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월부책장사
구술자: 극단적인 예로는 그 해 말에, 내가 도저히 안 되겄길래, 두가지 일을 벌렸는데 이게 살아야 하니까 먹고 산다기보다는 나 자신이 먹고 산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여기서 절망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버틸라면 서로 의지해야 하니까 뭐 세력을 키우고 뭐 싸우는 것은 둘째고, 우선 우리라도 지켜서 살아남아야한다는 그런 절박감 때문에 모질게 좀 한 것들이 있는 게 인자 그게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월부 책장사 했고 하나는 포장마차 그렇게 했어요. 우선 4월달에 징역 갔다 나온 민청학련세력들이 중심으로 해서 구속자회를 만들었어요. 민주회복구속자회라고 그래갖고 내가 초대회장을 맡았었는데, 그래가지고 뭐 학습도 뭐 체계 있게 못하고 자꾸 만나는 거 이제 서로 의지할 수 밖에 없으니까. 뭐 아무도 우리를 상대해주지 dskg는 그런 외톨이가 돼 있는 상황에서 거 구속자회를 만들었는 게 그 구속자회도 다른 지역은 다른 지역들도 만들었는데 다 깨졌어요. 지그들이 탄압하니까. 근데 광주만 그것을 지켜갔는데, 예를 들면은 이제 포장마차, 월부책장사하기전에, 용봉 축제라고 그러죠, 6월 달인가 5월 달에 전남대 개교기념일 행사. 옥바라지를 하겠는데 그 다음에 이제 이 버스비가 없어가지고 못나오는 정도, 담배를 제일 값싼 담배도 못 살 정도에요. 긍게 인자 나는 아예 운동 뛰어든 이후부터는 가방을 똥가방이라고 그랬는데, 가방이 헐어서 똥가방이 아니라 그 안에 벼라 별것이 다 들어 있다고 그래갖고, 아예 담배를 거기다가 여러갑씩 담고 다녔어요. 빤스에다 런닝구에다가 이쑤시개부터, 하여간 손톱깎이까지 집도 절도 없이 동가숙서가식하고 다니니까. 그 안에 담아논 게 후배들이 가방 열어갖고 담배 가져가고, 옥바라지 해야 하고 돈이 필요하니까, 버스비 없다고 하면 형님, 왜, 서울에서 오랜친구가 왔는데 국밥이라도 하나 사먹고 싶은데 하다못해 돈이 필요한 거예요. 돈이 인제. 그래서 용봉축제 때 가서 얼음, 아이스케끼 인제 케키 장사를 하자 그래가지고 전부 모였어요. 처음에는 호기스럽게 다들 자기도 통을 매겠다고 가다가, 형님 동생하고 아는 동생들이 달라드니까 이 원수들이 난처해갖고 싹 (빠지는 거지), 좋아 그럼 내가 하지, 얼음 매고 악을 쓰고 다닌 거예요. 우리 어렸을 때 들어서 얼음과자라고 하면서. 그러니까 인제 학교당국에서도 처장이 나서갔고 사람을 시켜서 날 좀 보잔다고 갔어, 갔더니 목표액이 솔직히 말해서 얼만가, 우리가 주께 좀 가소, 무슨 소리하요, 우리 깨끗이 돈 벌어서 깨끗하게 쓸라고 그러는데, 우리가 사 먹으면 될 것 아닌가, 그거야 내가 장산디 좋죠, 인자 한 통을 딱 사주더라고. 직원들 나눠주고, 그래서 얼른 또 한통을 받아갖고는 또 악을 쓰고 다니니까 오라고 하더만 아 목표액을 말하라고 주께. 인자 그래갖고 인자 안받고 팔고 다녔는데, 끝까지. 악을 쓰고 다녔어요 그냥. 인자 악밖에, 그때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악밖에 없었어. 독, 뭐 다른 거 없어. 신념 그런 건 뻘소리여 그거 뻘소리. 길게 봤을 때 이야기고, 상황 상황을 놓게 되면은 얼마나 독하냐, 악하냐의 문제, 악을 뽐느냐의 문젠데, 그래갖고 인제 그걸 팔고 다니고. 