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같은 날 같은 시각, 한청련 교육부장 한호석을 단장으로 한 미국의 행진단은 40여 명에 불과했다. 미국인들의 무관심 속에 퍽 외로운 행진을 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욕하는 미국인도 만났다. 그래도 기죽지 않고 11만 명 분량의 핵무기 철거 서명용지를 초록색 보자기에 싸서 나눠 짊어지고 행진을 계속했다. 북한과 미국 양쪽에서 행진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윤한봉은 어디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뉴욕의 청년학교 사무실에서 먹고 자면서 상황을 총지휘하느라 일주일간 거의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준비과정의 복잡함은 말할 것도 없고, 행진이 시작되고도 마음 놓을 겨를이 없었다. 7월 27일, 북한의 행진단은 판문점에 도착했고, 미국의 행진단은 워싱턴DC에 무사히 도착했다. 판문점의 행진단은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연대위원회’ 결성을 선포하고 2년마다 정기적으로 평화대행진을 하기로 결정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DC까지 행진을 했어요. 이분들은 행진을 오래해서 발이 아프잖아요. 부르트고. 안타까웠고 당일만이라도 저는 하고 싶었고. 제가 거기에 당일만이라도 참여한 게 뿌듯했죠. 한편 행진단원 모두가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걷기도 힘든 상황에서 어렵게 워싱턴DC에 도착한 미주행진단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한반도 전쟁 종식을 위한 평화대회를 개최하고 11만 명의 서명지를 미의회에 전달했다. 이때 예정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해산식을 마친 행진단이 판문점을 도보로 통과해 군사분계선을 넘으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그 자리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군사분계선 통과나 농성은 계획에 없던 돌발적인 상황이었으나 말릴 길도 없었다. 외국인 10명과 임수경, 또한 임수경을 안전히 데려오기 위해 방북한 가톨릭 문규현 신부까지 65명이 6일이나 단식농성을 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뉴욕의 한청련 회원 10여 명도 청년학교에서 4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끝내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국한 후 구속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1989년 7월, 임수경을 데리고 오기 위해 2차 방북을 하기 전 윤한봉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나는 다시 방북할 일에 심경이 복잡한데 합수는 “그게 바로 신부님이 뉴욕에 오신 이유인가 봅니다” 하며 엄청나게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나저나 신부님은 복도 많습니다. 가보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신부님은 지난달에도 갔다 오시고 이번에 또 가시게 되었으니……” 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해서 무슨 일이든 간절히 하고 싶어 하던 사람이었으니 제가 부러웠을 법도 합니다
한편 국제준비위의 고문으로 참여했던 미국 연방하원의원 로날드 델럼스는 다음과 같은 지지 성명서를 발표했다.
본인은 1989년 7월 20일부터 27일까지의 국제평화대행진을 지지하는 이 성명서를 발표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역사적인 모임이 Korea의 자주화와 핵무기 없는 평화적인 통일을 갈망하는 한국인들을 지지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아시다시피 본인은 미 연방 하원의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국제 갈등을 완화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따라서 세계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국의 대화의 통로를 여는 것이 절실한 문제이며, 이에 관한 한 북한과 남한은 세계를 지도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인은 본 행진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 한국전쟁 이래 유지되어 온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라. - 북한과 남한 간 불가침협정을 체결하라. - 북한과 남한의 군사력을 감축하라. - 남한으로부터 미군과 핵무기를 철수하라. - 미국과 남한의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을 중지하라.
본인은 평화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계속 몸부림을 쳐야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Korea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행진하고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무조건적인 연대를 보내며, 여러분의 Korea의 평화를 위한,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한 행진에 함께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