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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7-마당집을 세우다2019-01-0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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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마당집


울분과 자책감을 견디지 못한 윤한봉은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홍기완이 동조해주었다. 10일 간 둘이 단식농성을 했다. 그것은 일종의 추모식이었다. 단식을 하면서 윤한봉은 좀 더 서두르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더 이상 신분을 숨길 필요가 없게 된 사건이 터졌다. 윤한봉이 단식을 하고 있던 무렵, 국내에서 ‘오송회 사건’이 터졌고, 그가 미국으로 밀항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어버린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광웅 등 군산의 몇몇 교사들이 학습모임을 하다가 그해 10월에 체포된 데 있었다. 교사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윤한봉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찰은 한껏 고무되어 윤한봉의 주소를 알기 위해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그제야 경찰은 윤한봉이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찰은 윤한봉의 밀항 사실을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한봉으로서는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제 더 이상 교포들에게 가명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윤한봉은 오송회 사건을 본격적으로 활동해도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신분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진 12월부터 윤한봉은 바로 조직에 착수했다. 10년의 계획을 설계했다. 먼저 미국의 각 지역에 청년운동 단체를 만든다. 이후 전국적인 연합조직으로 묶는다.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 호주, 캐나다, 일본 등 세계 전역에 한국인 청년운동 단체를 만든다. 야심찬 계획이었다. 학습과 훈련에 충실한 조직, 높은 규율로 다져진 조직을 구상했다.

 
우선 사람이 모일 공간이 필요했다. 윤한봉은 ‘마당집’을 구상했다. 마당집이란 사람들이 모이는 ‘마당과 같은 집’이란 뜻이다. 윤한봉은 지역마다 마당집을 세우고, 지역마다 서러 다른 마당집의 명칭을 부치고자 했다. 지역의 특성에 맞게 이름을 붙이되, 로스앤젤레스 마당집의 명칭은 ‘민족학교(Korean Resource Center)’라 짓기로 했다. 청년학생들에게 민족의 뿌리에 대해 가르치고 민족문화를 보급을 하는 모임의 장이다.
수중에 가진 돈이라고는 고작 200여 만 원이 전부였다. 도피자금이었다. 꽁초를 주워 피우며 아껴온 돈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독자적인 사무실을 마련하겠다는 건 누가 보아도 무리한 계획이었다. 그래도 추진했다. 1982년 12월 무렵이었다.
민족학교 설립식은 1983년 2월 5일에 열렸다. 미국의 한인사회에서 민족교육 기관이 들어선 것이다. 1885년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도, 1905년 미국에 건너간 이승만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설립식을 마친 윤한봉은 그 즉시 민족학교를 비영리단체로 등록하고 정부로부터 면세허가를 받아냈다. 이사장은 치과의사 최진환이 맡고, 교장은 전진호가 맡았다. 홍기완은 아예 직장을 때려치우고 민족학교로 출근했다.


바르게 살자.
뿌리를 알자.
굳세게 살자.


순 한글로 쓴 프래카드가 벽에 붙었다. 민족학교의 교훈인 셈이다. 민족학교에서 윤한봉의 직함은 소사였다. 일제 강점기 중국에 망명한 김구가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윤한봉은 말 그대로 민족학교의 소사가 되었다. 심부름꾼 혹은 소사의 역할을 자임했다는 윤한봉의 술회는 그와 함께 실천한 여러 동료들의 증언에 의해서 입증되는, 윤한봉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의 하나이다. 민족민주운동의 조직 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인사들 중 상당수가 나름의 명예욕이나 권력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재야운동의 대표 격으로 통했던 장기표, 이부영, 김근태 등의 인사들과 윤한봉의 두드러진 차이는 조직의 수장 직위를 맡는 것을 싫어했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뉴욕 민권센터에서 만난 정승진의 증언이다.


‘나는 거름이다. 나는 거름이 되고 지게꾼처럼 일하겠다.’ 합수 형님은 그 약속을 5‧18 때 먼저 가신 동지들에게 한 거죠. 평생 그걸 지켰죠. 놀라운 것은 무슨 회장과 같은 타이틀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민족학교의 직함은 소사였고, 민권센터에서도 공식적인 직함을 가진 적이 없어요. 이사도 아니었어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윤한봉은 손에서 걸레를 놓지 않았다. 닦고 닦았다. 문틀과 창틀에 먼지가 앉을 틈이 없었다. 건물 주위에는 담배꽁초 하나 휴지 한 장이 떨어져 있지 않았다. 바닥을 닦을 때는 무릎을 꿇고 걸레를 밀고 다녔다.
생활고가 심각했다. 설립 두 달 후 아예 민족학교에서 기숙하기로 했다. 맹물에 밥을 말고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누가 밥을 사주면 남은 반찬과 찌개를 싸왔다. 성악가 이길주는 틈만 나면 민족학교에 찾아와 밥을 사주었다. 그녀가 민족학교에 방문하는 날은 학교의 잔칫날이 되었다.


민족학교 이사들은 천성이 착한 이들이었다. 이길주는 약하고 힘없는 사람을 돕는 일이라면 어디나 쫓아다니는 선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민족학교에 대한중상모략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항상 웃는 얼굴로 나타나 맛있는 걸 사주고 갔다. 그녀를 두고 윤한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길주 씨의 전생은 나무에 앉아 노래만 하던 새였던 같아.”
설거지는 화장실 세면기를 이용했다. 사무실을 주거지로 사용한다는 신고가 들어 갈까봐 발소리가 나면 얼른 숨어야했다. 잠은 바닥에서 자고 담배는 꽁초들을 모아 피웠다. 옷은 모아온 헌옷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 입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즐거운 날들을 보냈다. 한인들 사이에선 윤한봉이 거지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동정심 많은 이들이 먹을거리를 갖다 주어, 외롭고 힘든 시절을 견뎌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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