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인혁당과 민청학련
면담자: 선생님 인혁당하고 실질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전혀 없었나요? 구술자: 그러니까 뭐냐면 사건 자체로 보면은 인혁당이라는 것이 아예 당이란느 조직 자체가 없었고, 옛날에 인혁당을 일차 사건 때 억지로 조작을 했다가 검사들이 기소 못하겠다고 사표 쓰고 그랬잖아. 그래갖고 다 무혐의로 나와 블고 두 사람만 형을 좀 받고 그랬을 정도였는데, 요 사람들이 인자 다시 이 사람들이 모여서 재건할라 그랬다고 인혁당 재건사건의 사건이거든. 민청학력사건에 관련된 부분이, 재건 위야 재건이 된 건 아니여. 그래갖고 엮어 넣은 거여. 근디 인자 왜 그렇게 된거냐면은 여정남 선배가 경북대에서 영남지역에서는 인자 경북대가 정치의식이 높았기 때문에. 학생운동에 전설적인 지도자지 인제 이 양반이 인제 졸업한 이후에 주로 선배들을 이렇게 접촉하는 과정에서 의식있는 사람들 만나게 되거든 또, 마찬가지 사회에서 그런 생각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또 후배들 밥이라도 살라고 그러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자꾸 키울 라고 그러고, 그거 그렇게 해서 만난 분들이 인혁당 재건의 관련자들이야. 인제 여정남 선배가 접촉하고 그런 사람들이. 그러고 또 인제 뭐냐면 인혁당 재건의 사건 사람들은 백퍼센트 조작 이라는 건 참 드물어요. 근게 이 양반들이 의식이 좀 있어. 좀 우리 식으로 우리 시대 상황으로 보면 60년대 예를 들면 그 양반들이 일차 사건 때지만 조끔 진보적이고 민족적이었지. 근디 다만 법을 위반했느냐 안했느냐는 다른 거지. 이제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거기다가 같이 고문당하고 고생을 했잖아. 그러믄 처음의 공유라는게 엄청난 거 뭐랄까 연대의식이랄까 결집력 이걸 갖게 되는데 끼리끼리 당한 사람들끼리 가끔 사회적으로 빨갱이로 몰리고, 소외되고 탄압받고 그러믄 끼리끼리 만나게 돼 있다고, 끼리끼리 만나다보니까 자꾸 이제 쏙닥쏙닥 삐틀어가는 소리들 많이 하잖아. 뒤에서 이 그룹에 여정남씨가 연결이 된 거지. 조직으로 조직원으로 가입을 한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는 인자 아끼는 후배가 된 거지, 쓸만한 후배. 그란디 요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인혁당 재건사건에서 곤란했던 게 이분들 중에서 한분이 대남방송을 라디오 단파 듣고 노트에 메모하고 그놈을 돌려 본 것이 나왔어. 고것이 인제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된 거지. 어쨌든 간에 여정남 선배가 인자 학생운동 쪽 후배들이 이철, 유인택 요쪽 그룹들하고 또 관계를 가졌거든. 왜 그냐믄 학생운동 출신이니까. 긍게 이제 학생운동권에서는 전주대 그라믄 아 전북대 그라믄 누가 있고 이런거지 그래서 이제 그 유신 치하, 유신헌법이 나오자 유신 쿠테타가 나오자 그런 생각들을 비판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위기감을 느낀거야. 야야 큰일났다. 이 상태로 가다가 안 된다. 그래서 인자 나름대로 모여서 쑥덕쑥덕쑥덕하는 과정에서 여정남 선배가 이제 서울, 서울대 출신들 운동권 친구들하고 연계를 가진거지. 동시다발적으로 해야 되지 않겠느냐 등등. 그래서 이제 여정남 선배는 인혁당에 소속이 안 돼있으면서도 민청학련과 연계를 시킬라믄 고리가 필요할 거 아니야, 이 고리로 집어 너븐거여. 여정남 선배를. 나중에 증거 인멸을 위해서 증인인 여정남씨까지를 죽여븐 거지. 면담자: 아 그때는 증인이었어요? 구술자: 아니 역사적으로 보게 되믄. 이 두 사건의 조작에 연계를 고리 역할을 했거든. 여정남씨가 저놈들 작품에 의하면. 그런데 여정남씨가 나중에 이거 순 조작이다 그라믄 이거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블잖애. 긍게 인자 조작 증인을 없애븐 거지. 