980년대의 대표적인 두 정치가였다. 1993년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영삼은 이전의 정권과 달리 윤한봉의 귀국에 대해 호의적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았다.

고국의 어머님을 뵙고 싶은 윤한봉의 심정은 간절했다. 윤한봉은 귀국을 소망했으나 이를 위한 행동은 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 광주에서 그의 귀국을 추진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선배님! 언제나 그랬듯이 겨울의 무등산은 하얀 눈의 빛으로 빛고을의 마음을 품어 주고 있습니다만, 12년 이 기나긴 세월을 고국에의 그리움으로 살아 오셨을 선배님을 광주는 아직 품지 못하고 있습니다. 돌아오십시오. 이곳의 정부가 선배님에게 줄 선물은 쇠고랑뿐이겠지만, 이곳의 민중은 선배님에게 뜨거운 환호를 보낼 것입니다.

 

윤한봉의 귀국 추진에 나선 것은 한국에 있는 윤한봉의 몇몇 동료들이었다. 황광우는 윤한봉의 귀국 허가와 수배 해제를 요구하는 10만인 서명을 제안했다. 1992년 3월부터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황광우와 그의 동료들의 추진력은 대단했다. 7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

1993년 5월 12일, 윤한봉은 언제나처럼 로스앤젤레스 민족학교에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후 늦은 시각이었다. 한국의 한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담화에 윤한봉의 수배 해제와 귀국 허용 조치가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윤한봉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원수 같은 전화는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 축하 전화, 인터뷰 요청 전화, 내일 당장 귀국하라는 광주로부터의 독촉 전화, 가족들 전화들이 밤새 계속되었다. 한청련 회원들의 전화도 끊이질 않았다.

윤한봉은 귀국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지부를 돌아다닐 여유가 없었다. 각 지부에 자신의 귀국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 달라고 연락했다. 지역별로 토론을 해서 그 내용을 팩시밀리로 로스앤젤레스 민족학교에 보내달라고 했다. 윤한봉은 임시 귀국을 생각했다. 광주에 다녀온 후 최종 결정을 하자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족학교 뒷마당에 나가보았다. 로스앤젤레스 민족학교의 뒷마당 에는 상추, 고추, 호박, 시금치, 부추, 오이, 쪽파 등 채소들과 분꽃, 봉선화, 코스모스, 채송화 같은 꽃들이 심어 있었다.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일이 생기면 윤한봉은 뒷마당에 나가 채소와 꽃을 가꾸곤 했다. 말없이 쪼그려 앉아 잡초를 뽑고 퇴비와 물을 주어 키웠다. 고추는 말뚝을 박아주고, 오이와 호박에는 그물망을 해주어 마음껏 자라게 했다. 이제 그가 떠나면 채소와 꽃을 가꿀 사람이 없다.

1993년 5월 19일 아침이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윤한봉은 애써 눈물을 감추며 공항으로 출발했다. 최진환 박사와 강완모가 광주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공항까지 나온 배웅 나온 회원들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본인의 회고다


샘솟듯 눈물이 솟구쳤지만 애써 눈물을 감추며 LA국제공항 검색대를 통과했다.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조국에서 오신 손님들을 배웅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저곳을 통과해서 비행기를 타고 조국으로 돌아갈까’ 하고 생각했던 검색대였다. 수없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던 그 검색대를 통과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는 탑승구를 지났다.


만 12년의 세월이었다. 서른네 살의 젊은이로 왔다가 마흔여섯 살의 중년이 되어 돌아가는 길이었다. 비행기에 오른 윤한봉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귀국길에 오르고서야 한청련 회원들과 얼마나 깊이 정이 들었는가를 실감했다.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추억 속에 명멸하는 수많은 얼굴들이 비행기가 이륙하고도 두 시간 동안이나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두 시간 정도가 지난 후에야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나는 돌아가고 있었다. 온갖 생각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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