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교수들과 학생들의 저항 함평고구마 농성이 벌어지고 두 달 후인 1978년 6월 27일, 광주에서는 또 한바탕 소동이 났다. 전남대 교수들이 ‘국민교육헌장’으로 상징되는 유신정권의 교육이념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민주교육지표’라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이 시절 학생들은 매일 아침 조회 때마다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올리며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선언해야 했다. 또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하는, 결과적으로는 어떠한 불평불만도 갖지 말고 지배 권력에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파시즘의 전형적인 구호였다. 유신 정부는 지도교수를 임명해 학생들을 지도하고 지도보고서를 써내라 했으며, 담당 학생이 시위에 가담하며 지도교수들도 함께 문책하겠다고 했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이 이 지경이 되자 웬만한 교수들은 교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1978년 신학기가 시작되자 송기숙 교수는 서울 대학들의 사정을 알아보려고 서울에 갔다. 당시 시국사건으로 해직상태에 있던 백낙청 교수를 찾아 갔다. 사무실에는 백 교수 혼자 있었다. 송 교수는 학생들이 군사정권에 저항하다가 계속 희생을 당하고 있으니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되겠다며, 함께 싸울 교수들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송 교수는 연세대학교 해직교수 성내운 교수를 만났다. 성 교수는 성격이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어서 금방 의기가 투합했다. 송 교수는 든든한 동료가 생기자 날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윤한봉이 교수들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접한 것은 성명이 발표되기 한참 전이었다. 교수들이 나서서 군사정권의 이념을 비판해 봐야 연행되고 해직되면 끝이었다. 학생들이 동조시위로 사건을 키워야 했다. 발표 며칠 전 전남대 송기숙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넌지시 말을 꺼냈다. “교수님, 어째 하시는 일은 잘 돼가세요?” 성명서 작성과 서명은 비밀이었다. 깜짝 놀란 송기숙의 표정이 굳어졌다. “뭔 일? 나 하는 일 없어.” 시치미를 떼고 가 버리는 것이었다. 윤한봉은 등 뒤에 대고 말했다. “하여튼 잘하셔야 합니다.” 송기숙은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차나 한 잔 하자며 윤한봉을 중흥동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한봉이, 자네가 아는 일이란 건 뭔가?” “아니, 이 바닥에서 제가 모르는 일도 있어요? 서명한 교수님이 열 명 조금 넘지요? 불어 김현곤 교수님, 문화사 이석원 교수님, 이홍길 교수, 이방기 교수, 명노근 교수……”
송기숙은 놀라 말을 못했다. 서명도 비밀인데 명단까지 거의 다 맞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서명자가 누구인가는 윤한봉도 들은 적이 없었으나 전남대 교수 중에 민주교육지표에 서명해 줄 사람은 빤했다. 감방에서 나와 월부책을 팔러 다닐 때 학생들 시켜서 책을 사준 교수들, 도서관 앞에서 후배들에게 노상 강연을 하고 있으면 몹시 미안한 얼굴로 지나가던 교수들이었다. “한봉이, 어디 가서도 이런 얘기 절대 말게.” “교수님들이나 알아서 잘 하세요. 저는 밖에서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교수님들이 치고 나가면 학생들이 동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약속된 6월 27일, 송기숙을 비롯한 전남대 교수 11명은 기자들을 불러 민주교육지표를 발표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연행되어 버렸다. 교수들이 직업을 포기하고 감옥에 들어갈 각오로 싸우는 일은 보통의 결단이 아니었다. 6월 28일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서명한 <우리의 교육지표>가 발표되고 이들 교수들이 6월 27일 연행되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전남대학교에 퍼졌다. 정용화와 노준현이 6월 29일 시위를 위한 모임을 열었다. 박석삼과 조봉훈, 박몽구와 김선출, 김윤기와 안길정, 박현옥 등이 모였다. 노준현이 주동자로 나섰다.