그 다음에 이제 지금은 인제 후문에서 들어가면 오른쪽이 요란해져 브렀던데, 거가 거의 한 만평이상이 그전에는 거 공터 였어요, 초지, 풀밭 그래갖고 전남 농대에서 초지를 조성해갔고 거기를 벴다고요, 사람들을 사서. 거 지금 건물들어서고 난리가 났던데, 전남대 깝깝하게 돼 브렀는데, 옛날에는 시골이었는데, 인자 전남대 내가 축산과니까 농대쪽하고 이야기를 해가지고, 교수들한테 이야기를 해갖고, 일당사서 사람 일당쓰고 쓸 바에야 우리를 써라. 우리가 베서 돈도 이렇게 이렇게 좋은데다 쓸란다, 그렇게 해라. 거기서 인자 벗어 부치고서 베는데 남주가 또 김남주 시인이 입이 걸거든. 그런데 학생들 웃고 떠들면서 왔다갔다 하더니 남주가 화가 나가지고는 욕을 욕을 하면서 시발놈들아 느그들 그렇게 세상이 좋아서 낄낄거리고 웃고 사냐부터 악을 쓰고 그런 일도 있고 그랬는데, 그것도 이틀하고 쫓겨나 버렸어. 압력이 들어와 갖고, 그래서 인제 내가 그러던 차에 김정길이가 몸이 아주 안 좋아진 거예요. 왜 그러나믄 전기고문을 민청때 받았는데, 전기고문 유일하니 김정길이가 받았는데, 날이 으스스하거나 비가 오고 그라믄 몸을 추스르지도 못할정도로 지팽이를 집을 정도로. 그렇게 됐는데 골, 우리가 옛날부터 어렸을때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골병 든 사람은 똥물, 오래된 똥물을 마시면 좋다더라. 인자 고 이야기 돈이 없으니까, 해결책이. 그게 또 어떤 사람들이 좀 흑염소를 고아서 먹이면 좋고. 그 인자 오래된 똥을 어딨냐 절간밖에 없다. 절로 보내야 한다. 절로 보내면 먹고사는건 거기서 돈내야 하숙인데, 돈, 흑염소 사먹일라면 돈, 어떻게 하냐 답이 없어, 좋다 그럼 내가 나서겠다. 그래갖고 내가 월부책장사를 나섰어. 아 뭐 왕비 열전부터 시작해서 희망없는 아조 책이라도 돈 버는게 목적이니까. 그래갖고 딱 해갖고 개학하고는 젤먼저 서부경찰서 정보과정을 찾아갔지. 인자 그 사람이 우리들 뚜들어팼고 그런 사람중에 한 사람이여. 책좀 사주쇼, 나도 인자 먹고 살아야 될거 아니요. 복학도 안시켜주고, 취직은 뭐 당신도 뻔히 알잖애 안해 더 안시킨다는거. 과외도 못하게 하는 판에 먹고 살아야하니까 나좀 사주쇼. 그랬더니 사주더라고. 대학에 들어가서 교수들을 좀 만났더니, 교수들이 뭐라 하냐면은 그렇게 나 만나면 반갑게 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총장한테 먼저 가보소 총장이 사면 참 우리가 편하겄는데, 우리도 사기가. 그라고 총장한테 갔어. 사주쇼 그랬더니 이건 판공비가 아니라 내 개인 공금에서 나간 돈이라고 함녀서 사주더만. 그래갖고 인자 팔고는 교수들을 찾으러 다닌거여 교수 연구실마다. 속없이 나는 많은 교수들이 사줄줄 알았어. 그랬더니 막 뭐 어쩌고 저쩌고 핑계를대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나브렀어. 아예인자 교수들 저 복도끝에서부터 시작해서 누구 교수실인지도 안보고 고개 숙이고 땅땅 뚜드려갖고 열고는 책좀 사주쇼. 아 뭐 어쩌고 안녕히 계십쇼. 땅땅 두드리고 계속 방마다 돌아다녔어. 그래갖고는 한번은 얼마나 화가나는지 너무 안사주니까 한 놈도. 비율로 봐서 너무 안사줘븐게 상대 앞에서 문리대 옆에 상대 앞에서 악을 썼어. 이런 0새끼들이 없다고, 쌍놈의 새끼들이 형도 확정되기 전에 제자들 모가지 짤라놓고, 제자들이 이러이러한 일 이렇게 이렇게 해서 과외도 못하게 탄압받는거 뻔히 알면서, 0새끼들이 좀 그런데좀 쓸라한게 책 한권 안 사준다고. 