그래서 여정남씨까지 죽여븐 거지. 젊은 나이에. 사형당해 브렀지. 근데 이제 그런게 전남지역에도 내가 귀국해서보니까 다 나와 계시던데 옛날에 이제 해방 공간이라던가 전쟁 전후, 그런과정에서 이를테면 조끔 좌익적 성향, 민족적 성향을 가졌던 어르신들이 숨을 못 쉬고 있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419이후 잠깐 봄이냐 하고 나왔다가, 다시 맞어블고, 다시 또 이제 지하로 들어갔다가, 이게 70년에 이후에 유신 쿠테타 터지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꾸 어른들이 예를 들면은 우리들이 이제 운동관계로 해서 무슨 집회를 한다던가 하게 되면 꼭 와서 얼쩡얼쩡해 왜 그냐믄 자기 관심영역인데 대견하기도 하고 새끼, 자기들 보기에는 좌적 입장에서 보면 새끼 빨갱이들이지. 인제 관심있게 볼 수밖에 없지. 자기 좋아하는 남녀관계 그렇잖아 자꾸 얼쩡얼쩡하듯이. 근디 인자 우리는 애써서 저 사람 가까이 하면 나중에 혼날 수도 었다. 조심. 일부러 그래가지고 피했다고. 광주에서도 많이 피했어 그사람을. 행사 끝나고 남녀은 인자 한쪽에 가서 술 먹고, 꼭 그 자리까지 와. 그라믄 우리는 빠져 나와블고. 근디 여정남씨는 그런 거 안 했어. 거리를 안뒀든 거지. 그래븐 것이 당해븐 거지. 광주에서는 그걸 무척 조심 했다고 90년대 와서 보니까 그 양반들이 다 전면에 나와 갖고 통일운동한다고 뛰어다니시고, 그러다가 한두 분 돌아가시고 그러는데 70년대만 해도 그양반들 내놓고 움직이들 못했어. 뱅뱅뱅뱅 돌았지 주변에. 긍게 인자 예를 들면 내가 75년에 내가 처음으로 보도연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보도연맹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듣게 되었냐믄은 민청학련사건 징역살고 그래갖고 나와 갖고 75년 2․15조치로 석방이 됐다고. 그래갖고 나와 갖고 몇 달 있다가 내가 기독병원에 재중병원이라고 그러지 거기에 인자 누구 문병을 갔다가 나오는 길에 화장실에 들렀어. 남자화장실이라고 서 있는데, 오줌 싸느라고 서 있는데 인기척이 나는데 돌아볼 거여 옆에 사람이 서 있는데, 오줌 싸느라고 서 있는데 인기척이 나는데 돌아볼 거여 옆에 사람이 누가 있다고 신경도 안 쓰는데. 근데 갑자기 나이 드신 분이 ‘고개 돌리지 말고 내 이야기 좀 들어주쇼.’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고개 안 돌리고 가만히 있었더니 보도연맹 이야기를 하는거여. 그래가지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연에 대해서 ㅇ라고나 계셔주쇼. 관심 좀 가져주쇼/’ 그러고는 안돌아봤어. 고개 돌아봤다가는 누군지 알으믄 골치 아플 것 같애서 그래가지고 인제 보도연맹이라는 말을 억울하게 죽은 이렇게 전쟁 직후에 그랬단 이야기를 갖고, 기회만 닿으면 시골에 가서 어른들 만나면은 보도연맹이라는 게 뭐예요? 그라고 인자물어가지고 보도연맹이 얼마나 무서운 학살사건인가에 대한 내막을 알게 되었지. 근게 나는 80년 81년 미국 간 이후 미국에서 5월 강연 같은 거 하게 되면은 양민학살의 역사와 518 이런 주제로 하곤 했는데, 그래갖고 제주 4․3, 보도연맹 이런 사건들부터 얼마나 많은 학살을 했는가 하고 연결시켜가지고 5․18 그랬는데, 그런게 인자 거기서 그 보도연맹이라던가 살아남았던 사람들 중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은 내 손잡고 울고. 그러다라고 그러면서 그들이 들은 이야기 또 듣고, 그래서 나는 80년대부터 많이 알았지. 근게 그런 흐름 그 사람이 내 오줌 쌀 때 따라 들어온 것은 나가 인제 신문 지상에 방송에 많이 나오니까 날 알아본 거지.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민족운동의 입장에서나 좌익 입장에서도 커 나오는 새끼 정도로 보는 거지. 그니까 슬그머니 자극을 주는 거지. 그런 예가 많아요. 그런 자극이라는 게 윤강옥이라고 민청학련 사건 때 인자 문리대 생이었는데 들어갔다가 지금은 한창 김대중씨 따라다니다가 서울 수도권 그 쓰레기 매립장 이사던가 간사론가 있는데, 그 친구 이야기도 들어보면 재밌어요. 