1978년 6월 29일, 전남대 교정에 유인물이 살포되면서 1,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곧바로 경찰이 학내로 진입했다. 학생들은 경찰들과 난투극을 벌이면서 시위를 벌였다. 7월 1일에는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광주 시내 충장로로 진출해 가두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연행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다쳤다. 경찰은 전남대생 500여 명을 연행했고, 14명의 학생을 구속했다. 송기숙 교수는 구속되었고 나머지 교수들은 모두 해직되었다. 그 2년 후 일어난 5․18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토대를 찾으라면 우리는 교육지표사건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문승훈은 회고한다. 1978년 ‘교육지표선언’ 사건으로, 송기숙 교수님은 구속·해임되셨으며, 이홍길(사학과), 김현곤(불문과), 김정수(영문과), 이석연(사학과)· 안진오(철학과), 홍승기(국사교육과), 김두진(국사교육과), 이방기(법학과), 명노근(영문과), 배영남(영문과) 10명의 서명교수도 해임되셨다. 전남대생으로는 김선출, 김윤기, 노준현, 문승훈, 안길정, 박병기, 박몽구, 박현옥, 신일섭, 이영송, 이택, 정용화, 최동열, 한동철 등 14명이 구속·제적되었다. 그리고 박기순, 신영일, 양강섭, 엄0수, 허민숙, 이종록, 최혁 등 10명이 무기정학 등 중징계조치를 당했다. 한편 조선대생으로는 양희승, 유제도, 박형중, 김용출 등 4명이 구속·제적되었다. 아울러 ‘민주교육지표운동’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치면서 지원해주신 재야인사로는, 조아라(YWCA회장), 이성학(양림교회 장로), 은명기(양림교회 목사), 이애신(YWCA총무), 강신석(무진교회 목사), 홍남순(변호사), 이기홍(변호사), 윤한봉(민청 관련), 김상윤(민청 관련), 이강(함성 관련), 김남주(함성 관련), 나상기(민청 관련), 이양현(교련반대), 정상용 (민청 관련), 이학영(민청 관련), 최철(민청 관련), 박형선(민청 관련), 이기승(민청 관련), 최연석(민청 관련), 임추섭(교사), 정규철(교사), 문병란(교사), 정현애(교사), 임영희(송백회), 조봉훈(참여 후 도피), 박석삼(참여 후 도피),박석률(도피 지원), 김은경(한신대 2년), 윤상원(도피 지원), 고홍(도피 지원)·, 김광한(도피 지원), 김규선(도피 지원), 김하봉(도피 지원), 이길동(도피 지원) 등이 있다.
윤한봉은 1978년 이래 광주 운동권이 크게 번창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 윤한봉과 김상윤, 나상기와 정상용, 최철과 정용화 등의 협업 하에 이루어진 조직 운동의 성과였다. 안길정의 회고는 1978년을 전후한 광주지역 학생운동가들의 이름을 이렇게 전한다. 1977년 9월 나는 복학하여 이듬해 봄에 영문과로 진학했다. 이때 내가 들어간 서클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문리대생만을 대상으로 하는 문우회(文友會)로 회장에는 신일섭, 회원으로는 허민숙, 김대현, 임형,박선정, 장윤수 등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기독학생회이다. 당시 이 회의 회장은 국문과 3학년 이영송이 맡았고, 회원으로는 허순이 이종록 노준현이 있었다. 기독학생회에 간여하면서 양림 웃교회에서 시작된 공부에도 나가게 되었다. 이때도 노준현이 안내자가 되었다. 웃교회는 기독교장로회 소속으로 은명기 목사님이 계셨고, 우리 과 명노근 교수는 이곳 장로였다. 당시 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전대생으로는 조봉훈.최철.이세천.김금해.그리고 조선대생으로는 박형중과 몇몇이 있었다. 탈패의 활동은 그보다 훨씬 넓은 외연을 만들고 있었다. 여기에는 김윤기, 김선출, 전용호, 윤만식, 박효선 등이 관여했다. 당시 농촌현실을 소재로 삼은 마당극 <함평고구마>는 꽤 반향을 일으킨 것으로 기억된다. 탈패는 나중에 조선대에도 조직되었고, 활동을 지속하며 많은 후배들을 양성했는데, 여기에는 황석영 선생이 관여하고 있다고들 했다. 이 무렵 서울 등과 교류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자리에 몇 번 참석했다.
노준현은 그런 선배 그룹과 학내, 그리고 외곽조직을 잇는 허리였다. 그는 선배 그룹과 회동하는 자리가 있을 때면 나를 데려 갔다. 그래서 기승이 형집에 가서 선배들과 하룻밤 묵는다든지, 화순 가는 길목의 나상기 형집에 가서 서울서 내려온 Y간사 황인성 씨와 회동한다든지 했다. 상기 형 집에는 나 말고도 농대의 조봉훈, 국문과 허순이 등이 같이 갔다. 이런 움직임은 1978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그해 몹시 추운 겨울 날, 우리는 장흥 산기슭의 산채 모임에도 갔다. 스무 명 가량이 회동했다. 우리 쪽에서 간 사람으로는 박현옥, 조봉훈, 위에서 내려온 사람으로는 서울대생 김용관과 황광우 등이 생각난다. 그날 처음 보는 김용관은 또박또박한 말씨가 깊은 인상을 남기는 수재였으며, 황광우는 정열덩어리였다. 모임은 전국 운동판으로 돌아가는 소문을 전하고, 정세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어찌나 담배를 피워대는지 방 안이 굴뚝이었는데, 양말에서는 청국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칠 때까지 논의를 하다가 하나둘씩 쓰러져서 칼잠을 청하는데, 아예 자지 않고 이야기를 잇는 이는 노준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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