교수새끼들 내가 전부 고무신, 그때 내가 고무신 신고 다녔는데, 귀방맹이를 발라븐다고 도둑놈의 새끼들 말이야. 제자들 죽이고 잘 먹고 잘산다고. 악을 막 쓰고 그랬더니 인자 소문이 났어. 인자 얼른 사줘브러야지 욕을 바가지로 안 먹는다더라.(웃음) 그래갖고 인자 사정없이 뚜들고 다녔는데. 내가 그때 이제 재수달이 없으니까 어떻게 돼 브렀냐믄 그 내가 그 허리가 인제 안 좋아져가지고, 고문의 후유증이 뚜들어 맞은것도 있고, 자세가 나쁜것도 있고 그래가지고 그 그래갖고 이제 이러고 다니는 못 피고. 어정어정하니 근데 이게 찜질하는게 있어요. 핫팩인가 고걸 담고다니면서 가방에서 좀 꼽아서 주라고 댑혀주라 해갖고 이렇게 딱하고 다니고 그랬는데, 아 그러고 다니다가 아폴로 눈병이 유행이 됐는데, 눈병이 와브렀어 인자. 그래갖고 인자 여가 여 소눈0처럼 이만해져갖고 고름이 끼고, 안대를 매고 허리 이래갖고 이 본관에서 학생회관 식당있는데 지금은 구 본관 요쪽건물. 지금도 학생회관 거가 식당있제. 거리가는 이렇게 길이 좁아. 걸어다니는 길이라. 옆에가 잔디밭이고. 거기다가 왕비열전부터 시작해서 삼국지부터 시작해서 온갖 책 선전팜플렛들 얼룩덜룩한거 쫙 펴놓고는 허리 못 펴니까 가압 여기다가 놔두고 여그(눈) 안대하고 책좀 사주쇼, 책좀 사주쇼 얼굴도 안들고. 그라고 한시간내 한나도 안 사드라고. 그래갖고 그라고 돌아다녔어. 악으로. 요놈이 좀 어지간 하니까 또 요리 오더라고. 요쪽으로 안대 돌려매고. 그래가지고 인자 화가 나갖고는 독심으로라도 팔아야겠다고 생각해갖고 지방으로까지 해서 강진, 완도, 장흥 막 돌고. 그래가지고 그때 당시에 2백 4십만원을 벌었다고. 엄청 큰 돈이지. 그래갖고 내가 두달하고 그만두니까 서울 본사에서 나 좀 더 해주라고 찾아서 내려오고 안만나고 그랬는데. 내가 생각해도 그때 독으로 했어요. 교수들도 욕 나한테 많이먹고 그러고 또 일면 세월이 흐르고 보니까 그 좋지도 않은 책을 교수들보고 사주라고 빡빡 우긴것도 억지는 억진데, 그때는 인자 그 생각보다는 자기들은 좀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인자 안해주니까 독기가 어떻게 하면 독선이야. 일종의 나는 옳으니까, 선하니까 안 도와주면 나쁜놈 이렇게 되는거지. 잘못이긴 한데 그때 내가 심하게 했어. 하여튼 긍게 인자 뭐냐믄 인제 독밖에 안남은거여 악밖에. 이 상황을 이겨낼라믄 이렇게 할수밖에 없다. 그래갖고 새끼들아 경찰도 사줬단 말이야. 근디 느그가 안사줘야 말이지. 느그 봉급이 얼만데, 이런 식이지. 그래갖고 안대 매고 다니는데 한번은 내가 보길도까지 들어갔어 인자 완도를 돌아다니는데 보길도 하면 전남대, 무슨 시험장인가 하여튼 건물이 있어요. 콘크리트 건물이 있는데, 전남대건물이여 농대것인가 무슨 임업 현장인가 인자 잠자리가 있나 시골에 그때만해도 관광지로 알려지기 전엔데 그 인제 그 건물 옥상에서 저녁을 암것도 없이 친구도 뭐고 없이 거기서 날을 새는데, 동네 꼬마들이 밑에서 막 놀고 있더라고. 그 인자 그때는 어떤 자세로 그때 그때를 살아갔냐 그 이야긴데 내가 인자 누워서 별 보고 있다가, 내가 누군가,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나선 인자 명색이 운동가다, 운동가가 이 보길도라는 섬에 들어와갔고 내가 무엇인가를 해 놓고 나가야학건데, 여기서 잠만 자고 나갈 것이냐. 