교도소 안에 있는 좌익수들 중에서 장기수들, 비전향 장기수들 이 교화내지 전향하기 시키기 위해서 교도소들 마다 현장 시찰 프로그램이라는 게 있다고. 그래갖고 새마을 운동 잘 돼 있는 데, 잘돼 있는 공장, 보면서 대한민국이 얼마나 발전 했는가 이런 걸 인제 보여주고 인자 보고서 소견문, 소감문 같은 거 쓰라고 하고 봐갔고 근데 삐딱하니 써갖고 맨날 뚜들어 맞고 그러지. 그래서 가까운 사람이믄 70년대 이야기 들어 보믄 지금도 소가 발을 갈고 있다. 북조선에서는 트랙터로 하고 있는데, 이따위소리. 면담자: 아 소감문을 그렇게 쓰는 거예요? 구술자: 그런 식으로 쓰는 거야. 비전향장기수들 그 사람들이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인데. 그것 아니믄 살아있는 의미가 없는데, 그라믄 인제 뚜들어 패 블고 그런식이지. 근디 인자 거기 사람들이 사직공원 팔각정엔가를 공원에 나왔었던 모양이야. 강옥이가 무심결에 거기를 갔는데 사복 입혀서 나오고 교도관들도 사복을 입고 모은대잖아. 근데 거기서 좌익수 한 사람이 강옥이를 보고, ‘현실을 직시해!’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키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거야 이 사람이. 게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러는데 그래서 인제 저쪽 사람이 끌고 가고 긍께는 인자 알아보니까는 교도관이고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그게 그것에 하도 충격이라 뇌리에 잊혀지지 않지. 그런 세상 살다보면 그런 게 있다고. 작은 계기로 인해서 엄청난 변화가 촉발되는 그런 세상이 있는데. 이상해 하여간에. 아까 애기하지만 괜히 원자탄 떨어져도 이 자리를 뜨지 말자 했는디 괜히 앉았다가 다 일어나븐게 나도 같이 따라 일어나블고 머리 깍아븐게 할라믄 하고 말면 말고 이런 결단을 내려븐다던가. 내가 민청 때 나는 좀 특이했는데 4월 3일 긴급조치 4호가 내린 다음에 내가 죽기를 각오하고 후배들한테 유서를 쓰라고 했어. 유서를 우리들 가면 죽는다고. 근데 다 유서 못썼대. 왜 못 썼냐 그랬더니 눈물나갖고 못 쓰겠대. 나도 못쓰고 말았는데. 그러고 내가 고향에 내려가서 아버님한테 가서 다른 사람들 다 깜짝 놀래. 어떻게 그럴 수 가 있냐고. 아버님한테 가갔고 아버님 제가 아무래도 이 정치판 돌아간 것이 눈뜨고 못 보겠어서 학교 제적당하고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죽을 각오했다는 소리는 안했어.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싸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아버님이 이러고 앉아서 듣고 계시다가, 그래 해라. 그런데 앞장만 좀 스지 마라. 앞장 스지 말라는 말은 아버님으로서의 이야기여. 하라는 말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한 말이고. 예, 앞장 안 스겠습니다. 거짓말 치고 나왔지. 그 이야기 들으면 다들 놀랜다고. 대게 인자 부모들 그러믄 벽장 안에다가 넣어 놔 분던가 난리가 나블지, 경찰에 신고를 한다던가. 자식이 죽게 생겼는데 감옥에 가고. 우리 아버님은 해라. 앞장만 스지 마라 그러시는데 내가 인제 징역살고 나왔으니까 일주일 전에 돌아가셔브렀지. 내 그만큼 아버님에 대한 신뢰, 아버님이 나에 대한 신뢰를 가졌기 때문에, 부자지간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제. 긍게 나는 부모님들한테 갑작스런 충격을 주는 것보다 미리 가서 이야기를 하고. 하여간에 세상은 재밌어. 어쨌든 간에 그렇게 해 가지고 민청학련 사건 열 달 조끔 넘어서 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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