뭣을 할까. 그래갖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또마들한테 지금부터 씨를 뿌리자 그래작고 꼬마들 홀렸어, 그래작고 노래를 가르쳐준다고 그래갖고 인자 꼬마들한테 애들 재밌는 이양기 잘하니까 어렸을때도 뭐 교회에서 노래, 이야기대회 같은거 항시 일등하고. 그래가지고 애들 엄청 웃겨가지고 딱 끌어모아놓고는 내가 그때 노래를 가르친 것이 이제 그 인자 지내놓고 나면 슬픈 이야긴데 선구자 노래를 가르쳤어 이제. 그 인자 나중에 친일파가 쓴 엉터리방터리 시고 어쩌고 해븐께 김 팍 새는데, 감옥안에서 그렇게 악쓰고 불렀던 노랜데. 이 노래를 이친구들이 어느날엔가 인자 입에 오르내라다 보면, 부르다보면 나이들면 아하 이레 이런 노래였구나 어떤 아저씨가 이렇게 가르쳐줬는데 이게 또 어떤 진로의 영향을 줄수도 있겠다. 씨를 뿌리자 노래의 씨를 그래갖고는 밤새 이제 선구자 노래를 가르쳤어. 애들이 따라서 하여튼 잘 하더라고. 그렇게 해서 인자 보길도 와서는 이정도 그라고 나가고. 지금 박형선이라고 지금 매젠데, 매제가 됐는데 그 친구가 지금 꽤 부자됐지. 그렁게 건설업에 성공해갖고 그때 인제 이 친구도 똑같이 집에서도 찬밥, 복학도 못하고 나 소한도, 그쪽으로 다니고 그럴 때 따라다녔는데. 나보고 형, 술을 좋아하거든, 막걸리 딱한잔만. 무슨소리냐 우리가 뭐 때문에 이걸팔고 다니는데, 아니 형님 딱 한잔만, 한푼이 없을때니까 그대 자기가 나도 그렇고. 이 돈은 우리 개인 돈이 아니야, 엊다 쓸 것인데? 그래갖고 끝까지 못 사먹게 안줘브렀어. 그랑께는 아이고 옷 벗어 부치고 빤스만 수영복이 어딨어, 물에 들어가서 헤엄치고 나와블더라고. 긍게 나는 인자 잊어브렀지. 미국 89년에 왔을때 아이고 그때 그 막걸리 한잔도 안사주고 그렇게 맺혔는데. 인자 그런식으로 팔아가지고 그렇게 해서 돈을 모아서 정길이 염소 사갖고 절에 들어가라고 구례사쪽으로 보내고. 하여튼 그때 비참했어요 인자. 형님, 인자 집세를 못내갖고 길바닥에 쫓겨나니까 어떻게 해서든. 대인시장 내가 93년에 귀국해갖고 대인시장을 갔는데, 왜그냐믄 대인시장에 들어가면은 이쪽에서 전남여고 있는 쪽에서 이렇게 내려와갖고 대인시장으로 들어가면은 요쪽으로 가면 여기 기사식당이 있었어요. 그때 백원이면은 밥을, 백반을 먹는거야. 그다음에 요쪽 요쪽으로 오면은 팥죽집이 있어. 내가 미국 가기 전에 거가 80원까지 했어요. 거 팥죽이 올라 갖고, 40원 60원 80원까지 갔는데, 그라고 인자 팥죽 한 그릇에 미원, 아 이제 미원이 아니라 당원, 당원하고 인제 나박김치 같은거 하나. 딱 정했어요 그때, 손님오면은 특별한 손님이라고 하면은 국밥, 인자 그것이 최고여. 국밥. 그 돼지머리 딱 걸어놓고 국수 이렇게 사리 딱 삶아서 놔두고 송송송 썰어서 인자 국수하고 해서 주고. 그게 그때 꽤 비쌌지. 그 국밥을 손님 올 때 최고. 그러고는 인제 주로 때우는 것이 팥죽이었어요. 뉴슈가 하고 당원, 그런거 놓고 그래서 인제 그때 생각나갖고 대인시장 가서, 갔더니 거기는 시설이 옛날하고 달리 멋지게 지어져가지고 깨끗해졌던데 옛날에는 허술했는데, 그 인제 대인시장 거기는 안 잊어버리는데. 그래가지고 인제 그걸 가지고 보태쓰고 이러 저리쓰고 그 어려움 속에서 지켜간거예요. 꺽이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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